3불정책 폐지, 사교육 보다 '특권적 경로' 구축이 더 문제(김종엽, 08-12-10) / 한국 사회의 교육 불평등 (2003) / ‘승복의 기제’로서의 시험 (01-02-27)
새벽길2009. 1. 12. 09:42
김종엽 교수는 교육을 통한 계급재생산에 관심이 많다.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글에서 국제중 설립 문제, 3불정책 폐지를 비판한 것도 그것이 가지는 '특권적 경로' 구축이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그의 과거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프레시안에 실린 그의 글을 퍼온 김에 네이버블로그에 담아놓았던 그의 교육 관련 글도 퍼다놓는다.
----------------------------------------------------- 3불정책 폐지, 사교육 보다 '특권적 경로' 구축이 더 문제 (프레시안,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08-12-10 오후 12:05:12) [창비주간논평] 국제중-특목고-명문대로 이어지는 계급재생산
이명박정부의 성격이, 낡은 성장주의와 미국발 금융위기와 더불어 마찬가지로 낡아버린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라는 것은 이제 대중적 상식이다. 안팎에서 닥쳐오는 경제위기 속에서 이명박정부는 아주 '실용적으로' 이 두가지 정책 레퍼토리를 구사하고 있다.
시장에 대한 국가개입 요청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는 분양가와 과잉공급의 주체인 건설사 구제나 변형된 한반도운하 사업 같은 성장주의적 대응을 하고, 경기부양 요구에 대해서는 부자에 대한 감세 같은 신자유주의로 응대한다. 엄중한 경제위기에 대한 이명박정부의 이런 정책적 동문서답을 관류하는 핵심은 아주 좁게 설정된 지지층과 더불어 "상황이 어떻든 챙길 건 다 챙기겠다"는 탐욕에 다름아니다.
이런 후안무치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조직화를 막기 위해 이명박정부는 사정기관들을 동원하고, 숱한 정책연구기관장과 방송사 사장에 더해 정치와 무관한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장들마저 내쫓고 있다. 그리고 방송에 대한 통제를 항구화하기 위해 지상파 방송사업에 재벌과 보수신문사가 진출할 길을 열고자 하고 있다. 속내가 뻔한 정치산술과 이권추구가 판을 치고 있는 셈이다.
교육제도 개편의 핵심은 국제중 설립과 3불정책 폐지 그런 중에 이른바 국가 백년대계라는 교육에 대해서도 정부와 여러 관변단체들이 손발을 맞추어 판을 새로 짜겠다며 덤비고 있는데, 이에 대한 공세는 다른 정책영역에서의 이권추구를 한층 넘어서는 야심이 내비치고 있다. 오랫동안 평등주의적 기조 아래 운영된 교육영역을 위계적인 체제로 재편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 재편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국제중학교 설립과 3불정책 폐지이다.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다르다는 이유로 근현대사 교과서를 막무가내로 강제 수정하려 드는 작태나 4·19혁명을 데모로 격하하는 경악스러운 역사인식을 좌시할 수는 없지만, 굳이 경중을 두어 말한다면 이런 문제는 국제중학교 허용이나 교육 3불정책 폐지 시도에 비하면 덜 중요하다. 그리고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이라는 해괴한 명칭의 단체가 서울의 전교조 교사명단을 공개함으로써 일으키고 있는 논란도 숨은 의도가 있든 없든 간에 그 핵심효과는 이런 더 중요한 문제에 대한 전교조의 저항을 약화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국제중학교와 3불정책이 매우 중요한 문제인만큼 이런저런 토론들이 조직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논의의 중심에 등장하는 것은 사교육비 문제였다. 하지만 국제중학교 설립과 3불정책 폐지가 중심 문제인 이유는 사교육비 증대 때문이 아니다. 사태를 사교육비 증감의 견지에서만 조명한다면, 우리 사회 성원들은 문제의 심각성에 오히려 둔감해질 것이다. 사교육비는 지난 몇십년간 꾸준히 증가해왔다.
사교육비 증가를 막는 데 적극적인 정치세력이 집권한 시기에도 그랬고, 사교육비 증가를 막겠다는 입시개혁이 도리어 사교육비를 증대시킨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정책이 사교육비를 증가시키느냐 억제하느냐 하는 논란에 냉소적이 되거나 무관심해졌다.
국제중―특목고―명문대로 이어지는 특권적 경로 국제중학교 설립과 3불정책 폐지의 요점은 사교육비 증대보다는 교육을 통한 계급재생산의 특권적 경로가 완성된다는 점에 있다. 국제중학교는 예전 특목고가 그랬듯이 계속해서 팽창해나갈 것이다. 생각해보라. 서울에 국제중학교가 2개나 생겼는데, 부산과 광주와 대구 같은 도시들에 그것을 금지해야 할 어떤 이유가 있겠는가?
2010년에 있을 지방선거와 교육감선거에서 국제중학교 설립은 핵심의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진보적인 정당들조차 이 문제를 비껴가고서 선거에서 승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국제중학교는 전국적으로 확립된 진학경로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리고 특목고와 연결되는 하나의 통로를 형성해나갈 것이다.
이런 통로를 다시 명문대학들과 연결하기 위해서는 3불정책 폐지가 요청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굳이 3불정책의 공식적인 폐지가 요구되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특목고의 팽창으로 인해 평준화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대학들은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시도하고 있다. 연·고대가 수능성적만으로 정시의 50%를 뽑는 전형을 채택한 데서 보듯이, 본고사 금지 또한 그렇게 중요한 의제가 아니다. 본고사 폐지는 대학이 언제나 쓸 수 있는 카드 한장을 손에 넣는 것일 뿐이다.
지뢰밭이나 다름없는 기여입학제 문제도 현재 국면에서는 논의의 장을 형성하는 것 이상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3불정책 폐지는 편법적 관행을 법적 상태로 전환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립대학총장협의회나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이 끈기있게 이런 주장을 해온 것에서 보듯이, 이런 전환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일이다. 이 전환이 없다면 2009년 고대 수시 2-2 일반전형에서처럼 대학은 계속해서 a와 k 값을 가지고 '장난'을 쳐야 하고, 그만큼 많은 지원자들에게 분노와 원한감정을 심는 동시에 그 자신은 권위의 실추를 경험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특권은 조잡한 협잡의 산물로 의심받게 된다. 그래서는 특권이 제 값어치를 하기 어렵다. 특권은 항상 그것을 정당한 성취로 전환하는 마법을 필요로 하며, 그 일차적 과제는 위법의 낙인을 벗고 합법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3불정책마저 폐지된다면… 그렇기 때문에 허울만 남았다고 해서, 그저 상징적 이름으로만 남았다고 해서 3불정책을 손쉽게 보수층과 상류층에 넘겨주어서는 안된다. 실제를 빼앗긴 것보다 이름을 넘겨주는 것이 더 큰 것을 양보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름이 남았을 뿐이라면 더욱 그 이름을 지켜야 하며, 그것이 이름에 걸맞은 실제를 회복할 디딤돌을 잃지 않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3불은 우리 사회가 스스로 그어왔던 선이다.
이 선 이외에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교육제도에 대해 합의한 것이 무엇이 있었는가? 그 선이 자주 침범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선을 지워야 하는가? 아무런 다른 합의선이 형성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선을 지우는 것이 수상한 협잡과 사회적 배제로 얼룩진 특권의 경로를 매끈하게 다듬는 데 봉사하는 것인데 말이다.
물론 3불정책을 고수하는 것으로는 전혀 충분치 않다. 애먼 전봇대를 뽑으며 시작한 정권이 3불정책을 전봇대마냥 뚝딱 뽑고자 덤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대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3불을 지켜야 하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더 넓게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뿌리는 더 나은 교육적 비전과 그것을 제도화하려는 실천임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에 진력하자.
-------------------------------------- 2004/09/20 10:58 한국사회의 모순을 집약한 것이 교육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고교등급제 논란을 보면서 예전에 읽고 정리해놓았던 종엽형의 글이 떠올라서 옮겨보았다. 그리고 수원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사회화 내지 '인간과 문화'에 대해 설명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부르디외의 논의가 아주 유용하게 써먹힌다.
종엽형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한다. 그렇다면 처방은? 글쎄다. 내가 쓴 글이 아니라 종엽형 글을 요약한 것임에 주의.
------------------------------- 김종엽. 2003. "한국 사회의 교육 불평등." 「경제와사회」 59: 55-77. 한울.
요약
우리 사회는 해방 후 학력이 지위상승의 첩경이라는 사회적 지각의 일반화, 반공 블록하에서의 집합적 지위상승의 제약 등의 요인에 의해 격렬한 교육경쟁에 빠져들었다. 이 교육경쟁의 귀결로 학교팽창을 통한 교육기회의 균등화가 일어났으나, 고등교육단계에서 교육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 과정은 지위경쟁에 의한 교육팽창 과정이 매우 순도 높고 강력하게 관철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교육이 근대적 계급분화의 와중에서 지위배분의 지표 역할을 학력이 담당함으로써 사회이동의 통로 역할을 했으나, 전체 사회의 계급구조가 완숙해져감에 따라 교육제도는 대체로 계급 재생산의 기제로 고착화되어갔다. 상층계급 또는 중상층집단은 사교육 시장에서 더 나은 교육상품을 구매할 경제적 능력과 그들이 가진 문화자본의 전수를 통해서 교육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그 정도는 계속해서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근대적 업적주의 이데올로기는 학력주의와 강력하게 융합되었으며, 이로 인해 모든 계급이 학력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으며, 심각한 교육경쟁이 야기한 여러 가지 문제들은 상층계급에게조차 족쇄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상층계급을 중심으로 공교육 안에서 더 나은 교육재를 구매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에 대한 요구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방대한 사교육 시장에서 낭비되는 돈을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교육재정을 가멸케 하는 데로 유도하자는 국민경제적 정당화 논리든, 평준화가 하향평준화를 야기한다는 잘못된 상식에 근거한 강변이든, 그도 아니면 학부모와 학생의 학교 선택권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주장이든, 그런 요구가 겨냥하는 바는 존재하는 계급구조에 더욱 조응하는 더 불평등한 교육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요구가 관철될지는 교육을 둘러싼 계급간의 투쟁의 결과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김종엽, 2003: 55-56).
계몽주의 문화와 학교의 확산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체제의 정당화 문제가 맞물리면서 형성된 근대교육체제는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결과, 즉 해방이 아니라 예속, 평등이 아니라 불평등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으로 전락한다(김종엽, 2003: 58).
두 가지 이유에서 교육기회의 평등은 교육적 평등을 보장하지 못한다. 우선 학교교육이 내면화하고 있는 교육적 권위와 교과과정 따위가 특정한 계급의 에토스를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공식적인 교과과정은 보편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정당화된 것이다. 하지만 부르디외가 지적했듯이 근본적인 수준에서 그것은 문화적으로 자의적인 것들이며, 실제로는 어떤 계급에게는 문화적으로 친숙한 것이지만, 다른 계급에게는 낯설고 거북한 것들이다. 즉 교과과정은 전혀 중립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한다. 교육적 권위를 행사하는 교사집단 또한 특정한 문화적 에토스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문화적 편견은 학생을 분류하고 통제하고 훈육하는 데 있어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교육제도에 내장된 편의들은 하층계급의 자녀의 교육적 성취를 방해하고, 낮은 학업성취를 자기 책임으로 돌리게 하는 상징적 폭력을 행사한다.
다음으로 교육적 성취의 핵심적인 관건이 가족을 통해서 전수되는 문화자본이기 때문에 교육적 불평등은 여타 교육여건이 평등화되어도 관철되어 나간다. 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학업 성취 간의 높은 상관관계는 어디서나 발견되는데, 그 이유는 교육적 성취는 항상 현재 속해 있는 교육제도가 주입하고자 하는 하비투스와 이전의 교육을 통해서 형성된 하비투스 간의 상관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제도와 교육적 의사소통 안에 관류해 들어가 있는 계급적 에토스와 친근성을 가진 계급의 자녀들은 학업성취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교육기회의 평등은 전혀 결과의 평등을 확보해주지 못하며, 오히려 결과의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승복을 강화하는 기제가 된다. 즉 업적주의와 학력주의 간의 연계라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근대적 정당화 기제가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할 뿐이다(김종엽, 2003: 60-61).
해방 후 한국의 교육열을 빚어낸 가장 중요한 요인은 우리 사회가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사회라는 사실이었다. 이는 지배계급 자체의 소멸을 뜻하는데, 일제가 철수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전체 사회성원이 돌진하게 되는데, 이때 무엇이 그것에 접근하는 길인가 하는 것에 대한 대중적 지각은 매우 중요했다. 대중이 이 시기에 발견한 것은 일제시대에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 그리고 유학생들이 지배층으로 상승해갔다는 사실이었다. 즉 학력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 매우 높았으며, 이로 인해 학력주의적 사고도 더불어 일반화되었다.
다음으로 해방 후 좌우파의 격렬한 투쟁 속에서 남한사회가 반공국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남한 사회에서는 대중이 농민운동이나 노동자운동을 통해서 집합적으로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여지가 극히 협소해져버렸다.
학력경쟁을 유도한 이런 초기 조건 이외에도 대단히 미흡했던 복지체제도 중요한 요인이다. 가족을 제외한 사회적 안전망이 거의 없었던 산업화 초기에 대중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보장을 자녀의 성공에 걸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자녀에 대한 교육 투자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 의한 엄격한 고등교육 정원 관리가 60, 70년대를 통해서 대학교육의 사회적 가치를 엄청나게 높였다. 최근 들어서 박정희 정권의 적극적인 산아제한정책, 그리고 그런 정책에 대한 대중의 적극적인 동조로 인한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도 더욱 중요해졌다(김종엽, 2003: 64-65).
종합대학들이 매우 가파르게 수직적으로 서열화된 결과 사회적 엘리트 집단들은 동창집단으로 결속된다. 따라서 사회의 주요 엘리트 집단들은 분화되어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융합되어 가게 된다. 그러므로 명문대학 졸업생들은 그들이 명문대학 입학과 그 대학에서의 학업성취를 통해서 입증한 능력 때문에 높은 보상을 받는 것 이상의 사회적 기득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요컨대, 명문대학은 사회 선별의 기준으로서 투자가치를 가지는 것 이외에 해당 학교의 졸업생에게 엄청난 사회적 자본을 제공하게 되기 때문에 강력한 교육투자의 대상이 된다(김종엽, 2003: 66).
각 지역 학부모들의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을 통제한 이후에도 각 지역의 상위대학 진학률과 과외비 지출이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이주호ㆍ홍성창, 2001: 40-43). 이런 연구는 경제적 자본이 문화 자본으로 변형되어 상속되기보다는 더 우수한 교육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시장능력을 통해서 작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과외비를 지출하더라도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집단과 진학하는 집단간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요인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 이주호와 홍성창의 연구에는 없다.
가설적으로 보더라도 과외비 지출규모와 상위권 대학의 진학간의 높은 상관관계에는 다른 매개요인들이 작용할 수 있으며, 이 매개요인들은 대체로 문화 자본과 관련된 요인일 가능성이 많다. 예컨대 과외비를 전체 사회의 평균보다 더 지출하는 것은 반드시 경제적 능력만의 표시는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자녀가 상위권 대학의 진학 가능성을 보일 때, 가능해지는 투자이다. 이 가능성 자체는 과외가 아닌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 형성된 것일 수 있다. 학업성취 능력은 생각보다 어린 시절에 가족 내 사회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사교육 시장에서 자녀에게 가장 적합한 교육상품을 선별해서 구매하는 일은 단순히 경제적 능력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부모의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외형적인 양상과는 달리 경제자본이 고급과외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작동하는 동시에 문화자본으로 변형되어 전수될 가능성이 상존하며, 아마도 양자가 결합할 때 가장 유효한 효과를 낳는 것이 우리 사회의 실제 상황에 접근하는 판단일 것이다(김종엽, 2003: 68-69).
기회균등은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치는 아니며, 그것은 실제로 실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매우 격렬한 교육경쟁으로 인해 교육은 모든 계급에 보편적 형벌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상층계급의 경우, 명문대학 진학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매우 크며, 경제적 자본의 문화적 위상이 높지 않은 반면, 업적주의와 연계된 학력자본에 대한 문화적 신뢰가 강력해서 경제적 자본을 학력자본 내지 학벌자본으로 전환하여 상속하는 것이 지배계급으로서도 매우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중간층의 경우, 지난 몇 십 년간의 사회발전 속에서 자신들의 계급적 지위를 보증해온 것이 학력 내지 학벌이었던 만큼 자녀의 학력 내지 학벌의 하락은 곧장 계급적 실추를 의미하는 것이 된 상황이다. 하층계급의 경우, 이미 대학 졸업장이 예전의 중학교 졸업장이나 고등학교 졸업장에 지나지 않는 볼품 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은 모든 계급에게 불만스럽지만, 특히 상층계급이나 중상층에게 불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공교육의 질이 평준화되어 공교육의 영역에서 더 나은 교육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교 평준화 제도야말로 현재의 교육제도하에서 가장 큰 사회적 갈등의 장이라 할 수 있다.(각주: 학벌 사회 비판은 교육 불평등에 대한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사회적 의제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아직도 학벌과 학력에 대한 완강한 신뢰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벌 사회에서는 학벌이 주는 편익 또한 학벌만큼이나 위계적으로 배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벌 수혜자와 피해자가 중첩되는 계단식 배열은 학벌 비판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기 어렵게 한다. 더불어 학벌 문제는 이익에 대한 계산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더욱 사회적 의제로 발전하기 어렵다.)
평준화 제도에 대한 공격은 매우 근거가 박약한 것들이다. 우선 평준화가 학력의 하향 평준화를 야기한다는 주장을 보면, 지금까지 평준화 지역 학생과 비평준화 지역 학생 간의 학업성취에 대한 모든 비교 연구는 평준화가 학생들의 학력을 저하하기는커녕 오히려 끌어올린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평준화 제도가 창의력 있는 교육을 저해한다는 주장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창의력을 갉아먹는 것은 입시위주 교육이지 평준화가 아니며, 평준화는 적어도 고교입시를 제거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평준화보다는 창의력 개발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
평준화가 과외비를 증가시킨다는 주장(이주호ㆍ홍성창, 2001)은 과외를 학교교육이 부응하지 못하는 초과 교육수요의 결과로 해석하면서, 평준화가 과외를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평준화의 해체는 고교입시를 유발하며, 그것이 과외수요를 증대시킨다는 점을 놓치고 있고, 과외를 학교교육이 부응하지 못한 초과 교육수요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과외비는 오히려 "교육기회의 불균등 독점을 위해 소용되는 비용"(천세영, 1997)으로 파악되는 것이 옳다. 요컨대 사람들이 과외비를 투자하는 이유는 학교교육이 교육기회의 불균등을 제거하고 있기 때문에 불균등을 재도입하기 위해서이지, 학교교육이 어떤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외비를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학부모와 학생의 학교선택권에 근거한 평준화 비판은 신자유주의와 연관을 가진 것이다.(각주: 교육선택권론자들은 한편으로는 교육 수혜자들의 권리와 참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교육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가지고 있지만, 탈규제와 탈국가화를 곧장 탈공교육화 내지는 교육의 시장화와 등치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런 한에서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자장에 포섭된다.) 이 또한 근거가 박약한데, 학교선택권이 부여되어야 한다면, 그것이 고교에 한정될 이유도 없거니와, 어느 단계부터의 학교선택이 더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교육적 선택인가는 해당 사회가 각자의 문화적 전통과 사회적 합의에 의해 결정할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김종엽, 2003: 70-72).
처음에는 근대적 계급분화의 와중에서 지위배분의 지표역할을 학력이 담당함으로써 교육이 사회이동의 출구 역할을 했으나, 전체 사회에서 계급구조가 완숙해져감에 따라 교육제도는 대체로 계급 재생산의 기제로 고착화되어 갔다. 상층계급 또는 중상층 집단은 사교육 시장에서 더 나은 교육상품을 구매할 능력과 그들이 가진 문화자본의 전수를 통해서 교육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그 정도는 계속해서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근대적 업적주의 이데올로기는 학력주의와 강력하게 융합되었으며, 이로 인해 모든 계급이 학력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갔다. 이런 상황은 상층계급에게조차 족쇄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과외수업을 통해서 학업성취를 높이려는 시도가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되고, 어린 자녀들에게도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 되며, 학업 성취가 과외비 지출능력에 의존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은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또한 침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충계급을 중심으로 공교육 안에서 더 나은 교육재를 구매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에 대한 요구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방대한 사교육 시장에서 낭비되는 돈을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교육재정을 가멸케 하자는 국민경제적 정당화 논리든, 평준화가 하향평준화를 야기한다는 잘못된 상식에 근거한 강변이든, 그도 아니면 학부모와 학생의 학교 선택권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주장이든, 그런 요구가 겨냥하는 바는 존재하는 계급구조에 더욱 조응하는 더 불평등한 교육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요구가 관철될지는 교육을 둘러싼 계급간의 투쟁의 결과에 달려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계급과 극히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이며, 계급적 차이는 어떤 사회적 제어에도 불구하고 관철되어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특목고를 입시목적고로 변형하고 나아가 자립형 사립학교를 제도화하려는 상층계급과 중상층 집단의 의지가 관철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김종엽, 2003: 74).
교육제도는 불평등한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해도 사회화의 기본 과제, 그러니까 자아 정체성의 건강한 형성과 유대감의 창출, 그리고 문화적 전통의 전수라는 과제를 이행해야 한다. 사회적 불평등과 대립을 과도하게 교육제도 속으로 이양한 사회는 이 사회화의 기본 과제조차 지나치게 침식하게 되며, 우리는 이미 황폐해진 청소년 문화 속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이런 대가를 생각한다면, 자립형 사립고가 생겨나서 교육제도가 이전보다 더 적나라하게 불평등해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넘어서서 교육제도에 떠넘겨진 사회적 불평등을 본래의 자리로 소환하여 그 자리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김종엽, 2003: 74-7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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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11/28 15:51 내가 박사과정을 수료하고도 엉뚱한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빨리 학위를 따서 졸업해야지" 하고 맘을 먹는 이유는 이 사회에서 먹고 사는데 있어 학위라는 게 일종의 내 능력을 보증하는 자격증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자격증 등을 선별(screening)기제 내지 신호(signal)기제로서 파악한다. 사실 교수 능력을 다른 식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굳이 학위 따위를 요구하지 않을텐데, 이런 것이 없이는 비교기준이 객관적이지도 않고, 공정하지 않은 요소가 작용할 가능성이 있기에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학위나 자격증에 대한 신뢰가 전제가 된다.
최근의 대학교수의 가짜 박사학위 문제가 논란이 되었는데, 업적이나 능력의 측정 및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런 가짜 박사학위의 문제는 하루이틀의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학위에 일종의 기준이 되는 한 말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귀찮아졌다. 그냥 관련 글을 덧붙이련다. 경향신문 2004년 11월 25일자에 실린 김우창 교수의 [자격증과 실력]이라는 글을 올린다. 그리고 여기에서 조금 빠진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한겨레21 2001년02월27일(제348호)에 실린 김종엽 교수의 ['승복의 기제'로서의 시험]을 추가한다. 사실 이 글은 조금 초점이 어긋난 느낌이지만, 수능 파동과 관련하여 음미할 만하다. 예전 홈페이지에 저장되어 있던 것이다.
최근 대학교수의 가짜 박사학위에 대한 보도가 몇 건 있었다. 박사학위가 교수 채용에 중요한 요건이 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가짜 학위 사건이 요즘보다 더 자주 등장했다. 그럴 때면, 나는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를 나 나름으로 궁리해보곤 했다. 가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대학에 취직했을 때 그가 참으로 가짜라면 교육이나 연구에서, 가짜라는 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은 학위야 어찌 됐든 그가 진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경우 학위증의 진위는 별 의미가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 것이다.
- 가짜와 진짜학위의 차이 - 물론 이러한 생각은 대학의 교수를 단순히 전문 분야 지식의 전달자나 생산자라고 규정한 다음에 가능한 것이다. 교수를 도덕적 모범이라고 보게 되면, 가짜 학위 소지자는 도덕성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박사학위의 진위를 문제삼는 것은 대체로 그 사람의 학문의 진정성을 문제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조금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표(師表)로서의 교수라는 문제를 떠나서도 학문의 윤리와 삶의 윤리 사이에는 일정한 연속성이 있다. 도덕의 관점에서 기본적인 정직성이 없는 곳에 학문이 요구하는 사실과 논리의 엄밀성의 기준이 지켜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는 하나 학위와 학문의 관계만을 볼 때 둘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 세계에서의 진위는 자격증이 아니라 계속적인 수행으로 결정된다. 한번의 학업에 대한 증명이 이 수행의 수월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도덕성 또는 사람됨됨이 문제라면, 그것은 더욱 자격증으로 보증될 수는 없는 것이다.
대학 교수의 학위뿐만 아니라 졸업증을 포함한 다른 형식적인 인증의 경우도 그것과 실력 그리고 사람됨됨이 사이에 확실한 보증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해내는 능력으로 본다면 학교에서 일정한 과정을 학습한 사람보다는 현장에서 일을 배운 사람이 대체로 더 낫다-이러한 사실 조사의 결과에 근거해 미국의 개혁 사상가 폴 굿만은 1960년대에 미국 교육제도의 대혁신을 주장한 일이 있다. 초·중·고 교육을 마친 모든 젊은이들에게 현장 수련의 기회를 주고, 대학은 이론적인 지적 욕구를 갖는 직장 경험자를 위해 순수 학문의 전당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현실적인 제안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제도 하에서는 사람들의 능력이 증명서 그리고 그것의 근거가 되는 짧은 시간의 시험으로 측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능력은 상당 기간 동안 지켜본 결과와 성실성 그리고 사람됨됨이의 총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총체적인 능력은 확연하게 정의될 수 있는 공동체 내에서만 평가될 수 있다. 물론 그 신빙성은 공동체의 진정성을 전제한다. 관여된 공동체 자체가 일정한 도덕과 지식의 기준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평가가 믿을 만한 것이 될 수는 없다. 물론 거기에도 한계는 있을 수 있다. 공동체는 대부분의 경우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에 억압적인 제어장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증·시험으로 능력결정 모순 - 그러나 간단히 생각하면, 공동체의 요건은 신뢰와 인간 능력의 우발성에 대한 낙천적 믿음으로 족하다고 할 수도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의 미국 여행담에는 출신이나 학교 등의 배경을 확인하지도 않은채 본인의 말만 듣고 기차에서 만난 사람을 자신의 사업장에 채용하는 사업가를 보고 놀라워하는 대목이 있다. 이것은 신뢰의 모험을 감당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사회의 이야기라고 하겠지만, 사실 사람이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은 기회와 모험과 우연 그리고 능력과 성실한 수행, 이러한 것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한데 엮어져 일어나는 기적이다. 부르제가 본 미국 사회는 이러한 능력과 우연의 놀이를 낙관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인간의 능력이 참으로 몇 시간의 서면 시험의 성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오랜 과학적 실험으로 확립된 듯한 소위 지능 검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사회적 효과를 가진 ‘인간의 오측(誤測)’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시험 성적의 경우 오측의 확률이 더욱 클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지표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가장 믿을 만한 지표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다만 믿을 만한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시험 성적의 중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계량화된 성적은 경쟁의 장에서 싸움을 방지하는 데 중요한 수단으로 일정한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절대적 의미를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평가의 문제를 거기에 수렴시키는 것은 인간 능력의 사회적 동력학을 잘못 이해하는 일이다. 인간 능력의 평가는 보다 총체적으로 그리고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더불어 인정해야 할 것은 사람의 일에는-물론 대학 입시의 경우에도-엄밀한 보장이 존재하기 어렵고 우연과 모험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금의 시점에서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야 하는 학생들이나 학부모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한가한 이야기밖에 되지 않겠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서 지나친 학교의 서열화나 그로 인한 교육과 사회의 비정화를 완화하기 위해 가끔은 상기해야 하는 이야기다.
- 大入평가방식 변화필요 - 다시 가짜 학위의 문제로 돌아가자. 요즘 대학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진짜 학위를 가졌더라도 계속 업적 심사를 받지 않으면 안되게 돼 있다. 이 사실은 바로 학위가 학문의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시행되고 있는 제도는 자격증 제도를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준다. 평가는 평가의 범주를 한정하고 기준을 정할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요즘 우리 대학들에서 평가의 결과는 대체로 수량적 측정의 형태로 집계된다. 그런데 미리 정해놓은 범주와 기준 그리고 계량화가 사람의 정신의 업적을 헤아리는 가장 좋은 척도는 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미리 정해 놓은 측정의 기준들은 참다운 창의적 업적을 바르게 알아보지 못하게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평가제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하나는 객관적 평가에 대한 허망한 믿음이다. 진정으로 객관적인 것은 깊고 넓은 주관적 평가다. 그것은 온전한 학문의 공동체 안에서만 형성된다. 대학입시와 같은 데에 이러한 이상을 현실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을 되돌아보고 현실을 그에 견주어 평가해 보는 것이 부질없는 일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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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길잡이 번호 : 150 게시일 : 2001/02/28 (수) PM 09:18:58 조회 : 13
이번 주 한겨레21의 커버스토리는 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김종엽 교수(종엽이 형을 정식으로 부르려니 이상하군..)가 쓴 글은 시험의 문제점은 둘째치고라도 그 대안을 고민하자는 의미에서 괜찮은 글이라고 생각해서 퍼왔습니다.
[표지이야기] ‘승복의 기제’로서의 시험 (한겨레 21 2001년02월27일 제348호,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단번에 선을 긋듯 갈라지는 불평등한 배분… 특권의 진입문턱을 낮추는 사회적 노력을
시험은 경제적이다. 시험은 합리적이고 평등주의적이다. 이것이 시험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이데올로기일 텐데, 효력을 발휘하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그것은 거짓말만은 아니다. 과연 시험은 사람의 자질을 평가하는 경제적 방식이다.
학교와 시험은 패배의식의 ‘조기교육장’ 만일 어떤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100인데, 1만명의 사람이 그것을 원한다고 해보라. 지원자들을 실수없이 질적으로 엄정하게 평가하기 위한 경제적·시간적 비용 자체가 얼마나 엄청날 것인가? 시험이 합리적이고 평등주의적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것은 응시자가 갈망하는 자리를 차지할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직접 묻는다. 또한 그렇게 하면서 지원자의 존재를 그의 실력 뒤로 완벽하게 숨긴다. 그로 인해 인간적 요소가 평가에 개입할 여지를 배제한다. 누구나 출신이나 성별 또한 학벌과 관계없이 그것에 직접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시험은 그 결과에 대한 완벽한 승복을 얻어낼 수 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문제를 푸는 능력에서 서로간에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가가 선명한 숫자로 판가름난다. 결과에 이의를 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거꾸로 볼 필요가 있다. 시험이 경제적이고 합리적이며 평등주의적이기 때문에 승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선을 긋듯 갈라지는 불평등한 배분에 대한 승복을 얻기 위해서 합리적이고 평등주의적이라고 말이다. 이어서 물어야 할 질문은 왜 우리 사회가 시험공화국이 되어야 할 정도로 선명한 승복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법 자명하다. 우선 시험이 야기하는 불평등한 배분이 매우 엄청나기 때문이다. 사법고시에 붙은 사람과 떨어진 사람의 차이를 생각해 보라. 두말할 나위 없이 양자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이렇게 절대적인 이유는 특권이 존재하는 곳마다 진입문턱이 만들어져 있는 게 우리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진입문턱이 역으로 그 특권을 진짜 특권으로 만든다.
승복이 필요한 다른 이유는 우리 사회 성원들이 잘 승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질투의 사회이다. 누구도 자신의 계급이나 성별에 따른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는 불평등이 심해서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우리 사회는 갑작스럽게 비워진 지배계급의 자리와 특권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개 약진했던 사회였으며,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대중에게는 모두 ‘졸부’ 같은 존재였다. 이들은 정당성이 없기에 질투를 유발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보편적 질투의 사회가 되었으며, 그래서 승복이 더욱 요구되었다. 이 승복의 가장 중요한 기제가 시험이다.
승복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는 승리자를 생산하는 과정인 동시에 패자가 자신을 패배자로 당연시하는 과정이다. 학교와 시험은 이런 패배의식을 ‘조기교육’하는 탁월한 장이다. 학교가 어떻게 패배를 훈련하고 당연시하게 만들었는가를 생각해보자. 대략 대학 정도를 마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험을 치는가? 과목별로 본 학기말 시험 이외에 월말 고사, 수시 고사, 모의 고사 등이 며칠 걸러 한번씩이다시피한 우리네 학교에서 사람들이 보게 되는 시험은 수천번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 수천번의 시험을 위해서 우리는 그보다 훨씬 많은 날 동안 초조하게 시험공부를 한다. 그리고 긴장 속에서 수천 시간에 걸쳐 시험을 치며, 그것으로부터 돌아오는 보상과 처벌의 가혹함을 수천번 겪는다. 선생과 부모(이들은 어린이에게는 세계 전체나 다름없다)의 상과 매질이 그것이다. 그러니 시험점수에 대해 우리가 아무 말을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시험 성적에 의해 사회적 위계보다 훨씬 세분된 등수를 통해서 자신의 자리를 수천번에 걸쳐 확인받는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받을 대접을 가늠하는 법을 몸으로 익히게 된다.
이렇게 시험이 승복의 체제로 구축되어감에 따라, 그것은 점차 지배계급조차 복종해야 하는 보편적 형벌이 된다. 그리하여 지배계급은 모든 힘을 다해 이 시험에 승리하고자 하게 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라. 지배층은 이 싸움에서 잃을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첫째, 그들은 절반쯤은 시험에 승리하도록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시험과 교과서의 언어에 익숙하며, 그렇게 양육되었으며, 이미 가족 생활을 통해서 제도의 언어와 문화를 학습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이 시험에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와 투자에 필요한 자본을 소유하고 있다. 셋째, 그들은 아주 여유가 있을 경우에는 국내에서의 이 지저분한 싸움을 아예 회피하고 외국 유학의 길을 택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배층의 개별 성원들에게는 이 시험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전체로서의 지배층은 그 정도의 훈육을 통해서 능력과 인정을 모두 얻을 수 있다.
지배층은 잃을 것이 없다 초조한 것은 중산층이고, 하층이 안타까울 뿐이다. 중산층이 초조한 것은 그들의 모자란 문화자본과 경제적 자본을 개인적 재능과 노력으로 메워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층이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이 백전백패의 싸움에 헛되이 달려들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겠다. 청소부의 아들이 서울대 입시에 수석을 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도 있다고. 철없는 이야기이다. 혹 전체 사회구조가 아직 틀을 못 갖춘 어리숙한 시절에는 그럴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이제 바늘귀처럼 가늘어졌다. 지금도 어느 구석방에 웅크려 시험공부를 하며 버틴 사람이 그런 일을 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살아난 사람일 뿐이다. 그런 사람에 대해 떠드는 것은 황색언론의 짓거리이거나 신화를 통해 시험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려는 수작일 뿐이다. 참되고 뻔한 것은 비행기가 떨어지면 거의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럼 시험을 없애자고?
이런 이야기에 그러면 시험을 없애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연전에 정치인 출신의 한 멍청한 교육부 장관이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면접을 중시하고 사회봉사를 중시하는 것이 어떻게 상황을 바꾸겠는가? 면접자는 이미 면접대상자의 생김새와 옷매무새와 말씨에서 문화적으로 친숙한(당연히 같은 계층의) 사람을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이미 선호하고 있고, 사회봉사 실적이란 인맥과 생떼로 받아오는 종이 위의 도장에 불과한데. 요컨대 그것은 시험을 없앤 것이 아니라 시험과목을 늘린 것이고, 이전에는 시험에 포함되지 않아 그나마 순결했던 것을 오염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특권의 진입문턱을 낮추어 특권 자체를 희석하려는 사회적 노력이며, 적어도 한번의 시험으로 단번에 사람을 불평등하게 만드는 제도의 철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회의 불평등 정도를 약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한 선결과제의 하나는 우리 사회의 힘없는 사람들이 시험에 의한 패배를 더이상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는 감성을 훈련해 나가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