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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3442
남태령 있었던 20대 여성, ‘불법시위’ 프레임에 “마! 그 따우로 공부했나” (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2024.12.31 13:44)
[인터뷰] 남태령 시위 참가자들, 보수언론 ‘불법’ 프레임 비판...“그런 보도로 이 판을 뒤집을 수 없다”
“불법 집회? 민주주의 국가에 불법 집회가 어디 있습니까? 마! 니 그 따구로밖에 공부 안 했나! 이태원 때 아무것도 안 한 주제에 여서 뭐 하자는 긴데? 차 빼!” 지난 22일 ‘남태령 대첩’에서 한 발언자가 경찰을 향해 내질러 SNS에서 화제를 모은 일갈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2·3 내란사태를 일으킨 지 4주가 지난 가운데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는 그 기세를 넓히고 있으며 ‘남태령 대첩’은 주요 국면이었다. 지난 21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농업4법 거부권 행사를 규탄하며 트랙터를 몰고 전국을 돈 농민들이 서울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 차벽에 가로막혔다. 그러나 2030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이 대거 가세했다. ‘무박 2일’ 대치 끝에 경찰이 차벽을 물리며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국민의힘과 보수언론은 ‘불법집회’ 프레임을 다시 꺼내들었다. 조선일보는 지난 23일 1면에 <부활하는 불법 시위>란 제목의 기사에서 “전국이 윤 대통령 탄핵 찬반 집회로 혼란한 가운데 민노총이 ‘반정부 투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며 “불법 시위가 잦아질 수 있다”고 했다. 다음날엔 <불법에는 법대로 대처하라>는 사설을 실었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과 권성동 원내대표는 남태령 시위를 ‘난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보도 파장은 미미해 보인다. 집회의 중심이 된 2030 여성들은 이들 보도가 집회 참가자들 사이 “안중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해당 보도를 두고 “말은 이 판을 뒤집을 힘이 없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경찰이 트랙터 행진을 제한 통고하고 막아세운 조치가 오히려 위법이라 짚는 한편 “불법집회란 말이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남태령에서 화제를 모은 발언자 2명에게 불법집회 프레임에 대한 의견과 ‘남태령 대첩’의 의미를 물었다.
신라대학교 학생인 최혜수 씨는 지난 21일 부산역에서 첫 차를 타고 출발해 서울 광화문 ‘윤석열 즉각 체포·퇴진! 사회대개혁! 범시민대행진’에 참여했다. 친구의 롱패딩을 빌려 입고 ‘아무 사람 아무 협회: 우리 여기 있다’라고 쓴 깃발도 손수 마련했다. 광화문 집회 뒤 남태령을 찾아 밤을 샜다. 4시간 넘게 줄을 서 3분 발언을 했다. 한 누리꾼이 “대학생 자유발언 기개 보라”며 트위터(X)에 공유한 50초짜리 현장 영상엔 1만5000건의 리트윗이 이어졌다.
최씨는 통화에서 “꼭 ‘불법집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줄 서서 발언을 기다리는데 경찰 차벽이 움직이며 겹겹으로 대형을 만들더니 경찰 트럭 전광판에 글씨를 내보이더라. ‘불법집회를 당장 중단하고 해산하라’는 내용이었다. 화가 치솟았다. 애초에 차를 빼면 되는데 우리가 불법집회라니 말이 안 되잖나. 발언하러 줄 선 친구들과 ‘(불법집회 주장 비판) 네가 할래, 내가 할까?’ 얘길 나눴다.”
최씨는 “집회는 (허가제 아닌) 신고제인데 미신고 집회는 있을지언정 불법집회는 말이 되지 않는 얘기”라고도 꼬집었다. 경찰의 이번 집회 제한 통고와 차벽 통제가 위법한 공권력 남용이라는 지적이 일찍이 나왔던 터다. 유엔인권이사회는 한국에서 집회·시위가 신고제임에도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된다며 1992년부터 개선을 주문해왔다.
그는 ‘불법 시위’를 주장한 조선일보 보도에 지인들이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애초에 SNS 타임라인에 그런 기사가 올라오지 않아 안중에 없다”며 “SNS를 통해 집회 뉴스를 접하는 이들 중엔 그 기사에 동의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실 내 주변 20대 청년 거의 모두가 SNS로 뉴스를 접한다”고 했다. 최씨는 해당 보도에도 “그 따우로밖에 못 배웠나”라고 묻고 싶다고 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부끄러워 붓을 놓은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지, 당신들이 추구하는 언론은 무엇이기에 그런 글을 쓰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22일 새벽 인천에서 출발하는 지하철 첫차를 타고 남태령을 찾은 A씨의 발언도 SNS에서 화제를 모았다. 20세인 그는 발언에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이라며 16세 되던 해 중국 정부가 그의 신분을 말소시켜 한국 국적만 남았다고 했다. 그는 “1980년대 천안문에서 국가를 향해 저항한 친척들이 있었다. 지금 이 땅에 저는 매국노를 쫓아내고자 여기 있다”며 “한국에 살며 존재를 부정당하는 모든 이가 당당하게 살아가는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했다.
A씨는 불법집회를 언급하는 보도를 두고 “말의 한계”란 말로 일축했다. “아무리 불법집회라 해도 SNS에만 들어가면 사람들이 ‘이게 어떻게 불법집회냐’고 한다. 남부에서 시작해 서울 오는 길 내내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그 추운 남태령에서 경찰버스로 가로막는 건 불법과 폭력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더 많다. 그런 보도로 이 판을 뒤집을 수 없다. 말이 줄 수 있는 타격의 한계, 글의 한계를 이번에 느꼈다.”
A씨는 “만약 현장에 있었다면 그런 보도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모든 사람이 상대방의 건강을 걱정하고, 지치지 않도록 따뜻한 음식을 계속해서 쥐여줬다. 좀 조는 것 같다 싶으면 서로 깨워주고 살폈다. 소리를 지르고,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경험 자체를 쉽게 이길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최씨도 “만약 현장에 있었다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봤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저희가 발언으로, SNS로 계속 이야기를 전달했으니 모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최씨는 남태령 시위를 다룬 언론이 담지 못한 부분도 짚었다. 경찰이 앞뒤로 올린 차벽 안에서 느낀 물리적 공포다. 그는 “얼어 죽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서웠다”며 “일부러 축제 분위기처럼 긍정적으로 행동했지만, 사실 모두가 속으로는 걱정했던 것 같다”고 했다. 밤사이 그는 시민들이 지원한 난방버스 출입을 경찰이 막아선 탓에 행진단 주최측 버스에서 몸을 녹였다며 “버스에 잠깐 들어가자마자 오히려 잠이 깨더라. ‘이거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날 남태령에 있던 시민 몇몇이 저체온증 증상을 보였다고 했다.
A씨는 발언 직후 보수 언론의 혐오 공격에 시달렸다. 파이낸스투데이 등은 “(남태령 시위가) 중국인까지 등장한 가운데 불법집회로 변질됐다”고 주장했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엔 그가 ‘제주도에서 온 중국인’이라는 헛소문이 퍼졌다. 그는 “중국이 제 신분을 말소시켰다고 한 부분을 빼고 짜깁기한 발언 영상이 돌더라. 살면서 제주도는 딱 한 번 가봤다”고 했다. 그는 “‘너 간첩이지, 너 중국인이지’라면서 CIA를 언급하는 댓글들을 보고 조금은 무서웠다. 내란행위를 옹호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들이 이런 댓글을 달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A씨는 “발언하고서 나와 같은 분들을 알게 돼 SNS 친구가 됐다. 사회생활을 하며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발언할 때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그런 고민을 지우고 소신대로 발언했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확신이 충족감을 줬다. 광장은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했다.
최씨는 정권 퇴진 요구를 넘어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의 싸움에 연대하고 있다. 그는 “처음엔 가만히 있으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것 같아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외면하고 무임승차하기엔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서 계속 나갔다”고 했다. 이어 “서울에서 벌어지는 장애인 이동권 집회도 부산에 있으면서 조금 남의 이야기처럼 봤던 것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매주 금요일 서울에 도착해 일요일 아침에 돌아오는 생활을 하며 이달만 교통·숙박비가 200만 원 나왔다. 하지만 최씨는 월급과 장학금을 써 집회를 계속 찾을 생각이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75688.html
[아침햇발] 남태령에서 온 무지개떡과 더 많은 민주주의 (한겨레, 안선희 | 논설위원, 2024-12-31 15:54)
“‘우리’의 힘으로 함께 만든 ‘남태령 대첩’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전봉준투쟁단”
일일이 감사 인사 스티커를 붙인 손바닥만한 무지개떡은 따뜻하고 폭신했다. 지난 21~22일 트랙터 행진 중 경찰에 가로막힌 농민들을 도우려 시민들이 서울 남태령으로 달려가 결국 경찰의 차벽을 열게 만들었던 이른바 ‘남태령 대첩’에 보답하기 위해 농민들이 준비해온 떡이었다.
아껴 먹을 심산으로 가방에 떡을 넣고 줄지어 서 있는 부스들을 따라 걸었다. ‘윤석열을 파면하라’ ‘내란주범 윤석열 퇴진 내란세력 청산’ ‘퇴진 받고 공공성 더’ 같은 손팻말을 나눠 주는 부스들, 따뜻한 차와 어묵, 컵라면, 귤 같은 먹거리를 권하는 부스들, 핫팩과 돗자리를 무료나눔하는 부스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노란 리본을,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보라색 리본을 건넸다. ‘고양이 발바닥 연구회’ ‘윤석열 파면으로 환율 좀 내려보자’ ‘새해에는 새 나라로’ ‘워라밸 비상대책위원회’ ‘MZ는 민주다’…. 이제는 집회의 상징이 된, 시민들이 직접 만든 각양각색 깃발들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난 28일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4차 범시민대행진’ 집회가 열릴 예정인 광화문 근처의 풍경은 찬 바람 속에서도 온기와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자연스럽게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집회 당시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랬다. 제도권 정치에 대한 절망이 직접민주주의의 열기로 폭발했었다. 정치는 너무 중요해서 정치인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는 결기가 시민들을 함께 모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비록 대통령은 끌어내렸지만, 당시 분출했던 ‘새로운 체제’를 향한 열망이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여전히 불평등과 차별, 혐오와 배제에 짓눌리는 이들이 존재한다. 노동자, 농민, 장애인, 여성, 이주민, 성소수자 등은 아직 제 몫의 권리를 고스란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은 우리 사회의 불안정을 상징한다. 정치의 실패는 윤석열 같은 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철 지난 신자유주의가 되살아났고, 복지국가는 지체됐다.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요즘 강남 부자들 사이에서는 ‘진보 정부가 들어서면 집값이 또 오를 테니 부동산을 사야 한다’는 말이 떠돈다고 한다. 어처구니없지만 뼈아프다.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 단지 ‘윤석열만 없는 정치’를 위해 수십만명의 시민이 이 혹한에 거리로 나서는 것이 아니다. 집회마다 ‘다른 세상’을 염원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이날도 학교 밖 청소년,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등의 발언이 집회를 이끌었다. “성소수자이자 오타쿠이자 간호사”로 자신을 소개한 김수경 간호사는 “이 모든 수식어를 한번에 말할 수 있는 곳이 있음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가 어디서나 자유롭게 이 모든 수식어를 말할 수 있기 전에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11일 부산 집회에서 쿠팡 노동자, 성매매 여성, 동덕여대 학생, 장애인, 이주민 아동 등의 고통을 열거하며, 한 여성이 말한 것처럼 “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완벽하지 못한 것”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8년 전보다 강해졌다.
‘연대’의 힘도 두드러진다. 남태령 대첩에 이어 지난 24일에는 서울 지하철 안국역 승강장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다이인(죽은 듯 누워 있는 시위 방식) 행동에 시민 300여명이 동참했다. 농민단체, 노동자단체, 사회단체 계좌에는 후원금이 쇄도하고 있다. 노동자 전문 병원을 추진하고 있는 전태일의료센터건립위원회에는 지난 22일부터 25일까지 나흘 동안 10억원이 넘는 후원금이 들어왔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구미공장 옥상에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1년 가까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박정혜·소현숙 두 여성 노동자에게는 성탄절에 전국 각지에서 생수 수천통이 배달됐다. 옥상에서 지내는 두 노동자에게 꼭 필요한 물이었다. 광화문에서 남태령으로, 남태령에서 안국역으로, 안국역에서 구미로, 그렇게 연대는 이어지고 있다. 마치 여러색이 어울려 하나가 된 무지개떡처럼.
집회를 마친 뒤 시민들은 헌법재판소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족히 수천개가 넘는 깃발이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어울려 저녁 하늘에 나부꼈다. 저 깃발만큼의, 저 응원봉만큼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더 많은 민주주의가. 우리 각자의, 우리 모두의 정치가.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27936
평범한 이들의 거대한 연대, 더 나은 세상의 시작 (경남도민일보, 이승환 박신 기자, 2025.01.01 18:21)
선동 없어도 스스로 뭉치는 시민, 내란부터 남태령 넘어 조선소로
승리 경험을 자산으로 삼은 약자들 이미 새로운 사회 만들고 있어
공존이 생존, 다시 연대 그리고 전환. 지난 3년 경남도민일보가 내세운 의제입니다. 해마다 내세운 가치가 실현되는 현장을 찾고 사람을 만났습니다. 지난한 시도는 지난해 불법 계엄 앞에서 한순간 좌절합니다. 12.3 내란은 주권자를 겁박하고 모욕했습니다. 하지만, 이 도발에 맞서는 주권자는 광장에서 연대하고 공존하며 극적인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의제 안에서 막연하던 가치가 현실에서 구현됐습니다. 가늠할 수 없는 동력은 남태령에서 폭발합니다.
전주환(55·진주 금곡면) 씨는 2024년 12월 21일 낮 12시 서울과 경기 경계인 남태령에서 고립된 상황을 받아들였다. 트랙터를 몰고 진주에서 출발한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밀려드는 추위와 공포를 자유발언으로 버텼다. 경찰차벽과 경찰에게 갇힌 농민은 100여 명이었다. 익숙한 좌절을 떠올리던 전 씨 앞에 오후 4시를 넘어 낯선 시민이 다가왔다.
◇선동 없는 연대 = "조금씩 나타나던 사람들이 오후 6~7시를 지나면서 확실히 늘었습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전 씨는 먼저 와 줘서 고맙다고 거듭 외쳤다. 추위에 농민들이 고립되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어서 왔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 씨는 순간 울컥했다.
정영현 금속노조 경남지부 법규국장은 지난해 12월 3일 밤 국회 근처에서 밥을 먹다가 비상계엄 소식을 접했다.
"비상계엄을 해제하려면 우리가 국회로 가야 되겠구나 싶었지요. 가면서도 사람이 얼마나 모였을까 걱정했습니다."
도착하니 이미 많은 시민이 한목소리로 '계엄 해제'를 외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쌓였던 두려움을 구호와 함께 떨쳐냈다.
정 국장에게 연대는 선동과 정교한 조직이 짜낸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계엄이 해제된 새벽까지 연대는 어떤 과정이 낳은 결과물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 그 자체였다.
지난해 12월 14일 창원광장에서 탄핵소추안 국회 가결 소식을 기다린 안윤서(14) 학생을 연대로 이끈 주체도 자신이다. "탄핵안이 부결되는 것을 보고 결심했어요. 친구들에게도 같이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일주일 뒤인 21일 같은 장소에서 구호를 외친 정가람(25) 씨. 중국 유학 중인 그를 누구도 어수선한 국내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중국에서 비상계엄 소식을 들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너무 무력했어요. 외국에서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승리를 경험하는 약자들 = 스스로 결정해서 연대한 시민은 자기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다. 전주환 씨는 남태령 밤샘 집회 내내 끊이지 않던 자유발언을 기억했다. 이어지는 이야기 속 그들은 또 다른 약자였다.
"성소수자, 청년, 여성, 노동자, 장애인 등이 나와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무도 야유하지 않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소외와 외면에 익숙했던 시민은 농민 처지를 알지 못해 사과했고 자신이 겪은 설움을 토해냈다. 조롱과 패배에 익숙했지만 '가만히 있는 게 최악'이라는 것을 경험한 세대는 연대를 기다리지 않았다. 길을 튼 시민이 거듭 외친 구호는 '이겼다'였다.
국회 앞에서 정영현 국장은 능동적인 시민을 재발견했다. "시민은 선동되기 좋은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그날 제가 본 시민은 반대였습니다.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존중받고 박수받았습니다."
◇편견·세대 넘어선 공감 = 케이팝과 민중가요, 성인·대중가요가 섞여 '탄핵 플레이리스트'가 된다. 광장에서 집회를 축제로 만든 매개다. 탄핵 선곡표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넘어서고 세대를 아우르는 현상이 됐다. 각자 결집을 과시하던 응원봉은 어두운 권력을 몰아내는 빛으로 뭉쳤다. 거침없는 연대는 거제 한화오션으로 이어졌다.
고태은(31) 씨는 민주 노조를 깨우는 소리 호각 활동가다. 그는 전국금속노동조합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농성 소식을 누리소통망에 공유했다. "처음 투쟁 기금을 요청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불붙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남태령 밤이 지나면서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모금 전달과 응원을 넘어 왜 투쟁하는지, 왜 단식하는지까지 공유됐습니다."
창원광장에서 정가람 씨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소수자에게로 번지는 현상에 주목했다. 같은 곳에서 안윤서 학생도 말과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공감과 연대를 경험했다.
◇다시 만들 세계 = 광장을 채운 열망은 다채롭고 낯설면서도 단순하고 익숙하다. 거대한 연대가 일상에서도 작동하는 세상, 더 나은 전환을 언제든지 합의할 줄 아는 세상, 그래서 공존하는 세상, 더는 부조리 앞에서 비겁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타인에게 귀 기울이고 자기 얘기를 할 줄 아는 시민은 이미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있다. 기꺼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7932713
트랙터 행진 막히자…남태령 간 10명 중 3명 '2030 여성' (SBS뉴스, 전형우 기자, 2025.01.01 21:11)
<앵커>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 구속 등을 외치며 트랙터 행진을 하던 농민들이 경찰과 서울 남태령에서 대치하는 일이 있었죠. 이때 시민들이 대거 가세하며 결국 경찰이 물러났었는데, 참여자 10명 가운데 3명이 2030 젊은 여성이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뭔지 정형우 기자가 살펴봤습니다.
<기자> 지난 22일 새벽, 농민들의 트랙터 행진이 남태령에서 제동이 걸렸습니다. 경찰이 시위대의 서울 진입을 막아서면서 대치 상황이 28시간 동안 이어진 것입니다. 영하 7도의 추운 날씨임에도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시민들이 하나둘 모였고, 결국 경찰은 길을 터줬습니다.
[차 빼라! 차 빼라!]
SBS가 서울시 생활인구데이터를 토대로 당시 현장에 모인 사람들을 분석해 봤습니다. 이날 새벽 남태령에 모인 사람들은 5천 명에 달했는데 날이 밝으면서 점점 늘어나 경찰의 차벽 철수 직전인 오후 3시쯤에는 1만 1천 명까지 증가했습니다. 연령과 성별을 구분해 봤더니 불쑥 솟아오른 그래프가 유독 눈에 띕니다. 20대와 30대 여성들입니다. 20대 여성이 22%, 30대 여성이 13%로 3분의 1이 넘는 인원이 2030 여성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60대 이상의 농민 위주 트랙터 시위에 2~30대 여성들이 왜 적극 나섰던 걸까. 우선 현 정부 여당에 대해 비판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 이유로 꼽힙니다. 2~30대 여성들의 이러한 성향은 지난 대선과 총선 투표 결과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응원봉이 등장하고 K팝을 함께 부르는 새로운 시위 문화도 2030 여성의 참여를 이끈 요인 중 하나입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한 응집력이 다른 세대보다 높은 점도 작용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오려원/남태령 시위 참가자 : 관련된 인터넷 글을 봤는데 이쪽에서도 시위를 많이 하고 계신다고 들어서, 화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들었어요.]
이번 남태령 트랙터 시위가 사회적 약자 문제에 관심이 커진 2030 여성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여래/남태령 시위 참가자 : 농민분들 사정에 너무 무지했다는 걸 알아서, 너무 부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막차 타고 왔거든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0110270005697?type=AB7
[젠더살롱] 2030 여성, '선물하는 연대'로 광장의 정치를 재발명하다 (한국일보, 서한영교 작가, 2025.01.04 04:30)
<190> 선결제 문화와 남태령 행렬을 만든 이들
"그 보라색 민주주의자" - 에밀리 디킨슨 '보라색 클로버' 중
공동체라고 흔히 번역하는 코뮨(commune)의 어원은 선물(munis)을 나눈다(com)는 뜻을 갖고 있다.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준다는 시장주의적 상품 교환과 다르게 아무런 조건 없이 전해지는 게 선물이다. 선물을 나누며 함께(com) 살아가는 힘을 길러가는 선물의 공동체를 우리는 광장에서 체험하고 있다.
광장의 선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표결이 있던 날 서강대교를 건넜다. 국회 앞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발 뒤꿈치가 자꾸 밟혔다. 만나기로 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더디기만 했다. 가는 길에 어린이 반려자는 손에 보라색 풍선을 한 움큼 들고 있는 노동조합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눈길을 느낀 노동조합원은 손에 들고 있던 보라색 풍선을 어린이 반려자에게 쥐어주며 "함께 민주주의를 만들어 봐요, 어린이 동지"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광장의 정치는 어린이들에게도 민주주의의 동지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풍선을 손에 쥔 아이는 보라색으로 빵빵한 기쁨에 가득 찼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추위에 민주주의를 뺏길 수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외치며 약사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핫팩을 나눠줬다. 주머니에 하나씩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두둑히 챙겨줬다. 또 가다 보니 인형 탈을 쓴 사람들이 "달달한 민주주의 충전하세요"라며 초코바와 사탕, 쿠키가 담긴 간식 꾸러미를 나눠줬다. 동료들이 모인 곳까지 가는 동안 양손이 풍선, 핫팩, 간식, 브로치, 스티커들로 가득 넘쳐났다. 온갖 선물이 넘쳐 흐르는 광장을 지나며 쪼그라들었던 인류애가 다시금 두근두근 팽창했다.
선물의 광장
가는 길에 "탄핵 커피 드시고 가세요"라고 적힌 커피차에서 커피도 한 잔 받아 마시며 선결제 장소들이 업데이트된다는 '시위도 밥먹고'라는 웹사이트에 접속해봤다. 현장 주변 카페, 약국, 식당들이 빼곡했다. 해외에 사는 교민들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며 커피를 500잔 넘게 선결제해 두었단다. 커피가 가진 온기가 너무 뜨거워 입을 데일 뻔했다.
평상시였다면 5분이면 닿을 곳에 40분 넘게 걸려 드디어 도착했다. 동료들은 따뜻하게 우려낸 팔레스타인 홍차와 비건 간식을 꺼내줬다. 선물은 끝이 없었다. 한 동료에게 우리가 받은 온갖 선물들을 자랑했다. 그러자 휴대폰을 열어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이거 봐. 좀 전에 화장실에서 찍은 사진이거든. 생리대, 휴대용 휴지, 핫팩, 생수, 상비약, 초코바들이 가득 쌓여 있었어. 놀랍지 않냐?" 광장은 거대한 선물의 공동체였다. 언론에서는 그저 훈훈한 이야기로 한 꼭지 소개될 뿐이었지만, 선물의 공동체는 광장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밑불이었다.
빛의 바다
선물의 공동체는 국회·광화문 앞을 넘어 남태령까지 흘러넘쳤다. 전남 무안과 경남 진주에서 트랙터를 몰고 대통령 관저로 출발한 '전봉준 투쟁단'이 엿새 만에 도착한 남태령에서 경찰차벽에 막혀 대치 중이었다. 트랙터 창문을 깨고 강제진압에 나선 경찰의 폭력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급속히 퍼지면서 응원봉을 든 행렬이 선물처럼 남태령으로 이어졌다. "난동 세력에게 몽둥이가 답"(윤상현)이라는 엄포에 맞서, 내란 세력에게는 응원봉이 답이었다.
"그들은 대개 젊거나 어린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모르는 노래가 없었고 지칠 줄 몰랐다". 품에서 꺼내 든 "응원봉이 바다를 이루었다. 바다 빛은 서로 다르면서 하나였다. 네모, 동그라미, 세모였고, 파란빛, 빨간빛, 노란빛"(전봉준투쟁단)이었다. 빛의 바다 속으로 피자, 떡볶이, 김밥이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전해졌다. 담요, 보조배터리, 상비약, 응원봉 건전지, 난방버스도 줄줄이 도착했다. 첩첩산중 남태령 언덕을 넘어 선물들이 흘러넘쳤다.
언덕을 넘어
'남태령 대첩' 이후로 선물의 연대는 넘쳐흘렀다. 노동자 전문 병원을 짓기 위한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추진위원회로 모금이 쏟아졌고, 740일 넘게 지하철 선전전을 이어오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향한 연대 투쟁이 이뤄졌다. 사측으로부터 470억 원 넘는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을 향한 파업 기금도 쏟아졌다. 또 352일째 고공농성 중인 옵티컬하이테크지회 여성 해고 노동자를 향한 생수 연대, 여성농민생산자협동조합 '언니네 텃밭' 회원 가입으로 연대의 행렬이 흘렀다. 이밖에도 셀 수 없는 선물의 연대가 쏟아졌다.
서로 선물을 나누고 응원하며, 2030 여성들은 '우리'라는 공동의 삶을 생산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추상적인 개념의 구체적 예시들을 알록달록하게 증명하고 있다. 2030 여성들은 우리에게 응원봉이라는 불빛과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선물했고, 누구나 안전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광장 속 민주주의를 선물했다.
우리를 넘어
"나라는 2030 여성을 버렸지만 2030 여성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남태령 자유발언자)
지난 10년간 2030 여성들은 선명한 폭력의 예감을 축적해왔다. 여성혐오 살인, 스토킹 범죄, 불법촬영물, N번방, 딥페이크를 겪었지만 국가는 제대로 된 대책 하나 내놓지 않았다. 버림 받았고 내팽개쳐졌다는 감각, 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예감으로 첨예하게 몸과 마음을 훈련할 수밖에 없었던 2030 여성들은 국가의 폭력에 가장 기민하게 응답했다.
이들은 지속적인 폭력을 끝까지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부르고자 하는 국가 권력에 맞서 여성혐오 살인으로 고쳐 불렀다. 끈질긴 남성의 로맨스로만 치부하던 경찰 권력에 맞서 스토킹 범죄로 다시 썼다. 화장실 '몰카' 정도로만 여기던 시선 권력에 맞서 불법 촬영물로 불렀고, N번방 '음란물 사태'로 말을 더럽히던 남초 권력에 맞서 디지털 성착취물로 바꿔 불렀다. 2030 여성들은 온라인과 강남역-혜화역-사당역을 거치며 가부장적 문법에 맞서 정치적 주체로서 단련했다. 그러면서 가방 안에 있는 먹거리와 생리대와 핸드크림을 나누고, 그와 함께 안부를 나누고, 일상 속 폭력의 예감을 나누며 공통의 감각을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쌓아온 힘으로 국회의사당역-광화문역-남태령역을 휩쓸며 '우리'라는 문법 자체를 바꾸고 있다.
재발명되는 우리
우리는 전에 본 적 없는 '우리'라는 사건을 겪고 있다. 광장의 민주주의는 언제나 다수의 민주주의였다.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노인, 도시빈민, 이주민 등은 그동안 '나중에'라며 늘 밀려났다. 함께하고 싶지 않은 비정상-비규범-비시민은 '우리'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2030 여성들은 우리에 포함되지 않던 무리들과 정의로운 관계를 맺어나가는 새로운 '우리'를 재발명해내고 있다.
이들은 동일한 '우리'라는 보편의 언덕을 넘어 서로 다른 관계의 광장을 재발명하고 있다. 다양성을 무책임하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경청하며 응답해나가는 '관계의 정치'를 재발명하고 있다. 2030 여성들은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현재"(리베카 솔닛)를 이끌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이 재발명한 '우리'를 선물받는 중이다.
무지개떡과 투쟁
"우리 농민들만 있었으면 다 연행되거나 더 무자비한 탄압이 있었을 것인데, 20대 여성 분들이 지켜줘서 정말 아주 감동이었습니다." (전봉준투쟁단)
무지개 불빛을 선물받은 전봉준투쟁단은 1만 개의 무지개떡을 준비해 광장의 모든 사람에게 다시 선물했다. 무지개떡은 광장의 간식으로 딱이었다. 무지개떡에는 "'우리'의 힘으로 함께 만든 '남태령 대첩'.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라는 스티커 편지가 붙었다. 농민들은 '우리'라는 추상적 공동체를 표상하는 구체적 예시로 '무지개'를 딱 찍어 택했다.
조건 없이 서로에게 건네는 선물의 자리에서 몸과 마음들이 투쟁 속에서 반짝인다. 존재 자체가 선물이라는 것을 광장의 2030 여성들에게서 배운다. 이젠 투쟁이라는 말이 반짝거리고 있다. 이 세계를 열렬히 사랑하는 방법으로서의 투쟁!
"무리 가운데 ? 가장 용감한 자" - 에밀리 디킨슨 '보라색 클로버' 중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6522
“더 이상 외로운 투쟁을 하지 않겠구나”… 남태령 너머 ‘우리’가 만들 세계 (여성신문, 정영은 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 대표, 2025.01.04 06:00)
[기고] 남태령에서 만난 승리,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언니, 우리 남태령 가봐야 하는 거 아닐까?”
새벽 1시 반. 마음 졸이며 라이브를 보던 후배에게 받은 메신저 연락이었다. 집회 마치고 미뤄뒀던 서페대연(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 송년회를 하고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시간이었다. 잠시 고민한 뒤, “일단 우리 자고 체력 보충해서 가자”는 말을 보냈다.
12월 21일 밤은 유독 피곤했다. 서울 명동서 행진을 마쳤을 때부터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잘 잠기지 않던 목이 오랜만에 잠길 정도였다. 두통에 오한에 감기가 오는 건가 싶었다. 이미 가 있다는 사람, 라이브로 보고 있다는 사람. ‘오늘 날도 춥고 행진도 길었는데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 다들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라는 잠깐의 생각과 함께 그대로 기절한 듯 잠이 들고 말았다.
두통과 함께 느지막이 눈을 떠보니 단체방 메신저는 이미 이른 아침부터 난리가 나 있었다.
‘다들 어떤가요? 저 완전 쌩쌩해요. 남태령 가야 할 것 같아서 가보려고요.’
‘**이도 온대요. 저도 출발합니다.’
‘저랑 **이는 이제 곧 도착해요.’
“미안합니다. 저도 이제 일어났어요. 금방 준비해서 갈게요.”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일단 글을 남겼다. 미안했다. 다들 밤새 걱정으로 잠 못 자곤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서고 있는데… 필요한 물품이 무언지 확인했더니 ‘윤석열OUT 성차별OUT 페미니스트들(이하 윤OUT페미들)’에서 만든 페미니스트 피켓이 필요하다 했다. 이 공간에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감기약을 입에 털어 넣고 피켓과 몇 가지 방한용품을 챙겨 부랴부랴 남태령으로 향했다.
“그날 밤 국회 앞으로 가지 못한 죄책감에 왔어요”
2시 집회에 맞춰가려고 급하게 출발했지만 시작 시간은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았다. 사당역에 도착하니, 4호선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다 남태령에 가는 것만 같았다. 지나가던 한무리의 중학생들이 ‘다 시위 가나봐!’ 라고 큰 소리로 떠들었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구나 했다. 조바심을 가득 안고 남태령에서 내리는데 벌써 마음이 벌렁거렸다. 나와 같은 칸을 타고 온 여성 두 분은 역에서 나가기 전 옷차림을 정비하고 이동하는 듯 보였다.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이동하는데 긴 줄이 있었다. 출근길도 환승역도 아닌데 길게 늘어선 줄이 낯설었다. 한무리는 계단으로 또 다른 무리는 멈춰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걸어 올라갔다. 안전 문제로 멈춘 것 같았지만, 지하 3층에서부터 걸어 올라가는 길이 쉽지 않았는데 누구도 다른 이야기 없이 천천히 기다리며 지상으로 올라갔다.
자원봉사자들의 안내에 따라 올라간 지상은 놀라움 자체였다. 비상계엄 이후 여의도에서도 광화문에서도 집회 시작 시간보다 1~2시간씩은 일찍 현장에 도착해 깃발을 세우고 자리 이동을 최소화하고 있었던 나는 생각해 보니 전체 모습을 볼 일이 적었다는 생각을 했다. 남태령역에 올라서자 도로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마주했고, 동시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감동도 잠시, “핫팩 있어요!” “담요 가져가세요!” “커피와 음료수 있어요!”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에 얼떨떨해하며 자원봉사자들이 쥐여준 담요, 커피, 물을 손에 쥐고 대열 앞으로 이동했다. ‘윤OUT페미들 깃발’ 아래에는 다양한 작은 깃발을 든 페미니스트들이 이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페미니스트 깃발이 이렇게 크게 있다니 너무 좋아서요. 계속 오고 싶었는데 오늘 드디어 왔어요.” 앞과 옆에 계신 분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를 잡았다.
“그날 밤 국회 앞으로 가지 못한 죄책감에 어제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죄책감. 4일 새벽 국회로 뛰어갔던 나는 22일 새벽에는 남태령에 있지 않았기에 그 새벽을 지켜준 사람들에게 빚진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4일의 우리에게 빚졌다고 했다.
광장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은 나와 우리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뛰쳐나온 주인이었다. 누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해야지만 민주주의가 지켜진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이자 민주주의의 주인이었다. 함께 행동함으로써 사회의 주인으로 존재하고자 했기에, 행동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라앉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죄책감이 아니라, 더 큰 행동으로 함께 하게 하는 뜨거운 결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빚진 마음과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앞으로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한 명 한 명의 불길만이 남았다.
한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 손 내밀 때, 그것은 연대가 됐다
농민들의 노고에 대한 이야기, 전봉준 투쟁단에 대한 감사함도 쏟아졌다. 요즘 청년들이 농민들의 삶에 대해서 잘 알겠어? 보수적인 농촌지역의 분들이 소수자들의 삶에 대해 얼마나 알겠어? 라는 일상에서 흔히 쏟아지던 서로를 규정하던 목소리는 남태령에서는 하나도 적용되지 않았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공감하며 연대하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던 우리 사회 혐오와 차별을 무너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누구보다 연대를 바랐을 두 집단이 만나 연대를 이뤄냈다. 지난날의 한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과 만나 연대가 됐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에 분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유지해온 성차별도 함께 부숴야 한다. 그 마음은 나를 매일 같이 광장에 있게 했다. 딥페이크 투쟁 세 달을 마치고 다시 거리에 서게 된 것은 정말 이 말도 안 되는 민주주의 훼손을 막기 위함도 있지만, 탄핵 이후 다음 세상에는 성차별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는 마음이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윤OUT페미들’에 함께 하는 100개 단체, 1560명도 다 같은 마음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며 내내 외쳤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부정하고, 여성폭력을 해결하겠다며 무고죄 강화를 이야기하는 그들, 페미니스트를 악마화하며 이기적인 존재로 치부해온 그들의 말을 잘못됐다고,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계속 말해왔다. 우리는 언제나 광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 외침이 전해지지 않거나, 다르게 왜곡될 때마다 괴로웠다. 외로운 시간이었다.
비상계엄 이후 펼쳐진 탄핵광장은 우리가 이제껏 해왔던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혐오로 흥한 자, 연대로 망하게 하자’고 외치면서도 불안했다. 지금의 이 이야기가 광장에서 멈추면 어떻게 하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신상이 털리고, 일터에서 해고되고,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공격받았던 우리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개인정보가 박제되고 잊을만하면 다시 글이 올라와 화나고 심심하면 욕해도 되는 불링의 대상이 돼왔던 우리였다. 친밀한 관계로부터 여전히 위협당하고, 공학전환을 반대하는 학교에 대한 공격과 혐오가 우리가 주목받는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지난 3년간의 폭력이 다시 거세게 시작되면?
그러다 우리만큼 외로웠을 이들을 만났다. 농업은 끝났다고 경쟁력이 없다는 이야기로 외면당한지 오래였다. 나이 든 어르신들만이 지키고 있는 농촌을 살리겠다 애쓰며 식량주권, 먹거리 안전을 외치며 묵묵히 땅을 지켜온 농민들은 외로웠을 것이다. 외로움.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페미니스트들은 당장 남태령으로 달려갔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은 사실은 스스로에게 가장 필요했던 연대를 만들어내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나섰다. 누가 ‘연대는 그런 거야’하고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것이 전체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그리고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남태령에서 우리는 알았다. 우리 이제 더 이상 외로운 투쟁을 하지 않겠구나.
남태령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대열에 앉아 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고, 남태령을 가로막은 경찰을 욕하고, 이 추위에 나오게 한 윤석열을 욕하며 함께 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가 되었고 외롭지 말자 했고, 모두가 이 사회를 어떻게든 바꾸겠노라 결심하게 됐다. 그러는 사이 더 많은 회원들이 약속을 조정하고 대열에 합류했다.
우리가 이긴다! 페미가 세상을 바꾼다!
“드디어 열렸습니다!” 열렸다는 말, 사당으로 행진해 갈 거라는 말을 들은 지 수차례. 앉아서도 서서도 차 빼라는 구호 외치기를 여러 차례. X에서도 회자됐던 페미니스트다운 기개로 깃발을 힘차게 펄럭이며 구호 외치기도 수차례. 우리는 이긴다는 구호를 외치며 서로를 격려하기도 수차례. 월요일 출근을 염두에 두고 경찰이 오늘 밤까지 버티는 전략을 쓰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슬금슬금 들던 찰나였다.
이겼다. 결국 우리가 이겼다. 모두는 환호했다.
전봉준 투쟁단과 함께 시작된 행진에서 우리 페미니스트들은 그 어느 때보다 해방감을 느꼈다. 보랏빛, 무지갯빛 깃발이 한데 어우러져 언덕 아래로 달려나가는 모습은 장관이었고 우리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행진에 함께 했다. 우리가 만든 연대였다. 우리가 얻어낸 승리였다. 집회로 인한 소란은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리라 예상되는 방배동 주민들은 남태령을 넘어 행진해오는 우리를 신기한 듯 내려다봤고, 우리는 그들을 향해 더 크게 윤석열 퇴진과 탄핵, 체포를 외쳤다.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깃발춤을 추며 우리가 만들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가 용산 관저까지 이동하는 동안 다른 집회 참여자들도 대중교통으로 한강진으로 이동하자는 주최 측의 안내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지하철로 이동했고, 도착한 한강진역은 제2의 남태령이 펼쳐졌다. 우리는 페미니스트 깃발을 당당히 펄럭이며 대열 뒤쪽으로 행진해 갔다. 앞도 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대열 속 무대도 보이지 않지만, 여성농민의 발언에 참가자들의 발언에 우리는 다시금 행복해졌다.
전체 일정을 마치고 해산이 제안됐지만 우리는 쉽사리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승리했고, 승리했다. 때마침 광장에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누구라고 이야기할 새도 없이 깃발을 세차게 흔들며 우리의 승리를 기뻐했다. 록 페스티벌의 슬램처럼 네 다섯 곡 연속으로 깃발을 흔들고 흔들며 춤을 췄다. 페미니스트들이 주변을 감싸고 축제 분위기가 됐다.
“페미가 세상을 바꾼다! / 페미가 세상을 바꾼다!”는 구호와 함께 ‘와~’ 하는 함성으로 그날 처음 만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얼싸안으며 승리의 축제를 마쳤다.
누군가는 남태령에서 새로운 연대를 봤다고 했다. 남태령 대첩이라고도 했다. 맞다. 나는 남태령에서 승리를 봤다. ‘결코 질 수 없다’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연대의 힘, 가까운 미래 우리에게 펼쳐질 승리를 봤다. 더 이상 외롭지 말고 서로를 붙들어주자 말하는 곳에서 승리를 봤다.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은 곧 다가오겠구나, 정말로 민(民)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세상이 곧 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세상과 지금 현재 우리의 간극을 채울 것들은 여전히 많다. 그러나 남태령으로 각성한 우리는 우리 앞의 각종 걸림돌을 태우는 불길이 될 것이다. 불은 이미 거세게 옮겨붙었다.
https://www.ildaro.com/10085
‘남태령 대첩’ 이후, 여성과 소수자가 열어갈 세상 (일다, 박주연 | 2025/01/04 [13:11])
마포녹색당 x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시국집담회 〈광화문에서 남태령까지〉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 시민들의 힘으로 6시간만에 계엄이 해제되었고, 국회가 두 번의 탄핵소추안을 발의해 14일 가결됐다. 계엄?탄핵 정국을 맞이하여 전국 곳곳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였으며, 민주주의를 지키고 진전시키기 위해 목소리 내고 있다.
12월 21일과 22일에는 ‘남태령 대첩’이라 불리게 된, 기념비적인 시민 연대의 장이 펼쳐졌다. 21일 전국농민회총연합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등 농민단체들이 모인 ‘전봉준 투쟁단’이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행진하다 남태령역 부근에서 경찰과 차벽에 막혀 고립되어 있다는 소식이 SNS를 통해 퍼져나갔다. ‘전봉준 투쟁단’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농업 4법(양곡관리법,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농어업재해보험법, 농어업재해대책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에 항의하며, 트랙터 대행진을 벌이던 중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2030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시민들이 하나 둘 남태령을 향하기 시작했다. 응원봉을 들고 모여든 시민들은 밤새 도로 위에서 농민들과 함께하며 “경찰 차 빼!” 구호를 외쳤고, 남태령은 커다란 집회 현장이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이 전농TV 유튜브 라이브 중계를 보며 응원을 보냈다. 22일 새벽, 지하철이 운행되기 시작하자 더 많은 시민들이 남태령을 찾아갔다. 결국 22일 오후 경찰은 차 벽을 해제하여 길을 열었고, 트랙터 시위는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까지 행진하였다.
‘남태령 대첩’은 계엄-탄핵 정국에서 ‘탄핵(큰일)이 먼저’라는 목소리에 묻혀 ‘나중에’로 밀려났던 농민, 노동자, 여성과 소수자의 의제가 함께 이야기되는 자리였고, 이전에는 서로 잘 알지 못했던 소수자들이 손을 뻗어 연대하며 강해진 힘을 발견하는 자리였다. ‘전봉준 투쟁단’은 남태령 대첩 승리에 대한 감사의 답례로 무지개떡 1만개를 만들어, 28일 광화문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4차 범시민대행진’을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서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들과 나누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하원오 의장은 “혐오와 차별 속에 주류사회에서 배제되어온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노인, 도시빈민, 농민이 만든 승리”라며 고맙고, 또 고맙다고 했다.
남태령은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
우리가 거리에서, 광장에서 외치는 이유
소외 받는 목소리에 연대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민들,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며, 그러나 탄핵만 원하는 것은 아닌’ 시민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2024년 12월 26일 저녁, 마포녹색당과 정의당 마포구위원회가 〈시국집담회 - 광화문에서, 남태령까지〉를 열었다. 장혜영 전 국회의원/현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지역위원장과 김혜미 마포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집담회엔 온/오프라인으로 참여한 시민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공유했다.
주거권 운동을 하는 지수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은 최근 기고한 글(“윤석열은 방 빼고, 나는 방 뺄 수 없고”)에 악플이 쏟아진 일을 들려주었다. “‘왜 당신들 방 빼는 일에 윤석열을 끌어들이냐?’라는 댓글을 보고, ‘이거지. 이래서 내가 윤석열을 끌어들이지.’라고 생각했다.”고 말하며 크게 웃은 후,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가 뭔가요? 누군가한테 자녀가 있는데, 1억원을 증여하고 싶어요. 근데 세금을 내야 한대요. 그래서 그들은 ‘내 자식한테 돈 주겠다는데 세금을 왜 내냐?’며, 그 주장을 관철시켰어요. 그게 정치입니다. 우리가 알바해서 돈 벌어도 세금을 떼 가는데, 1억원을 증여하면 세금이 없어요. 최근엔 또 어떤 제도가 만들어졌는지 아세요? 8억 이하의 빌라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아파트 청약 과정에서 무주택자로 취급된대요. 집을 분명 갖고 있는데, 무주택자라고 해준대요. 이게 정치입니다. 집 문제 절대 개인적인 문제 아니고요, 전세사기도 절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지수 위원장은 “몇 달 전에도 전세사기 피해 여성청년이 희생자가 됐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분은 ‘전세사기 희생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언론 보도도 안 됐고, 유가족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 죽음엔 어떤 이름표도 없고, 우리 사회는 또 한 명의 여성청년을 잃어버렸지만, 왜 잃었는지도 몰라요. 나는 이게 너무 억울합니다. 그 억울함을 참을 수 없어서 주거권 활동을 하는 거에요.”
원은지 추적단불꽃 대표는 “올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언론 보도가 되기 시작한 딥페이크 성범죄 사태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지난 6개월 동안 2030 여성들은 딥페이크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 그리고 가해자가 내가 믿고 지내던 친구나 연인, 제자, 동료, 가족, 선배, 후배 등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고, 큰 상처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어디에선가 표출해야 했었다”며, 그것이 “국회 앞과 광화문, 남태령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정누리 ‘청주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걔네’ 활동가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지역에 서 살고 있는 여성청년으로서 ‘한국에서 지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상 ‘우리가 쫓겨나고 있는 상황인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에서 하는 말들을 듣고 있으면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 같다. ‘지금 이 한국 사회가 싫으면 그냥 네가 떠나라’고 하는 것 같다”고.
그럼에도 한국에, 청주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 건, 동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정누리 활동가는 “설사 작은 광장일지라도 내가 사는 곳에서 광장이 만들어지고, 함께 사는 사람들과 우리가 사는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문제점을 논의하는 게 되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밝혔다. “자유롭게 나의 삶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학교 밖 청소년이라 밝힌 베라(닉네임) 씨는 “청소년들에겐 시위 자체가 일종의 해방의 창구이기도 하다.”라며 자신 또한 “청소년 기후파업에 처음 참여하면서 큰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최근의 탄핵 촉구 집회에서도 “여성 청소년의 한 명으로서 집회에 있으려고 노력했다”는 베라 씨는 “광장에 청소년이 있다는 것 또한 기억해 달라”고 강조했다.
집담회 참여자들은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102030 여성들은 다양한 열망과 요구를 외치기 위해,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광장으로 모이고 있다는 것을.
이주민도, 트랜스젠더도 ‘동료 시민’이 되어 서로를 지켜준 경험
“이미 자신감을 얻어버렸거든요”…남태령은 계속될 것
시국집담회 참여자들은 또한 ‘남태령 대첩’을 경험하며 느낀 것들, 체감한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남태령 대첩’ 현장에 있었던 다양한 존재들. 나이든 농민들과 청년들, 이주민 2세,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 성소수자, 노동자, 전세사기 피해자, 대학 비진학 청년, 동덕여대 학생…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면서도 연대할 수 있음을 확인한 그 감각이 무엇을 남겼는지를 말이다.
남태령에서의 발언이 화제를 불러모았던, 그만큼 악플도 경험한 ‘위아더해군’(닉네임) 씨는 이주민 2세로서 “내가 누구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집단적 배척을 경험하는 건 생각보다 무서운 경험”이라고 토로했다. “그 경험은 어느 한 국가를 원망하는 것으로 변질될 수도 있고, 부모를 원망하는 게 될 수도 있으며, 이렇게 태어난 나를 원망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며, “이런 우리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건, 사람들의 응원과 연대”라고 강조했다.
“같은 동료 시민이라고 인지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이 땅에 있는 편견이 사라진다면, 만족할 것 같아요. 나를, 우리를 어떤 틀 안에 숨게 만드는 건, 모두의 편견으로부터 시작되는 거거든요. 열악한 환경에서 부족하게 자랐고, 힘들게 버텨온 우리와 함께 해 주세요. 그 부탁뿐입니다.”
고태은 민주노조를깨우는소리 ‘호각’ 활동가는 여전히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는 상황 속에 있음을 이야기했다.(관련 기사: “노동자들은 이미 비상계엄 상황이었다”) 사실 “이 광장이 끝나면 우리는 어디에 가 있을까 계속 생각했다. 그래서 야간봉이 흔들리는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도 자주 외롭다고 생각했다. 이후 소수만 남을 투쟁 현장이 더 외롭지 않을까 걱정됐다.” 하지만 ‘남태령 대첩’을 보며 “나의 비관적 생각을 비관하게 됐다.”고 했다.
“(남태령 대첩 이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이동권 시위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했고, 현장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때 나와 닮은 인류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달해도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죠. 차별 받고 착취 받는 존재들도 여전합니다. 싸움도 계속되고 있어요. 하지만 착취의 굴레만큼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게 바로 단결과 연대,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해방을 꿈꾸며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한 가치들을 위한 것이죠. 최근 시위를 경험하며, 그 투쟁이 노동자들의 싸움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요즘 만나고 있는 광장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뛰쳐나온 사람들이 서로를 지키는 경험은, 정말 사람들을 크게 변화시키거든요. 그 경험을 갖게 된 우리가 이제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생각해요. 그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거든요.”
고태은 활동가는 “노동 의제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은 빨갱이도 아니고, 도깨비도 아니다”라며 웃었다. “어디에서든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냥 곁에 가셔도 괜찮습니다. 그 곳에서 자신을 이야기를 하면서 연대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억울해서 주거권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 지수 활동가도 “어쩐지 이 광장이, 남태령이 저는 계속될 것만 같다.”며 “왜냐하면 이미 자신감을 얻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동안 위축되었던 감정을 ‘남태령 대첩’이 잊게 해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든지 남자든지 고양이든지 뭐든지 그런 걸 묻지 않고도 당연히 ‘집’이라는 게 마련되는 세상이 올 때까지, 광장에서 또 다른 남태령에서 함께 만나면 좋겠습니다.”
평등하게 살아갈 미래는 이미 와 있다
가장 많은 이들을 울린 발언은 전세사기 피해자이자 청년, 퀴어, 비건 등의 여러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한 이주연 씨의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과 달리 대학 비진학 청년인 동생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게 함께 살아갈 미래를 꿈꾼다”고 했다. 그리고 “그 미래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평등한 관계가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 하고, 다양한 연대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같이 미래로 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국집담회에서 참여자들이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을 보며, 이미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코 앞에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순간 멈춰버리거나 오히려 과거로의 회귀를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사로잡히지 않을 시민들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음을. 그 대열이 점점 길어지고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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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9 18:39
나는 남태령 투쟁이 이번 12.3 내란 사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그 의미를 되짚어야 할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관련 기사를 담아놓는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에도 유의미한 글들이 있지만, 여기는 관련 기사만...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3279
경찰 트랙터 막은 남태령 집회현장 되다 “경찰 차빼, 尹 방빼” (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2024.12.22 14:16)
‘농부 딸’부터 ‘트랜스젠더 농업인’까지…밤새 자유발언, 참여자 늘어
“경찰 차벽 탓, 엄중 보도해달라”…비상행동 시민대회 예고
“누군가는 우리를 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도 되는거냐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럼 나는 여러분과 함께 묻겠습니다. 우리가 웃고 있다고 해서 춥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왔다고 해서 목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설레는 마음으로 왔다고 해서 간절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후원해) 보내주신 음식 덕분에 배는 고프지 않습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전봉준 투쟁단’ 트랙터들이 전날 정오께부터 서울 서초구 남태령 인근에서 경찰에 막혀 대치한 지 24시간째, 경찰을 향해 “차 빼라”고 요구하는 시민들의 자유 발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2일 오전 날이 밝자 참가자들이 더욱 몰려들어 대오가 커지고 있다.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 대개혁 비상행동’은 낮 2시 이곳에서 시민대회를 예고했다.
22일 과천대로를 통해 서울로 진입하는 남태령 고개에선 아침 10시 기준 시민 약 3000명이 경찰 차벽 철수를 요구하는 집회에 대거 가세하는 등 24시간째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집회 참가자와 자유 발언자 절대 다수는 20~30대 여성이었다. ‘농부의 딸’부터 ‘중증 정신장애인’, ‘성전환 운동선수’ 등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존재를 부정 당하는 모든 이들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발언이 밤새 줄이었다. 전농은 유튜브 채널 ‘전농TV’로 이를 생중계하고 있다.
농부의 딸이라고 소개한 한 27세 여성은 이날 아침 10시께 발언대에 올라 “농부의 딸인 저는 대학교 오기 전까진 ‘깡시골’에 살았다. 그 때문에 전봉준 투쟁단에 눈길이 많이 갔다”며 “트랙터로 이동한 게 무슨 죄인가? 제 할아버지는 차가 없어서 경운기로 이동하셨다. 바퀴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는 “저기 선 트랙터가 경찰차보다 비쌀 수 있다. 며칠 전 저희 아버지가 볏짐 옮긴다고 2억짜리 트랙터를 샀다”며 “경찰차가 물러날 때까지 여기 있겠다”고 했다.
트랜스젠더 운동선수 나화린 씨는 “저는 여성 농업인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 보이는 트랙터들, 다 1억 원이 넘는다. 타이어도 지우개(와 같아)라서 먼 길 주행을 안 한다”며 “그런데 어떤 심정으로 여기까지 끌고 왔겠나. 그런데도 이렇게 막는 경찰이야말로 불법”이라고 했다. 그는 “하늘은 우리 편이다.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 힘내 싸워서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이라 밝힌 20대 여성 발언자는 “어젯밤 실시간 뉴스를 보며 밤을 새다가 인천에서 출발하는 1호선 첫 차를 타고 달려나왔다”고 했다. 그는 “한자는 전혀 모르고, 16세에 중국이 신분증 갱신을 시험공부 때문에 건너뛰었다는 이유로 저(의 신분)를 말소시켰다”며 “1980년대에 천안문에서 국가를 향해 저항하던 제 외가 친가 친척들이 있었다. 지금 이 땅에 저는 매국노를 쫓아내고자 여기에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살며 존재를 부정당하는 모든 이가 당당하게 살아가는 민주주의를 바라며, 내란 동조자들은 당장 물러가라”고 했다.
또다른 발언자는 “이 추운날 이 자리를 지킨 농민분들, 이들과 함께 밤을 새워주신 시민분들게 감사하다”며 “밤새 발언을 들으며 한강 작가가 말했던 두 가지 질문이 마음에 와닿았다. ‘왜 세계는 그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왜 세계는 그토록 아름다운가’”라고 했다. 그는 “SNS에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언굴로 팔레스타인의 건물을 폭파하는 이스라엘군이 나온다. 제주 4·3과 5·18 민주화 운동에선 한국군이 민간인 대상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윤석열은 12.3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짓밟으려 계엄을 했고, 지금 경찰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며 길을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고려대 세종캠퍼스 35대 부총학생회장이자 젠더퀴어라고 밝힌 허정재(26세)씨는 “윤석열 정부가 트랜스젠더 혐오에 앞서 나서던 작년 겨울, 성 소수자 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나 여기 오지 못한 친구 연재에게 이 발언을 바친다”며 “연재야 보고 있니? 윤석열은 네 바람대로 탄핵될 거야”라고 했다. 그는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로 가자”라는 ‘새소년’의 노래 <난춘> 가사를 소개하며 발언을 맺었다.
중증 정신장애를 가졌다고 밝힌 발언자는 “지난 7일 윤 대통령 퇴직 촉구 집회에 참여했다가 환청 때문에 병원에서 집회 참여를 금지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도 농민이다. (경찰이 전봉준 투쟁단 진입을 가로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약을 먹어도 잠이 안 오더라. 그 길로 나왔다”고 했다. 그는 “제가 (밤) 11시쯤 도착했는데, 지금은 깃발이 엄청 많아졌다.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다른 발언자는 “지금까지 20시간을 거리에 나와 있다. 사실 이렇게 비장한 마음으로 오진 않았다”며 “나 빼고 K팝 콘서트 하는 거 참을 수 없다, 나를 빼고 쓰여지는 역사 한 페이지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며 “우리가 웃고 있다고 춥지 않겠나?”라고 물었다.
오전 10시엔 전농을 비롯,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 대개혁 비상행동’의 입장발표 기자회견이 이어졌다. 박원호 전농 회장은 “우리는 끝까지 윤석열을 체포하기 위해 한남동으로 갈 것”이라며 “지금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함께 투쟁해 주신 시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기자회견에선 ‘대치 상태’를 실시간 보도하는 언론을 향한 당부가 이어졌다.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공동의장을 맡는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는 “언론 여러분들은 이 사태가 전적으로 경찰의 차벽 탓임을 엄중하게 보도해 달라”고 했다. “어제 한남동 공관을 거쳐 광화문에 진입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내란 수괴의 앞잡이 경찰들이 버스로 길을 막았다. 신고한 경로대로 행진했으면 국민 불편도 최소화하고, 주권자인 국민들의 저항권 행사는 강력하고 활발하게 이뤄졌을 것”이라고 했다. 박 대표는 “계엄군의 장갑차와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는 상징적으로 대비된다”며 “우리가 경찰에 ‘차 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이, 한남동 공관으로 가 ‘방 빼라’ 이렇게 얘기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는 “여기 계신 기자들께 설명을 드리고 싶다. 어젯밤 그 춥고 어수선한 심야 시간, 이곳은 정말 질서정연하고도 뜨거웠다”며 “이 아래 남태령역 여성 화장실에 가본 분은 봤을 거다. 여성용품부터 마스크, 가글, 간식까지 여자 화장실에 엄청나게 많은 물품들이 쌓였다. 마치 대한민국 역사상 정말 보기가 드문 현장이라는 분위기를 말씀 드리고 싶다”고 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현재까지 “경찰은 차 빼라” “윤석열은 방 빼라” “국힘당 해체하라” “내란동조자 불러가라” 등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발언 중간엔 시민들이 후원하는 감귤과 식사 등 음식과 핫팩, 담요 등의 후원물품을 배포한다는 공지가 이뤄지고 있다.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이날 낮 두시 남태령역 앞 시민대회를 연다. 민주노총도 22일 오전 10시50분께 전 조합원에 남태령역 앞 집결 지침을 내렸다. 전농과 집회 참가자들은 이정현의 ‘바꿔’,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레 미제라블 ‘너는 듣고 있는가’, ‘임을 위한 행진곡’, ‘나갈 때가 됐는데’ 등 가요와 민중가요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집회를 이어나가고 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74352.html
“윤석열은 방 빼고 경찰은 차 빼라”…‘트랙터 시위’ 남태령서 대치 (한겨레, 박고은 기자, 2024-12-22 14:44)
“청년들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인 응원봉을 들고 탄핵 집회에 나서듯, 농민들도 자신이 가진 가장 값진 농기계인 트랙터를 끌고 상경한 것뿐입니다. 윤석열 정권은 장갑차도 국회에 끌어 들여놓고 트랙터는 무슨 이유로 막는 겁니까?”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 차벽에 가로막힌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행진을 응원하기 위해 22일 오전 서울지하철 4호선 남태령역 부근 시위 현장을 찾은 김은진(60)씨가 외쳤다. 이미 경남과 전남에서부터 상경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의 트랙터 행렬이 전날부터 22시간 넘게 밤샘 대치를 벌여온 즈음이었다.
‘전봉준투쟁단’ 행렬이 남태령 고개에서 막혀 경찰과 밤샘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공유되면서 이날 시민 3만여명(전농 추산)이 응원봉을 들고 모였다. 영하로 떨어진 한파 추위에도 시민들은 남태령역 위 8개 차로 150m가량을 가득 메웠고, 윤도현 밴드의 ‘아리랑’, 이정현 ‘바꿔’, 부석순 ‘파이팅 해야지’ 등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윤석열은 방 빼라!”, “경찰은 차 빼라!” 등의 구호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의도와 광화문 집회 때와 마찬가지로 현장에 함께하지 못한 시민들은 따듯한 국밥 등 배달 음식과 방한용품, 음료 등을 보내 마음을 보탰다.
시민들은 트랙터를 막고 있는 ‘경찰 차벽’이 부당하다고 입을 모았다. 집회 현장에서 책을 펴고 공부하던 신미영(23)씨는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 함께하지 않으면 스스로 떳떳하지 않을 것 같아 나왔다”며 “트랙터를 막고 있는 경찰들은 집에 돌아가도 떳떳하게 쉴 수 없겠지만 여기 시민들은 떳떳하게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농민들이 위험한 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 무조건 제재하는 건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구로에서 온 정윤현(22)씨도 “집회는 신고제이지 허가제가 아닐뿐더러, 서울 입구에서 트랙터가 막혔다는 건 여전히 정부기관이 윤 대통령을 엄호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며 “윤 대통령은 소환조차 못 하면서 시민들의 기본 권리는 왜 막느냐”고 꼬집었다.
농민을 향한 연대의 목소리도 잇따랐다. 직장인 송아무개(29)씨는 “윤 대통령이 수차례 (입법) 거부권을 써온 것에 대해 불만이 컸는데,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도 양곡관리법 등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농민들만 잘살겠다고 양곡법을 주장하는 게 아닌데 거부권을 남발하는 건 월권”이라고 지적했다. 군산에서 온 곽학종(55)씨도 “시민들이 따뜻한 쌀밥과 신선한 야채를 먹을 수 있는 건 농민들 덕분인데 당연히 연대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이번에도 청년들이 앞장서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에 미안한 마음이 커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날 집회에는 농민, 교사, 성소수자, 청년 여성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시민들의 자유발언도 잇따랐다. 발언대에 오른 한 도덕교사는 “교사에겐 정치 중립의 의무가 있다”면서도 “그러나 이것(윤석열 탄핵)은 정치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생 허정재(25)씨는 “작년 겨울 성소수자 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며 “국민이 주인인 민주 사회, 소수자 차별과 혐오 없는 사회, 농민분들이 승리하는 사회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유 발언에 나선 한 여성 농민도 “농촌에서 살면서 때로는 외로움을 느꼈는데 오늘 모인 시민들을 보며 힘을 얻었다. 건강한 먹거리 농민들이 책임지겠다”고 외쳤다. 시민들은 “농민이 최고다”란 구호로 화답하기도 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222057015
2030 여성·장애인·청소년·농민…“싸우는 ‘우리들’ 있다” (경향, 김정화·이예슬 기자, 2024.12.22 20:57)
소수자, 광장의 중심으로
“각양각색 사람들, 일상의 민주주의 지키려 쏟아져나와”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우리 새 역사/ 삼천리 방방골골 농민의 깃발이여/ 찬란한 승리의 그날이 오길/ 춤추며 싸우는 ‘우리들’ 있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남태령 고개 인근에서 벌어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밤샘 농성에선 민중가요 ‘농민가’의 개사곡이 울려 퍼졌다. 전농이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이라는 원곡을 ‘우리들’로 바꿔 선창하자 시민들이 이를 따라 부르며 화답했다.
각종 응원봉을 든 2030 여성들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윤석열 대통령 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화물차 등을 타고 상경 시위에 나선 이들이 경찰 차벽에 가로막히자 시민 수천명이 한밤에 거리로 나와 시위에 가세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이 장면은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집회의 특성을 보여준다. 지난 3일 이후 매일 여의도 국회 앞과 광화문 일대에서 윤석열 퇴진을 촉구하며 열린 촛불집회는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색깔로 빛났다. 토요일마다 열린 촛불행진은 누적 참가인원이 300만명(주최 측 추산)을 넘는 대규모 집회인데도, 과거 집회에서 있었던 여성혐오 발언이나 일부 단체의 남성중심적·배타적 시위 문화는 보기 힘들었다. 참가자들은 노조·정당·단체의 깃발 아래 ‘단일대오’를 꾸리는 것 대신 직접 만든 각양각색 깃발과 K팝 가수의 응원봉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무대에선 ‘소수자’가 끊임없이 호명됐다. 집회 주무대에 오른 사람들은 더는 ‘중장년 고학력 비장애 이성애자 남성’이 아니었다. 20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농민들이 과거의 주류를 대체했다. 서울에선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가 무대에 엎드려 “장애인도 교육받고, 노동하고, 이동하게 해달라”고 발언해 환호가 이어졌다. 대구에선 “TK(대구·경북)의 딸들이 너희를 깨부수러 왔다”는 손팻말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윤석열 퇴진이 전부가 아니며, 민주주의 안에는 수많은 이가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며 경제 불평등, 양극화, 젠더폭력, 성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 해소,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외쳤다.
주최 측도 ‘혐오 없는 광장’을 위해 안팎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1500여개 시민단체가 모인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을 참가자들과 함께 낭독하고 집회를 시작했다.
“민주주의는 성별·성적지향·장애·연령·국적 등 서로 다른 사람이 배제되지 않고 안전하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곳에서 가능하다. 집회 발언 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승훈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하려면 이 광장이 물리적, 심리적으로 안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여러 계층과 세대를 품기 위해 높은 감수성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게 약속문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때만 해도 여성 비하 발언이나 집회 참가자 성추행 등이 문제가 됐는데, 지금은 시민의식도 성숙해진 것 같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참가자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잘못은 수정하면서 쌍방향 집회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가수의 노래는 무대에서 틀지 않고, ‘형제들’을 ‘우리들’로 고쳐 부르는 장면도 소통으로 이뤄진 변화라고 했다.
시민들은 한국 사회의 병폐가 ‘탄핵 정국’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뿐, 약자의 터전을 부수고 일상의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일은 그보다 더 뿌리 깊은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야구팬, 빠순이, 오타쿠’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제나씨(28)는 지난 12일과 14일 집회 무대에 올랐다. 그는 “이전 세대가 독재와 부조리에 맞선 결과 지금 우리가 많은 걸 누릴 수 있게 됐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라면서 “아직도 폭력과 차별에 놓여 있는 약자들이 있고, 이다음 민주주의엔 이들을, 우리를 두고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은 이미 충분히 똑똑하고, 앞으로 더 현명해질 것”이라며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대통령을, 국회의원을, 사법부를 끝까지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광장의 외침은 정치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쏟아져나온 것은 일상의 민주주의가 침해된다고 느꼈고, 엄청난 제왕적 권력이 더 이상 용납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다음 국회와 대통령은 시민을 단순히 ‘집회 머릿수 채워주는 존재’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74377.html
28시간 만에 시민들이 뚫었다...트랙터 시위대, 한남동 관저로 [영상] (한겨레, 박고은 김가윤 정봉비 기자, 수정 2024-12-22 22:14, 2024-12-22 17:06)
“윤석열은 방 빼고 경찰은 차 빼라!”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 상경 시위에 나선 ‘전봉준투쟁단’이 경기 과천시 남태령고개에서 경찰에 막혀 대치를 이어간 지 하루가 꼬박 지난 22일. 농민들을 응원하기 위해 속속 모여든 시민들의 외침은 어느새 뜨거운 함성이 됐다. 경찰은 28시간 넘는 대치 끝에 결국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가는 길을 열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등이 모인 전봉준투쟁단은 지난 16일부터 전남과 경남에서 각각 트랙터 행진을 시작해 전날 정오께 남태령에 이르렀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윤 대통령 관저였으나 서울지하철 4호선 남태령역 인근 도로 전 차선을 통제한 경찰 차벽에 막혀 밤샘농성을 벌였다.
이날 전봉준투쟁단이 남태령고개를 무사히 넘은 것은 ‘길이 열릴 때까지’ 거리를 지킨 시민들 덕이었다. 경찰을 압박하러 달려나온 시민들은 전날 오후부터 ‘즉석 집회’를 열었다. 영하 11도의 한파 속에서도 시민들은 케이팝과 ‘농민가’를 번갈아 부르며 긴 동짓날 밤을 버텼다. 현장에 오지 못한 이들은 따듯한 국밥 등 배달음식과 방한용품, 음료 등을 보냈다. 시민들의 연대 행렬은 밤새 불어나 8개 차로를 가득 메웠고 이날 오후에는 3만명(전농 추산)에 이르렀다. 결국 경찰은 이날 오후 4시40분께 차벽을 물렀고, 길이 열리자 시민들은 “이겼다! 만세!”라며 환호하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이어갔다.
https://youtu.be/W2pWmE7fdi8
좀처럼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농민운동에 이토록 뜨거운 연대가 쏠린 배경에는 ‘소셜미디어의 힘’이 있다. 전날 낮 엑스(옛 트위터)에 경찰이 트랙터 운전자를 강제로 끌어내고 강경 진압하는 영상이 공유되면서 많은 시민의 분노를 자아낸 것이다. 이미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집회의 전농 상여투쟁을 시작으로 최근 한 여성 농민이 엑스에서 공유하는 전농 소식에 젊은 누리꾼들이 화력을 더해오던 참이었다. 전봉준투쟁단의 상경을 지켜본 시민들에게 응원봉을 들고 남태령으로 ‘마중’ 나가는 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날 연대 시민과 농민들은 서로를 다독였다. 김은진(60)씨는 “청년들이 가장 소중한 물건인 응원봉을 들고 집회에 나서듯, 농민들도 자신의 가장 값진 농기계인 트랙터를 끌고 상경한 것”이라며 “트랙터 시위는 의사 표현의 한 방법일 뿐, 불법을 저지른 건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 대통령”이라고 했다. 발언대에 오른 한 여성 농민은 “농촌에 살면서 때로 외로움을 느꼈는데 오늘 모인 시민들을 보며 힘을 얻었다. 건강한 먹거리, 농민들이 책임지겠다”고 외쳤다. 시민들은 “농민이 최고다”라며 화답했다.
뚫릴 것 같지 않던 장벽을 허물고 길을 연 트랙터 13대가 이날 저녁 6시45분 서울 한강진역 부근에 모습을 드러내자 순간 환호성이 터졌다.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트랙터 행렬을 기다리며 집회를 연 1만여명(주최 쪽 추산)의 시민들은 “국민이 이겼다! 농민이 이겼다!”라고 외쳤다. 각자 준비한 응원봉을 흔들거나 응원봉이 없는 이들은 엄지라도 치켜들었고, 신해철의 ‘그대에게’에 맞춰 방방 뛰기도 했다. 경기 고양에서 온 오민서(22)씨는 “사람들이 모이고 머릿수가 많아지니 장벽이 허물어져서 결국엔 ‘민주주의가 또 승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난한 대치 와중에 전봉준투쟁단을 지키려는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움직임도 컸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 야당 의원들이 현장을 찾아 경찰과 협상에 나섰고, 윤석열퇴진비상행동은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를 신청했다. 이날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는 트랙터 행렬을 막아선 서울 방배경찰서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처벌해야 한다는 고발장도 접수됐다.
http://www.laborparty.kr/?page_id=13642&mod=document&pageid=1&uid=2970
[논평]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2024. 12. 22, 노동당 대변인실)
- 전봉준 투쟁단과 도시 청년여성노동자의 역사적인 연대
12월 21일과 22일에 걸쳐 우리는 역사적인 연대의 밤을 만들어 내었다. 윤석열 체포구속과 국민의힘 해체를 외치며 서울로 진입하려던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 행진이 남태령에서 경찰의 차벽에 막혀 저지되자, 광화문에서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사람들 특히 청년여성을 주축으로 한 시민들이 농민들과 함께 하겠다며 남태령으로 달려가서 밤을 지샌 것이다.
대부분 노동자이거나 노동자가 될 도시의 청년여성들과 농촌의 농민들 간에, 이전에는 거의 생각하기 어려웠던 연대가 이루어졌다. 그간 한국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무시되어 왔던 대표적인 두 집단이 서울의 관문에서 동짓날 밤을 함께 보냈다. 소멸해가는 농업에 종사하는 농촌의 농민들과 나이와 젠더에 따른 차별에 시달렸던 도시의 청년여성노동자들이다.
두 집단만의 이야기에 그치지도 않았다. 광화문과 남태령에서는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의 깃발도 휘날렸다.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아무런 조건 없이 기꺼이 달려가고 자발적으로 연대하는, 모든 역사적인 항쟁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나타났다.
직접 참가하지 못한 이들도 핫팩이나 음식 등 물품 후원으로 함께 했다. 지하철 역에는 사람들이 보낸 생리대와 상비약 등이 쌓여있었다. 무엇이 필요할지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권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밤중의 남태령 거리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했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로 시작해서 ‘춤추며 싸우는 우리들 있다’로 끝나는 농민가가 현장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인 장면이다. 이런 연대의 기억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는다. 이 기억을 계속 간직하면서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농업과 농민의 가치를 새롭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일부에서는 농업은 더 이상 보호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국제적인 식량 공급의 불안정성이 심각해지고 있는 지금 자기 나라에서 기본적인 먹거리 생산의 기반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부재지주와 소작의 대폭 증가로 인해 생산비가 늘어나고 각종 개발과 맞물리면서 농지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진 것 등 현재 농촌의 구조적인 모순을 타파함으로써, 도시의 청년노동자들에게 생활비 부담을 줄여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조건없는 연대가 서로에게, 그리고 공동체 전체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사회대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남태령 밤샘 투쟁의 경험은 단지 정권교체 정도만으로 이번 탄핵국면이 마무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소멸해가는 농촌과 농민, 차별받는 청년과 여성, 존재가 위협받는 장애인과 성소수자, 비정규직이나 중소 영세사업장 및 프리랜서 등 모든 일하는 노동자의 목소리와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노동당 역시 그 길에 흔들림 없이 함께 연대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춤추면서, 싸우면서.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221845001
[사설] 차벽세워 농민 막고 1인시위 봉쇄, 경찰 내란 수괴 비호하나 (경향, 2024.12.22 18:45)
혹한 속에서 시민과 농민 수만명과 경찰이 서울 남태령 노상에서 하루 넘게 대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이 차벽을 세워, 트랙터를 몰고 온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농민들의 서울 진입을 막은 탓이다. 다행히 22일 오후 차벽을 풀었지만 경찰이 평화롭게 진행되던 농민들의 집회와 시위를 막은 것은 위헌이고 위법이다.
경찰은 교통 혼잡과 시민 불편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집회 장소 선택은 전적으로 농민들의 권리다. 헌법에 명시된 집회·시위의 자유엔 집회의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는 자유도 포함돼 있다. 농민들로서는 인구의 절대다수가 거주하고, 대통령실이 자리 잡고 있는 등 농업 정책이 실질적으로 결정되는 서울에서 시위를 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양곡관리법 등 농업 4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국무회의가 열린 곳도 서울이고, 앞서 해당 법안을 통과시킨 국회가 있는 곳도 서울이다. 농민들은 경찰 등 당국의 보호와 지원을 받기 위해 사전에 집회 신고도 마친 상태였다.
요즘 경찰의 행태를 보면 ‘민중의 지팡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윤석열 관저 인근의 기자회견과 1인 시위를 막고, 심지어 시민들을 상대로 불심검문까지 자행했다. 윤석열이 민주주의를 짓밟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니 경찰도 박정희·전두환 시대로 돌아간 것인가. 1인 시위는 법률상 시위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집회 신고 없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급기야 지난 20일 서울행정법원은 경찰이 용산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열리는 ‘윤석열 체포 촉구 집회’를 제한한 것이 위법이라며 시민단체의 손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경찰은 이번 12·3 내란 사태의 공범이다.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서울경찰청장은 비상계엄 발표 3시간 전 윤석열과 안가에서 내란을 모의한 사실이 드러나 구속됐다. 이들은 체포자 명단이 담긴 문건을 받고, 국회의원들의 국회 진입을 막았다. 이런 경찰이 국헌 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시민들의 집회와 시위를 막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남태령으로 달려간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시민들은 “차 빼라” “윤석열 탄핵”을 외치며 밤샘 시위를 이어가고, 피로에 지친 농민들에게 음식과 핫팩 등을 제공했다. 경찰이 진정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은 경호처를 방패 삼아 탄핵심판 서류조차 접수를 거부하는 윤석열이 아니라, 한밤중 혹한에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나선 시민들이다. 이호영 경찰청장 직무대리와 최현석 서울경찰청장 직무대리 등은 이날 사태에 사과·반성하고, 앞으로 시민들의 집회·시위를 적극적으로 보장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222048015
[신경아의 조각보 세상] 그날 밤을 새운 소녀들 (경향,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2024.12.22 20:48)
경찰버스로 막힌 남태령 고개서
윤석열 파면 외친 청년여성들
살인적 추위에도 서로 돌본 그들
정작 괴로워해야 할 이는 누군가
엄마딸 오늘 집에 못 들어가. 지난 토요일 밤 남태령 고개에 모인 청년여성들이 보냈다는 문자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려다 경찰의 저지로 멈춰 섰다. 낮 동안 광화문과 종로 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남태령으로 와 달라는 메시지를 받고 귀갓길 발걸음을 돌렸다. 경찰버스로 막힌 길목에서 사람들은 “차 빼라” “윤석열 파면”을 외치며 밤을 새웠다.
얼마나 추웠을까. 새벽에는 영하 6도까지 내려가리라는 예보와 함께 12월 동짓날의 긴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하나 없는, 텅 빈 벌판에서 어떤 이는 마이크를 잡고 어떤 이는 응원봉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소녀들이었다. 유튜브 생중계 영상 속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10대와 20대로 보였다. 아직 학생이거나 직장 초년생이거나 누군가의 딸들일 그들의 얼굴은 한겨울 얼어붙은 날씨 속에서 야광봉보다 더 파랗게 빛났다. 트위터(X)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애기(아기)’라고 부르며 농민 어르신들을 지키자고 다독였다.
피자가 오고 커피와 따뜻한 차가 오고 핫팩이 전달됐다. 방구석 1열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영상 시청자 수라도 늘리자며 유튜브를 끄지 않았고 집회 참여자들을 위해 음식과 보온용품을 주문했다. 덕분에 수백명에 이르는 참여자들은 추위를 견디고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었다. 아침 지하철 첫차가 운행되면 ‘배턴터치’하겠다는 메시지도 함께 전달됐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저체온증 위험까지 감수하며 한겨울 벌판에서 밤을 지새운 이들에게 어떤 설명을 덧댄다면 그것은 분명 사족(蛇足)일 것이다. 열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 몇 분간의 영상이 더 많은 진실을 알려준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그들, 소녀들을 위해 뭔가라도 해야 한다는 나의 아주 작은 책임감이 집회가 계속되는 일요일 오전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청년여성들이 윤석열 탄핵 집회를 주도하고 문화를 바꾸어온 이 뜻밖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해가 진 뒤에나 날기 시작하는 미네르바(지혜의 부엉이)’의 게으른 임무라도 외면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몇 가지를 추측해본다.
첫째, 청년여성들의 ‘사회적 감수성’이다. ‘청년’의 시기는 사회적 부정의에 예민하다. 그런데 왜 청년 ‘여성들’인가? 20대 여성들에게 물은 결과 두 가지 답변을 얻었다. 하나는 윤석열 내란의 충격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체제에서 성장해온 그들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훼손되고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았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정당이나 사상, 이데올로기보다도 앞서는 기본권이었고 그만큼 충격이 컸다. 12월3일 밤 이후 한국 상황을 외국의 K팝 친구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이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다른 하나는 여성으로 겪어온 불평등의 경험이다. 성차별과 성폭력의 위험에 대한 인식이다.
둘째,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연대의식이다. 토요일 밤 집회에서 청년여성들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와 함께 농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날 밤 SNS에는 우리가 떠나면 농민들이 공격받을 수 있다는 걱정의 말들이 넘쳤고 그들은 농민들 곁을 지켰다.
셋째, 액티비즘이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과 미투, 윤석열 정부의 백래시에 대한 저항, 젠더폭력의 사회적 의제화 과정에서 청년여성들은 실천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토요일 밤 집회는 이들의 실천이 응원봉에만 그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도 광장을 떠나지 않고 서로를 돌보기 위해 애썼던 이들과, 밤 내내 생중계 영상을 보며 격려하고 경찰서에 항의 전화를 건 이들의 책임감과 행동력은 또 다른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12·3 사태 후 청년여성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감기약 먹고 집회에 나가고, 몸이 부서질 것 같은데 안 나가면 더 힘들 것 같아 응원봉을 챙긴다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춥고 아파서 하나씩 나가떨어지는데 그까짓 차 몇 대가 뭐라고 국민들이 밤을 새우고 서로를 지키고 나는 그것도 하나 못 버티고 아프다고 저 현장을 혼자 빠져나오고 너무 괴로워”(인터넷 커뮤니티 더쿠에서 인용)한다는 고백이다.
정작 괴로워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나 역시 괴롭고, 괴로움을 모르는 내란 동조 세력들로 인해 더욱더 괴롭다. 그러나 우리의 이 괴로움이 사회를 맑게 지켜갈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그날 밤 광장을 지킨 소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74406.html
‘28시간 경찰 차벽’ 뚫은 트랙터 시위, 시민 1만명 마중 나왔다 (한겨레, 정봉비 기자, 2024-12-22 20:29)
남태령 대치 끝 관저 인근 도착…시민들 “국민이 이겼다” 환호
남태령 고개에서 넘어온 트랙터들이 한강진역에 모습을 드러내자 순간 환호성이 터졌다. 각자 손에 든 응원봉을 차도 방향으로 연신 흔들어 대거나 응원봉이 없는 이들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 상경 시위에 나선 ‘전봉준투쟁단’이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에 막혀 대치를 이어간 지 28시간. 뚫릴 것 같지 않던 장벽이 허물어지고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트랙터 행렬을 기다리던 시민들은 신해철의 ‘그대에게’에 맞춰 승리의 춤을 췄다.
22일 저녁 6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등이 모인 전봉준투쟁단은 남태령에서 넘어오는 트랙터들을 맞이하며 한강진역 2번 출구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춘선 전여농 정책위원장은 이날 집회에서 “끈질기고 질긴 놈이 이긴다고 했다”며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가 꼭 남태령을 넘어야 한다는 시민분들과 농민분들의 절절한 염원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관저까지 트랙터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날 일찍 집회 장소에서 대기하던 이들은 각자의 사정 때문에 낮 동안의 대치 상황에 함께하지 못해 부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경기 부천에서 달려왔다는 이우상(62)씨는 “어제 밤에도 오늘 낮에도 일이 있어 직접 참여는 못 했지만 유튜브로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다”며 “농민들도 고생이지만 젊은 학생들도 많이 있더라. 엄청 추운 날씨였는데 아들 둘 가진 입장에서 걱정도 들어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남태령에서처럼 한강진역에서도 핫팩, 돗자리 등의 방한용품과 음료 나눔은 계속됐다. 나눔용 핫팩 30개, 방석, 담요를 담은 가방을 끌고 집회 장소까지 온 안나령(27)씨는 “새벽 6시까지 실시간 현황을 살펴보느라 잠을 못 잤다. 경찰이 과격 진압을 할까 봐 불안했다”며 “늦게 일어났는데 (대치) 상황이 그대로여서 바로 나눔용 물품을 싸서 여기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새벽 5시부터 남태령 대치 장소를 지키다가 한강진역으로 넘어온 직장인 신송이(40)씨는 “(남태령은) 정말 추웠다. 거기 시민들이 나눠주던 은박담요, 핫팩, 김밥이 아니었다면 못 버텼을 것”이라며 “이렇게 쉽게 열릴 장벽을 왜 세운 건지, 누가 시켰는지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경찰이 추운 날씨에 시위대를 고립시키며 국민의 안위를 지키지 않았던 일에 실망을 표하는 한편 트랙터가 관저에 도착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반응을 보였다. 신씨는 “경찰이 트랙터의 유리창을 부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찰이 국민을 지켜주지 않아 국민 스스로 지키러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 고양시에서 온 대학생 오민서(22)씨는 “남태령 전까진 경찰이 보호해줬다는데 서울 경계인 남태령 넘으려 하자 이런 일이 발생해서, ‘서울시 경찰은 딴 나라 경찰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래도 사람들이 모여들고 머릿수가 많아지니 장벽이 허물어져서 결국엔 ‘민주주의가 또 승리했다’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밝혔다.
전날 낮부터 28시간 넘게 이어지던 대치상황은 시민들의 밤샘 투쟁과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의 중재에 힘입어 깨질 수 있었다. 트랙터 총 13대가 동작대교를 지나 한남동 관저 인근까지 행진했다. 이날 한강진역 집회에는 약 1만여명(주최 쪽 추산)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90811
"윤석열 집앞이 열렸다, 무박2일 남태령대첩에서 승리" (오마이뉴스, 24.12.22 11:57 l 최종 업데이트 24.12.23 09:25l 이주연(ld84) 글: 유지영(alreadyblues) 사진: 권우성(kws21))
[현장 ] 남태령부터 한강진까지 트랙터와 함께 한 1만여 시민들 "우린 결코 질 수 없겠구나"
https://youtu.be/8BrqeNu-3jo
▲ [현장] 응원봉 환호속 한남동 입성 트랙터... 눈물샘 주의 ⓒ 권우성
[최종신 보강 : 22일 오후 8시 40분]
무박 2일의 투쟁 끝에 결국 시민들이 이겼다.
22일 오후 6시부터 '남태령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모여든 시민들은 1만여 명으로 한강진역 2번 출구부터 2차선 도로를 200m 가량 가득 채웠다.
사회자는 "남태령 대첩에서 우리가 이겼다"라며 "승리한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주자"고 말했다. 이어 "윤석열 집앞이 열렸다, 광화문에서 볼 뻔한 트랙터를여기서 보니 도파민이 폭발한다"고 외쳤다.
일요일 밤, 영하 3도의 날씨 속에도 시민들은 각자의 응원봉과 깃발을 들고 집회 현장을 찾았다. 트랙터가 한강진역에 들어서는 순간에는 환호를 보냈고, 집회가 끝나기 직전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오자 함께 따라 불렀다.
김민문정 비상행동 공동의장(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은 무대에 올라 "점점 불어나는 시민들을 보면서 우리는 결코 질 수 없겠구나 깨달았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해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김민 공동의장은 "(집회에) 2030 여성들이 많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블라인드(익명 커뮤니티)에는 여성혐오 글이 올라온다고 한다. 지금 민주주의 역사를 쓰는 우리에게 감히 누가 여성혐오, 소수자혐오를 말하나"라고 말했다. 김민 공동의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회 참가자들은 "(여성혐오는) 말도 안 된다"라면서 탄식했다.
한강진역 2번 출구로도 각종 음식과 핫팩 등의 연대가 이어졌다. 사회자는 무대에 올라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나 많은 음식이 배달되고 있다. 집회 끝나고 가시는 분들은 2번 출구 앞에서 음식과 음료를 챙겨가시면 된다"라면서 "이제 그만 보내주셔도 된다 충분한 사랑, 우리 잘 받았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집회 참가자들은 그간 음식 등을 연대한 시민들에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외쳤다.
이날 집회에는 32주차 임산부도 함께했다. 그는 "어제 밤부터 보다가..."라며 눈물 지었다. 그는 "농사를 열심히 지으시던 할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라며 "할아버지가 생각나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이가 내년 2월 21일 태어날 예정"이라며 "아이가 태어날 때는 상식적인 사회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내향인)'이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3일 내란 사태 이후 집회에만 3차례 나선 30대의 시민도 이날 참여했다. 그는 "원래는 록페스티벌을 위해 여름용으로 만든 깃발이다. 내향인이라도 록페스티벌도, 집회도 다같이 나와 즐기자는 뜻에서 (오늘도) 갖고 나왔다"라면서 "농민 분들도 그리고 주목받지 못하는 시민들, 소수자들, 노약자들 모두 나은 세상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한강진역 집회는 7시 20분께 마무리됐다. 현장에는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퍼졌고, 집회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응원봉을 흔들며 춤췄다.
예정돼있던 집회가 끝났지만 분노한 시민들 수백여 명은 오후 8시가 넘어서까지 윤석열 대통령 관저가 있는 한남동 국제루터교회 맞은편으로 몰려가 "윤석열을 체포하라"고 외쳤다.
수백명 시민들, 지역으로 향하는 트랙터 배웅
수백여 명의 시민들은 한남동을 떠나 각 지역으로 향하는 트랙터 탄 농민들을 배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충식 전농 전북도연맹 사무처장은 트랙터에 올라 "고맙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농민들이 무사히 서울로 입성했습니다"라면서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밥상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주권자가 명령한다, 윤석열은 퇴진하라! 전봉준이 명령한다, 국힘당은 해체하라"고 외쳤다. 시민들도 "윤석열은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은 트랙터가 한남동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국민이 이긴다", "우리가 이긴다"고 외쳤다. 이어 트랙터를 향해 "조심히 가세요"라고 말하고, 다시금 '다시 만난 세계'를 불렀다.
[6신 : 22일 오후 6시40분]
'윤석열 퇴진' 트랙터 환영! 한강진역 응원봉 물결
6시 40분, 트랙터가 한강진역에 도착했다. '윤석열 퇴진'을 플래카드로 붙인 트랙터는 수많은 응원봉들의 환영을 받으며 천천히 진입했다. 전봉준 투쟁단은 "우리가 이겼다"라며 "윤석열 각오하라"고 외쳤다.
트랙터가 지나가자 이태원역 주변에서 트랙터를 마주친 시민들은 "멋지다"라면서 트랙터를 담은 동영상을 촬영하거나 지인에게 영어로 현재 대통령 탄핵과 둘러싼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경남 진주에서 올라왔다는 대학생 이수민씨는 연단에 올라 "저들과 같은 밥을 먹을 수 없다, 윤석열이 듣게 외치자"며 "윤석열 뜨끈한밥 금지, 김장김치 금지, 신토불이 금지"라고 소리쳤다.
한편, 민주노총 관계자는 "트랙터는 집회장소 경유 후 해산할 것"이라며 "집회 후 행진은 없다"고 밝혔다.
[5신 : 22일 오후 6시]
트랙터보다 먼저 도착한 시민들... 발빠른 응원물품
오후 6시, 트랙터보다 시민이 먼저 도착했다. 발빠른 응원 물품들도 한강진역 2번 출구 옆에 자리 잡았다. 무대 앞으로 나란히 앉은 시민들은 "윤석열을 체포하라"고 외치고 있다. 사회자는 "무박 2일 투쟁 마치고 시민들이 모이고 있다"라며 "많은 분들이 모이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밤 남태령에서 4시간 30분 가량 머물다 집에서 쉬고 22일 다시 한강진역으로 나온 이희수(30)씨는 "오늘도 나온 이유는 아무래도 남태령에 갔기 때문일 것"이라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이씨는 "집에 갔지만 잠을 자지 못하고 라이브 방송을 틀었다. 내 친구가 남태령에서 밤을 지샜고, 농민들의 힘듦을 몸과 마음으로 겪으니 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이곳에 왔다"라고 말했다.
[4신 : 22일 오후 5시 15분]
사당역 도착한 트랙터..."우리가 이겼다, 한남동으로!"
22일 오후 5시, 선두 트랙터가 사당역 사거리에 도착했다. 이로써 차벽에 막힌 지 29시간 만에 서울에 입성했다.
줄이은 트랙터 행진에 지나던 시민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보냈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트랙터 행진을 함께 걸으며 "우리가 이겼다"며 환호했다. 시위 트럭 위에 오른 사회자는 "절대 서울은 안 된다고 했는데 이제 남태령 고개를 넘는다"며 "전농은 끝까지 싸울 것" "길을 열어준 시민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참가자들은 오후 6시 한강진역 2번 출구에 다시 모여 윤석열 대통령 한남동 관저 앞에서 시위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3신 : 22일 오후 4시 30분]
"경찰, 차 빼라"
수도방위사령부 앞, 경찰차 3대는 여전히 길을 막고 있다. 30분 째 집회 참가자들은 "차빼라"라고 외치고 있다. 경찰 측은 "이제 뺄 거"라는 설명을 반복하고 있다.
35분 경찰차가 드디어 움직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박수로 환호했다.
[2신 : 22일 오후 4시]
핫팩, 물, 커피, 헛개차, 핫초코... 속속 전해지는 시민들의 응원
흡사 콘서트장이었다. 1만여 명(주최 측 추산)의 시민들이 모두 일어서 손에 든 응원봉을 흔들었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달랐지만, 구호는 둘로 정해졌다.
"윤석열, 방빼", "경찰 차빼라"였다. 노래 <파이팅해야지>가 흘러나오면 '파이팅' 가사 다음에 '차빼라'가 붙는 식이다. 22일 오후 2시, 경기도 과천 남태령 고개 앞에서 열린 '윤석열 체포 구속-농민 행진 보장 촉구 시민대회'의 모습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가 경찰의 버스 차벽에 막힌 지 28시간이 지났다. 전농은 지난 16일부터 경남 진주와 전남 무안에서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향하던 차였다. '윤석열 구속 촉구'를 위한 행진이었다. 이들의 트랙터는 서울 입성을 코 앞에 둔 남태령 고개를 넘어가기 직전 경찰의 차벽에 막혔다. 한때 경찰과 대치 상황까지 벌어지자 SNS에 현장 상황이 급속도로 공유됐고, 시민들이 모여들어 밤새 현장을 지킨 상태다.
전농과 시민들을 응원하기 위한 '조공'도 속속 도착했다. 무대 앞과 옆, 남태령역 입구 부근에는 핫팩은 박스째 쌓였고, 물과 커피, 헛개차, 핫초코 등 몸을 녹일 수 있는 음료들이 배달됐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초코과자와 각종 간식들은 한 데 모였다. 자원봉사를 자처한 이들은 "따뜻한 커피 드시고 가세요", "김밥 드세요", "핫팻 가져가세요"라며 지나가는 이들의 손에 물품들을 쥐어줬다.
"밤새 얼어죽는 줄... 여러분도 끝까지 함께 해주십시오"
트럭 위에 만들어진 간이 무대에는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하기 위해 줄을 섰다. 사회자는 "발언 하려 5시간을 기다리신 분들"이라고 했다.
65세 여성은 "날새는 어린친구들이 걱정돼 첫 차를 타고왔다"고 했다. 24세 운동선수라는 또 다른 여성은 "집에서 가장 소중한 꺼지지 않은 불빛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농민은 혼자가 아니다, 경찰이 비킬 때까지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3일에 막차타고 튀어왔는데 오늘 첫차타고 왔다"는 한 여성은 "오늘 종합감기약 꼭 드시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어제 밤부터 자리를 지켰다는 부산의 대학생은 말했다. "어제 첫차타고 광화문 집회에 갔다가 남태령에 왔습니다, 밤새 얼어죽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에게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도 안 나서는데 왜 너가 가노', 아무도 안 나서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여 있습니다. 와 나여야 하냐고 하셨죠. 내가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흥에서 서울로 유학 온 대학생'이라는 여성도 마이크를 잡았다.
"저희 아버지도 농사를 지으십니다. 저 비싼 농기계를 못 사서 남의 집에 부탁하고 다니던 저희 할아버지를 보다 못해 저희 아버지가 물려받아서 20년 되도록 농사 짓고 계십니다. 트랙터가 얼마나 비싼지 아십니까. (몰라요) 트랙터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앙기, 콤바인, 다 사려면 집안 거덜나 부러요. 근데, 지금!, 여기서 트랙터 바퀴 다 문대불고, 이 아스팔트 위에서 기름 다 버리고, 저 경찰들, 추접해서 살겄습니까.
제가 저희 아버지 농사 옆에서 보면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다들 피뽑기를 아십니까? 헌혈이 아닙니다(웃음). 쌀농사를 짓다보면 논에 벼랑 같이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위하는 척, 질서를 유지하는 척 하지만, 결국 시민들을 가로막는 저 경찰관, 시민을 탄압하는 자들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벼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이 피를 뽑고, 또 뽑고, 농약도 잔뜩 쳐야 우리가 맛있게 먹는 쌀을 키워낼 수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계속 농사지으시면서 제가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농민들의 해방세상 만들어낼 수 있도록, 여러분도 끝까지 함께 해주십시오!"
'4년 전 돌아가신 농민운동가 신용범의 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신우리씨도 무대에 올랐다.
"아빠, 보고 있어요? (일동 환호) 아빠가 원하던 농민 해방세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큰 환호) 저희 가족은 요즘 시위에 참가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여러분들을 보며 아빠가 살아있다면 저 트랙터를 몰고 참 기뻐하셨을 거라고 저희끼리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어젯밤 정말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아빠를 생각하며 여기 나왔습니다. 앞서 가신 아빠를 따르려고 나왔습니다. (일동 큰 환호) 여러분, 저희 아버지가 꿈꾸던 농민해방세상, 함께 해 주실 거죠? (일동, 네) E-스포츠 한화생명을 응원하고 있는데 시국선언 내용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린 민주주의를 응원한다. 응원과 연대는 그 형태가 닮아있다. 그것은 행위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 우리는 또다른 승리를 위해 연대할 것이다.'"
22일 오후 4시, 이들은 곧 트랙터와 함께 사당역까지 행진을 시작한다. 사당역부터는 지하철을 이용해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한다.
[1신 : 오전 11시 57분]
트랙터 밤샘 시위 "반드시 남태령 고개를 넘어 대통령 관저로 향할 것"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를 경찰이 막아선 지 22시간(22일 오전 10시 기준)이 지났다. 전농은 22일 기자회견을 열고 "반드시 남태령 고개를 넘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전농은 남태령역 앞에서 오후 2시 '시민대회'를 예고하며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전농은 이날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열고 "반드시 남태령 고개를 넘어 대통령 관저로 향할 것"이라며 "사회 대개혁 실현하여 새로운 세상의 씨앗을 심으려는 농민의 발걸음을 경찰은 막지 말라"라고 촉구했다. 이어 "오늘(22일) 오후 2시, 남태령 앞에서 윤석열 체포 구속-농민 행진 보장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라며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라고 호소했다.
앞서 전농은 전날 오전 9시 경기도 수원시청에서 트랙터 35대와 화물차 60여대를 끌고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출발했다. 정오 경 경기도 과천 남태령 고개를 넘어가기 직전 경찰의 차벽에 막혔고, 이후 시위에 돌입한 상황. 이 같은 현장이 SNS 등을 통해 공유되자,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밤새 현장에 함께 했다.
주최 측은 오전 10시 현재 3000여 명의 시민이 모인 것으로 추산했다. 영하 3도의 추위 속에 시민들은 "차빼라"를 외치며 현장을 지키고 있다.
"윤석열 체포 위해 한남동으로 갈 것"
하원오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전남-경남을 돌고 서울로 입성했지만 남태령에 막혀 있다"라며 "윤석열을 체포하기 위해 한남동으로 갈 것"이라고 외쳤다.
하 의장은 "윤석열이 국회에서 탄핵됐지만 아직 동조세력은 그대로 있다"라며 "다 처벌해서 우리가 바라는 사회대개혁으로 가야 한다, 전봉준 트랙터는 기필코 한남동으로 가서 윤석열을 끌어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의 공동대표는 "계엄군의 장갑차와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가 대비되는 모습이다, 트랙터는 주권자 국민의 저항의지의 중요한 상징"이라며 "내란수괴 앞잡이 경찰들이 버스로 길을 막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교통을 방해하게 됐다, 힘을 합쳐 한남동까지 행진해 '방빼라'를 외치자"고 촉구했다.
강새봄 전국대학생넷 대표는 "우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권력을 사사로이 여기는 사람들을 처단하기 위해 나선 것"이라며 "지금 트랙터가 여기 와있다는 건 전국 방방곡곡 산과 들 강에 윤석열 체포, 내란동조 세력 처단 목소리가 퍼져있다는 것이다, 청년 학생들은 농민들과 연대할 것"이라고 목소리 높였다.
전농은 기자회견을 통해 "동짓날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시민들의 뜨거운 마음에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린다"라고 말했다. 이어 "농민 트랙터가 서울에 진입하자마자 경찰은 버스로 길을 봉쇄했다, 교통불편으로 공무 이익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라며 "적법한 절차에 따라 신고된 행진을 경찰이 자의적으로 막았다, 계속 내란을 자처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전농은 "공무 이익을 침해한 자가 윤석열이다, 농민의 트랙터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한남동을 향해 진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을 20대 여성이라 소개한 한 참가자는 기자회견 후 연단에 올라 "소식을 듣고 급하게 이 곳에 오신 분들 많은 것"이라며 "경찰이 찬 길거리에 시민을 가두는 동안 한밤중에 이 곳에 모여 힘을 합쳤다"고 말했다. 그는 "밤새 참가하신 분들과 바통 터치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이 이 곳으로 오고 있다"라며 "그리고 압도적 비율로 이 곳을 채운 2030 여성들을 보았다"라고 소리 높였다. 그는 "나라는 여성들을 지켜주지 않았지만, 여성들은 나라를 위해 이 추운 겨울 밤 너나할 것 없이 남태령에 모였다, 너무 자랑스럽다"라며 "우리는 승리한다"라고 외쳤다.
연설을 듣고 있던 참가자들은 "감사합니다"라고 호응했다.
https://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506267
"함께 싸웠더니 함께 이겼다" 동지가 된 사람들, '트랙터 상경투쟁'을 승리로 이끌다 (노동과세계, 조연주 기자, 2024.12.23 12:01)
무박2일 '남태령 대첩' 현장스케치
동지가 됐다.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12월 21일 동짓날, 가장 긴 밤을 함께 보내면서 농민들과 시민들은 동지가 됐다. '2024년 우금치 전투'였던 '남태령 대첩'은 연대로 투쟁한 민중들의 승리로 끝났다.
21일 저녁, 윤석열을 규탄하기 위해 농민들이 꾸린 '전봉준투쟁단'이 서울을 진입하지 못하고 경찰의 일방적인 탄압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SNS를 통해 퍼졌다. 소식을 듣고 남태령역을 찾은 1000여 명의 시민들과 농민들은 "차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폭력적인 탄압의 현장을 밤새 사수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광화문 대규모 집회 참석자들이었다. '막차는 끊기고 첫차는 뜨지 않은' 시간에도 전농 유튜브 채널 라이브 방송을 통해 온라인으로 함께한 시청자는 2만여 명에 이른다.
22일 오전, 간밤의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남태령으로 빠르게 모여들었다. 차벽을 맞서고 트랙터와 화물차가 줄지어 서 있고, 그 뒤에 시민들의 대오가 들어섰다. 민주노총의 깃발도 일찌감치 올라갔다. '남태령 2번출구'로 방호물품과 후원물품, 배달음식을 배달하는 오토바이도 쉴 새 없이 왕래했다. 현장에 오지는 못했지만, 밤새 싸운 이들의 저체온증을 우려해 시민들이 대절한 '난방버스'는 무려 8대나 됐다. 농민들의 '트랙터 투쟁'을 엄호하러 나선 3만 여명의 시민들이 조금씩 조금씩 과천대로를 채우며 광장을 만들어갔다.
1500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모여 만든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10시 기자회견, 14시 시민대회 일정을 긴급하게 잡아 개최했다. 또한 경찰이 차벽을 치고 겁박하는 행위는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 및 결사의 자유, 일반적 행동의 자유권 등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취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를 신청했다.
22일 오후, 경찰이 차를 뺄 때까지 자칫 지난할 수도 있었던 시간을 한층 더 깊은 연대의 장으로 만들어낸 것은 시민들의 발언들이었다. 자유발언을 위한 시민들의 줄은 끝없이 이어졌다. 아침부터 줄을 선 시민들은 5~6시간을 기다린 끝에 발언대에 올랐다. 많은 발언자가 자신이 성소수자, 장애인, 호남 출신을 밝히는 등 스스로가 사회적 약자·소수자임을 드러냈다.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씩 말할 때마다 위로와 연대가 담긴 박수가 나왔다. 어색하게 외치던 '투쟁!' 구호와 '동지'라는 단어는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이들은" 우리가 만난 지금, 광장에서 동지가 된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끝없이 연결돼 있음을 확인했다며 연대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우리가 가장 어두운 시기 가장 밝은 응원봉을 꺼내고 거리로 나온 것처럼, 농민들도 가장 소중한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온 것 아니겠냐. 우리는 같은 마음이다"는 발언을 경청하던 어느 농민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농민을 비롯한 이 땅의 차별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광장에서 이들은 춤췄고, 노래했고, 발언했고, 울었고, 웃었다.
경찰에 의해 가로막힌 상경투쟁길이 22일 오후 5시께 열렸다. 앞서 사회자가 "경찰이 차를 뺀다고 한다"며 승리를 선언한 순간 환호가 터져 나왔다. 32시간 만에 트랙터가 시동을 걸자 "우리가 이겼다. 함께 싸워 승리했다"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농민들은 알고 있었다. 시민들이 연대하지 않았더라면, 땅끝에서부터 트랙터를 몰고 오다가 법적 근거 없이 가로막히고, 진압당했을 것이며, 자칫하면 연행 또는 구속당할 것이었다. 농민들에 대한 경찰들의 '천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경찰의 폭력이 잦아들기 전이었던 21일 오후 10시 30분,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조합원 두 명은 간밤에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가하려다가 경찰에게 연행됐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관악서에 구금 중이다.
남태령 대첩 전선이 펼쳐진 바로 옆은 수도권방위사령부로, 윤석열의 내란(계엄)이 성공했다면 수많은 시민을 가둬놓았을 벙커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긴 밤 2030 여성들을 주축으로 한 시민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투쟁은 벌써 진압됐을 것이라고 농민들은 입을 모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행된 경찰의 노골적인 멸시와 진압은, 시민들이 밤을 사수하고 결집하자 그 폭력과 통제의 수위를 낮춰갔다. 해가 뜨고 더 많은 이들이 남태령에 모이자, 경찰들은 이내 자신들이 쳐놓은 차벽 뒤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추운 날씨에 이미 광화문 집회를 마친 뒤 발걸음한 시민들을 반기면서도, 동이 틀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는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농민들의 투쟁에 나서주는 건 전례 없는 일"이라며 한 번 더 고마움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견고했던 경찰들의 차벽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보자 감탄과 눈물과 환호가 뒤섞여 나왔다. 트랙터와 시민들이 사당역까지 함께 행진했다. 130년 전 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넘지 못했던 우금치 고개 기억하던 농민들이, 시민들의 손을 잡고 2024년 남태령 고개를 넘는 순간이었다.
"경찰 차뺐다, 윤석열은 방빼라" 사당까지 행진한 뒤 시민들은 윤석열 관저 인근인 한강진역으로 집회 장소를 옮겨 계속 구호를 외쳤다. 트랙터가 마침내 도착하자 트랙터 행렬을 뜨겁게 환영하며, 승리를 만끽했다. 이들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의 힘으로 윤석열을 끌어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광장을 만들고, 연대하고, 투쟁할 것"이라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결의했다.
가장 어두운 날을 함께 보내며 동지가 된 민중들이 함께 맞는 다음날은, 어제보다 조금 더 많은 볕이 들고 있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91078
트랙터 시위대 총대장 "시민들 '경찰 차 빼' 구호에 눈물...이런 적은 처음" (오마이뉴스, 24.12.23 15:44 l 김성욱(etshiro))
[스팟인터뷰] '남태령 연대'로 28시간만에 경찰 차벽 뚫은 하원오 전농 의장
"6박 7일 동안 잘 오다가 서울 넘어가는 남태령 8차선 대로에서 갑자기 경찰이 차 벽을 세우고 트랙터를 막아서는 바람에 대치를 하게 된 건데, 길이 통제되니까 승용차나 버스에 탄 일반 시민들도 하나 둘 씩씩거리시면서 내리는 거예요. 아, 우리는 시민들이 우리한테 욕하려는 줄 알았죠. '농민들이 왜 시위를 해서 차 막히게 하냐' 할 줄 알았죠.
근데 시민들이 우리한테 항의를 하는 게 아니고, 경찰들한테 가서 '지금까지 한 줄로 잘 가시던 분들을 왜 막고 난리냐', '경찰들 빨리 차 빼라'고 마구 소리를 치시는 거예요. 이번에 유명해진 '차 빼' 구호가 거기서 처음 나온 겁니다. 시민들이 먼저 외친 거죠. 내 나이 곧 칠순인데, 그때 막 눈물이 날라 카대요."
하원오(68)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이틀 전인 지난 21일 낮 12시 서울 남태령 상황을 회상하며 다시 한번 울먹였다. 하 의장을 비롯한 농민 100여 명은 12·3 내란 사태를 벌인 윤석열 대통령 체포를 외치며 트랙터 30여 대, 화물차 50여 대를 끌고 지난 16일 전남 무안과 경남 진주를 출발해 무려 엿새 만에 서울 도착을 앞둔 상태였다.
시속 30킬로미터 트랙터를 타고 6박 7일간 300킬로미터 넘는 길을 달려온 농민들은 경기도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남태령 경계에서 멈춰서야 했다. 트랙터 시위대의 총대장을 맡은 하 의장은 "경기도까지는 신호도 잡아주고 잘 인도하던 경찰이 서울이 되자마자 예고도 없이 '교통 혼잡이 우려된다'며 차 벽을 세웠다"라고 했다. 일부 농민이 트랙터를 몰고 경찰차 벽으로 돌진하겠다며 항의하자, 경찰은 트랙터의 창문까지 깨고 농민을 강제로 끌어냈다.
서울을 코앞에 두고 발길이 묶여버린 농민들을 지켜낸 건 시민들이었다. 하 의장은 "남태령 도로에서 우릴 본 시민들이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어 SNS에 올리기 시작하더니, 저녁부터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라고 했다. 그날 남태령 고개에 오른 1000여 명의 시민들은 영하 6도의 추위 속에 농민들 곁에서 밤을 지새웠다. 각종 SNS에 이 광경이 생중계되자 수많은 시민들이 핫팩과 따뜻한 커피, 설렁탕, 팥죽, 햄버거들을 남태령으로 사 보내 연대했고, 경찰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감시했다. 이윽고 날이 밝자, 응원봉을 들고 남태령에 모인 시민들은 3만여 명까지 불어났다.
이튿날 오후 4시, 경찰은 결국 남태령 대치 28시간 만에 차 벽을 열었고, 협의 끝에 농민들이 탄 트랙터 30여 대 중 10대는 윤 대통령 관저 근처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한강진역까지 닿을 수 있었다.
하 의장은 "내 평생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농민들과 함께해준 젊은 여성분들, 시민들이 눈물나게 고맙다"고 했다. 하 의장과 23일 오전 통화할 수 있었다. 이틀간 밖에서 몸을 떤 하 의장의 목소리는 심하게 쉬어있었다.
"겨울 밤 남태령 와준 젊은 여성들… 약자와 같이 행동하겠다는 마음 느껴"
- 21일 밤새워 남태령을 지키고, 차 벽을 뚫으라며 "차 빼"를 외친 주축은 20대 여성들이었다.
"정말 꿈에도 상상 못한 일이었어요. 지금까지 우리 농민들 집회에 그렇게 젊은 분들이 같이 오시거나 한 적이 없었어요. 그 추운 날 밤에 제 손녀뻘 되는 젊은 분들이 밤을 새워 응원봉을 들고 '차 빼'를 외친다는 게… 참 눈물이 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날 여러 시민 분들이 계셨지만, 그 중에서도 20대 젊은 여성분들이 많았다는 건… 아마 사회적 약자에 대해 같이 행동하겠다는 마음들이 컸던 게 아니었나 싶었어요. 농민들은 그동안 사실 소외돼 있었잖아요. 시골에 멀리 있고. 만약 그날 밤 시민들이 안 계셨으면, 아마 저희 농민들은 다 연행됐을 겁니다. 겨우 100명밖에 안 되는 대오였으니까요... 다들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고…"
- 대치 28시간 만에 경찰차 벽이 뚫렸다.
"지금까지 숱하게 시위를 해봤지만, 이런 적은 저도 처음입니다. 사실 우리 농민들은 별로 힘쓴 것도 없어요. 시민들이 뚫은 거였죠. 남태령 그 고개가 찾아오기도 참 사나운 길이던데. 못 오신 분들은 각종 물품을 넘쳐나게 보내주시고. 다 젊은 분들 힘 같아요. 차 벽이 열리니까, 시민분들이 또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사당역까지 걸어서 같이 가주시고, 다시 지하철 타고 한강진역까지 오셨더라고요. 정말 깜짝 놀라고 감동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이번에 윤석열 계엄과 탄핵 과정에서도 봤지만, 겉으로는 정치인들이 정치를 하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진짜 세상을 바꾸는 것은 민중들이구나. 농민이고 여성이고 약자들이구나. 이런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 트랙터는 농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 가운데 하나 아닌가.
"옛날로 치면 소죠. 농민들한테 최고로 필요한 재산입니다. 농민들이 트랙터를 걸었다는 건 실상 가진 걸 다 걸었다는 거죠. 근데 그걸 막았으니… 6박 7일 왔으니까 바퀴도 많이 상했을 거예요. 서울까지 트랙터를 끌고 온 농민들의 심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요. 저도 창원에서 나락 농사(벼 농사)랑 하우스 채소 농사를 짓는데, 전농 의장 한다고 하우스 채소는 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내도 내색은 안 하지만 걱정이 많겠죠.
어제 한남동 집회를 마치고 농민들은 다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저도 어젯밤에 뻗어버려서 다들 잘 도착했는지 확인도 못 했네요. 트랙터들은 아직 서울에 있어요. 남태령 차 벽 피해서 움직이던 트랙터 3대는 동작대교에 아직 세워져 있을 거고. 동작대교 건너 한남동까지 갔던 10대는 여의도 둔치 주차장에 있을 겁니다. 트랙터로 돌아가려면 또 너무 오래 걸리니까 화물차로 옮기든 해야겠죠. 어제 어떤 농민들은 여의도에 트랙터 대놓고 너무 피곤해서 그냥 여의도 근처에 방을 잡고 쓰러졌대요."
- 한강진에 돌아오던 트랙터에는 '국민의힘 해체, 윤석열 체포' 외에도 '농민헌법 쟁취'란 구호도 걸려있었다. 무슨 뜻인가.
"예컨대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이나 노동권을 법으로 보장받지만, 농민들은 기본적인 권리를 법으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어요. 농민들에게도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특히 윤석열 정부는 농민들을 완전히 무시했죠. 양곡관리법을 포함해 농민 4법을 다 거부했습니다. 여기에는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친 해에 농민들을 보호하는 내용도 담겨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올해 사과 한 개가 만원, 배추 한 포기가 만원이라고 정말 난리가 났었죠. 근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농가가 다 망했다는 겁니다. 올해 기상 이변으로 농가들이 정상적으로 농작물을 생산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 그만큼 수확 물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값이 비정삭적으로비싸진 겁니다. 그럼 농민들이 그만큼 벌었나? 농가에 한 번 가보세요. 열 집이 농사 지었으면 아홉 집은 망했고, 한 집만 겨우 살아남았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그런데 윤 정부는 애초에 농가가 망해가는 건 방치해 놓고는, 그 결과 농산물 가격이 오르니 농민들이 마치 물가 전체를 올린 주범인 양 몰아갔어요. 아니 어디 농산물만 값이 올랐습니까? 모든 물가가 다 올랐는데. 농민들이 제일 만만한 거죠. 겨우 살아남은 10%의 농가들도 비료 값, 사료 값, 기름 값 오른 것 제하면 남는 게 없어요. 그런데 정부는 농산물 가격 내리라고 농민들만 압박했죠. 이러니 참다 참던 농민들이 터진 겁니다. 사실 농민들은 지금까지 많이 외롭고, 억울했습니다.
그런데 어제와 그제, 남태령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우리 농민들이 그걸 다 위로받고도 남을 인생의 경험을 했습니다. 젊은 여성분들이, 시민분들이 혹한의 밤에 모여 농민들의 어려움을 함께해 주고, 또 억울함을 풀어줬습니다. 마음뿐 아니라 몸으로 행동해 주시고, 후원으로 관심을 보내주셨습니다. 농민들도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에 우리도 사는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해줘서 진짜 고맙습니다. 사실 시골 가면 밤 되고 해 떨어지면 아무도 못 보거든요. 어제 농민들이 전부 다 '살다 살다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호응해줄 줄은 몰랐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울면서 돌아갔습니다.
게다가 남태령에서 보낸 밤이 동짓날이었잖아요. 그 긴긴밤, 1년 중 제일 긴 겨울밤에 달려와 주신 분들 모두 고맙고 감사합니다. 덕분에 외롭지 않았고 감동했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달리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네요."
농민들이 경찰차 벽에 막히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21일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절기, 동지였다. 동지가 지나면 밤은 조금씩 짧아진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231632001
2030여성은 왜 남태령 대첩에 모였나 (경향, 오동욱 기자, 2024.12.23 16:32)
지난 16일 전라·경남에서부터 시작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전국여성농민회총연맹(전여농)의 ‘세상을 바꾸는 전봉준투쟁단 트랙터 대행진’이 21일 서울 남태령 고개에서 막혔다. 경찰은 농민을 에워쌌다. 경찰 차벽을 세우며 트랙터를 고립 상태로 만들었다. 차벽을 두고 대치가 이어졌다. 이날 오후 전농 시위를 주최한 전봉준투쟁단은 시민들에게 긴급호소문을 전파했다. “시민 여러분, 남태령 고개로 모여주십시오.”
현장에 가장 발 빠르게 참여한 집단은 ‘2030 여성’이다. 농민 집회와 거리가 먼 것 같은 이들은 왜 남태령을 향했을까. 22일 시위 현장에서 만난 여성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소식을 공유”하고, “커뮤니티에서 키운 정의감을 바탕” 삼아 “내 편을 지키고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기꺼이 응원봉을 들고 남태령역을 향했다고 말했다.
“라방(라이브 방송)에 상상할 수 없는 장면들이 나왔다.”
경기도 안양시에서 온 회사원 엄승원씨(32)는 “(21일 밤에) 한숨 자고 나면 모든 일이 다 끝날 줄 알았다”고 말했다. 농민 트랙터가 경찰 차벽을 허문 뒤 광화문에 도착할 줄 알았다. 동생 엄승윤씨(30)가 “가야 하는 것 아냐?”라는 물음에 “내일 아침에 다시 보자”고 달랬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엄씨가 22일 아침 유튜브 라이브방송과 X(구 트위터)에서 본 건 “2024년에 상식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폭력적 장면들”이다. 트랙터 유리창이 파손됐다. 경찰은 집회 참가자를 연행했다. 견고한 차벽에 막힌 시민들이 길 위에 떨고 있었다. 그는 “집회 ‘신고’도 돼 있고 차선 하나만 내주면 되는 일인데 경찰이 길을 막는 게 과연 합법적이냐”며 “화가 치밀어 부랴부랴 (남태령역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인천 서구에 사는 강채원씨(33)도 엄씨와 같은 마음으로 남태령역을 향했다. 강씨는 “X로 현장 영상을 본 뒤 밤새 라이브 방송을 보다 첫차를 타고 남태령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인 2008년 미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대학생 때인 2016년 박근혜 탄핵 집회를 거치며 시위 인원이 많을수록 진압이 폭력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했다고 했다. 그는 “살수차에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신 일이 마음의 빚”이라며 “어떻게든 농민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삼십대 여성의 높은 시위 참여도는 ‘덕질’(팬 활동)로 단련된 트위터 등 SNS 활용능력 덕분이라고 했다. 덕질을 위한 플랫폼인 트위터 특성상 소식을 더 빨리 접했다고 말한다.아이돌 그룹 플레이브 팬인 강씨는 “이삼십대 여성이라면 사실 한 번쯤을 덕질을 했을 것”이라며 “내 가수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에서 노래하길 바라서 다들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커뮤(온라인 커뮤니티)는 덕질뿐만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함을 꺼내고 나누는 곳”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는 정모씨(20·2학년)와 신연수씨(21·3학년)는 22일 오후 7시쯤 서울 용산구 한강진역 인근에서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있었다. 몸에 크리스마스 장식용 전구를 두르고 있던 정씨는 “크리스마스가 3일밖에 안 남아서 기분을 제대로 즐기고 싶었다”며 ‘인간 트리’를 자처한 이유를 밝혔다.
이들은 이삼십대 여성의 연대감이 트위터나 커뮤니티에서 키워온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정씨는 “커뮤니티와 트위터는 덕질만 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를 꺼내고 나누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커뮤니티와 X를 통해 사회적 의견·정보를 공유하면서 나름의 정의감을 키운다고 설명했다.
신씨는 이날 트위터에 공유된 남태령 고개 사태도 하나의 사례로 꼽았다. 신씨는 “원하는 것이 조금씩은 다를 수 있어도 비상계엄은 잘못됐다는 것, 윤석열 탄핵을 바라는 뜻은 같다”며 “저희 편이 공격당하는데 가만있을 수 있냐”고 말했다. 이어 “남태령 전까지는 농민들이 경찰의 엄호를 받으며 행진을 했는데, 서울 경찰만 특별히 남태령에서 이들을 제지했다”며 “부조리한 공권력 사용을 참지 못하고 나온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두려울수록 더 나와야 한다. 함께하면 덜 무서우니까”
‘행운을 주는 검은 고양이 연합’ 깃발을 들고 남태령 대첩에 참여한 성윤서씨(22)는 “이번에는 시위에 나가면 정말 다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차벽을 좁히고 있다’ ‘진압 강도가 이전과 다르다’는 소식이 X를 통해 이어졌다고 했다. 성씨는 “두려울수록 오히려 더 시위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 남태령역에 왔다”고 말했다. 현장에 나와야만 함께하는 사람들을 눈으로 보고, 그제야 두려움을 떨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깃발을 들고 선 남태령역 4번 출구 주변에는 성씨처럼 두려움을 떨쳐내려는 이삼십대 여성들이 많았다. 그는 이들 여성의 높은 시위 참여도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저는 젠더퀴어라서 이삼십대 여성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사실 이삼십대 여성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었다”며 “유독 이삼십대 남성이 안 보이면서 이제야 보이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성씨는 이어 “여성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다양한 소수자들이 있다”며 “늘 거기 존재했는데 가려졌던 사람들이 더 도드라지는 게 어쩌면 이번 시위의 특징일 거 같다”고 말했다. 시위는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는 곳이고 지금 상황은 소수자일수록 쌓인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봤다. 장애인 이동권, 성 소수자 인권 등 윤 정부 들어 소수자 기본권이 더 퇴보했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성씨는 “시위에서 드러나는 사람의 면면이 다양해졌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진보한 것”이라며 “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해 가려져 있는 사람들이 주목받길 바란다”고 말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231654001
트랙터 전면 금지, 차벽 설치까지···경찰의 위법한 ‘남태령 시위’ 차단 (경향, 강한들 기자, 2024.12.23 16:54)
지난 21일 윤석열 대통령 구속 등을 촉구하며 트랙터를 타고 상경 시위에 나선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시위대를 경찰이 서울 서초구 지하철 남태령역 인근에서 여러 겹의 ‘차벽’으로 차단했다. 경찰은 32시간 밤샘 대치를 벌인 다음 날 오후 4시 30분쯤 기동대 버스를 철수시켰다. 전문가들은 기존 판례, 헌법재판소의 결정 등으로 비추어 보아 경찰이 공권력을 위법하게 남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입을 모았다.
경찰은 행진 신고 날짜 하루 전인 20일에야 전농에 ‘옥외집회(행진) 제한 통고서’를 보냈다. 통고서를 보면 경찰은 ‘트랙터와 화물차의 이용은 불가’하고, ‘행진이 아닌 집회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행진 경로 대부분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상 ‘주요 도로’이고, 화물차·트랙터가 행진할 경우 교통 불편이 야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호영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2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 회의에 출석해 “트랙터가 들어오는 것에 대한 일부 제한은 실무상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서울행정법원 제3부(당시 재판장 박성규 판사)는 2017년 종로경찰서의 옥외집회·행진 금지 통고 처분을 취소했다. 법원은 “경찰서장은 집회·시위의 금지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해서 전면적으로 금지할 것이 아니라, 집회 또는 시위의 방법 등을 일부 제한하는 등 집회·시위와 공공의 안녕질서가 조화를 이룰 방법이 있는지 검토해 재량을 행사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경찰은 ‘재량권 범위 내 처분’이라고도 주장했지만 법원은 “재량은 행정청의 자유가 아니라 의무”라며 “재량에 담긴 의무 불이행은 처분의 위법 사유”라고 판단했다.
전문가들은 경찰의 집회 제한 통고와 집회 통제가 위법하다고 봤다. 최석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집회·시위 인권침해감시 변호단 변호사는 “남태령역 앞은 집시법상 ‘주요 도로’도 아니다. ‘제한 통고’였지만 사실상 트랙터 시위 자체를 금지한 통고”라고 말했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트랙터가 한 차로에 이동한다고 차량 소통에 심각한 지장을 준다는 것은 전날 서울 지하철 한강진역까지 트랙터가 운행한 것만 봐도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전농 시위대 앞뒤로 차벽을 설치한 점도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청장이 2009년 경찰 버스로 서울광장을 둘러싸며 통행을 제지한 조치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2011년 명백한 불법·폭력 집회의 위험성이 있었다고 할 수 없고, 일반 시민 통행까지 제한돼 경찰이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전날 시위 현장에 있었던 김은진 변호사는 “경찰은 시위대 앞뒤로 차벽을 세워서 일반 차량·시민이 지원한 난방 버스의 소통도 막았다”며 “이동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이 ‘시민을 보호한다’는 기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박 변호사는 “집회 제한 통고에 따라서 시위대를 막는다고 하더라도, 시민들이 고립돼서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경찰의 역할”이라며 “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담요를 뺏으려고 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던 것을 고려하면 보호를 하지 않은 것을 너머서 적극적으로 방해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36484&ref=A
[경제 핫 클립] 농민과 트랙터의 ‘남태령 대첩’…이번엔 달랐던 이유 (KBS, 2024.12.23 18:12)
130년 전 겨울, 녹두 장군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들은 공주 우금치에서 여정을 접어야 했습니다. 촛불이 전국을 뒤덮을 때마다 농민들은 트랙터를 끌고 광화문으로 향했지만 번번이 서울 길목에서 저지당했죠.
그리고 지난 주말, 트랙터 부대가 다시 한번 서울 입성을 시도했는데요. 이번엔 좀, 달랐을까요?
토요일 남태령으로 가 봅니다. 트랙터로 전국을 누비고 올라온 전봉준 투쟁단. 서울 초입, 남태령에서 마주한 건 경찰 차벽이었습니다. 트랙터 창문이 부서졌고, 몸싸움도 벌어졌습니다.
농민들은 '2024년 우금치 남태령으로 달려와 달라', '이번에는 넘고 싶다'며 호소문을 띄웠고 시민들은 응답했습니다.
["차 빼라! 차 빼라!"]
밤샘 대치가 이어졌습니다. 영하의 추위, 아무것도 없는 아스팔트 한복판이었지만, 사람들이 보낸 마음 덕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커피며 죽, 핫팩, 귀마개 배달이 끊이지 않았고 추위를 잠시 피할 버스들이 속속 도착했죠.
'엄마 딸 오늘 안 들어가', 농민이 건넨 사과를 받아 든 시민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밤을 새우고서야 첫차를 타고 온 시민들과 교대했습니다.
[송건희/경기 안양시 :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상황이) 진전되지 않았다고 알게 돼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박현진/경기 부천시 : "어떻게든 미약한 힘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나오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언론, 변호사 단체, 국회의원들을 압박해 움직이게 했고…
경찰은 결국 트랙터 10대에 한해 길을 터 주기로 합니다. 트랙터는 응원봉에 둘러싸여 일요일 늦은 저녁 윤 대통령 관저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남태령에서 용산까지 꼬박 28시간이 걸렸습니다.
농민들은 외롭지 않은 싸움은 처음이라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하원오/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 "동지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제가 동지라고 불러도 괜찮지요? 농민들이 맨 앞에서 투쟁하겠습니다. 화이팅!"]
이들이 목 놓아 외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농민들이 130년 만에 다시 들고 온 '폐정개혁 12조'엔 윤 대통령 처벌로 시작해 식량 주권 실현, 노동권 보장, 차별 없는 사회 등이 담겼습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231815011
[여적] 남태령 대첩 (경향, 손제민 논설위원, 2024.12.23 18:15)
1894년 12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보국안민(輔國安民)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가는 길이 가로막혔다. 공주 우금치라는 고개였다.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의 화력에 맞서기에 중과부적이었다. 많은 농민들이 눈밭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그로부터 꼭 130년이 흐른 지난 21일 밤, 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조직한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30여대와 화물차 50여대가 경찰 차벽에 가로막힌 곳은 서울 남쪽의 남태령이라는 고개였다. 농민들은 양곡관리법이 이 정부하에서 두 번이나 거부된 농업 홀대에 항의하고 ‘내란 수괴 윤석열 체포’를 촉구했다. 경찰은 ‘서울 교통에 혼란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대통령의 거짓 출근차량에 협조하며 출근길 교통 체증을 유발한 공범인 경찰이 할 말은 아니었다. 경찰은 8년 전 박근혜 탄핵 때도 똑같이 행동했다. 농기계를 몰고 상경하려던 농민들은 그때도 서울 진입로에서 가로막혔고, 강경 진압을 당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농민과 경찰의 대치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났고, 밤새 현장 생중계를 지켜보며 응원을 보낸 이도 많았다. 강추위 속 배달 오토바이가 커피·어묵·방한용품 등을 시위 현장에 실어날랐다. 우리는 지난 3일 밤 국회의 경험을 통해, 공권력은 누군가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대로 폭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경찰은 32시간 뒤인 이튿날 오후 차벽을 열었다.
‘남태령 대첩’을 만든 것은 응원봉 들고 농민과 연대한 청년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같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우리의 밥과 채소, 고기를 만들지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농민의 열악한 처지를 새삼 자신들과 연결짓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12·3 내란 사태 이후 광장에서 부쩍 주목받지만, 실은 언제나 스스로의 삶터에서 고투하고 있었다. ‘중장년 고학력 비장애 이성애자 남성’ 언론과 정치의 시선이 닿지 않았을 뿐이다. 남태령 대첩은 그 당사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이 공동체를 바꿔가겠다는 선언이다. 대통령 하나 바꾸자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232208005
“경찰 폭력적 진압에 분노…어떻게든 농민 도우려 달려갔다” (경향, 오동욱 기자, 2024.12.23 22:08)
‘남태령 대첩’서도 확인된 2030 여성·소수자 연대
‘덕질’로 단련된 SNS 활용력
부조리 안 참는 정의감 공유
“늘 있었지만 이제야 보인 것
가려졌던 존재 지우지 말길”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 농민단체들이 주도한 ‘세상을 바꾸는 전봉준투쟁단 트랙터 대행진’이 지난 21일 서울 남태령에서 막혔다. 경찰은 농민을 에워싸고 차벽을 세우며 트랙터를 고립시켰다. 이날 오후 전봉준투쟁단은 시민들에게 긴급호소문을 전파했다. “시민 여러분, 남태령 고개로 모여주십시오.”
현장에 가장 빠르게 참여한 집단 중 하나는 ‘2030 여성’이었다. 농민 집회와 거리가 멀 것도 같은 이들은 왜 남태령으로 향했을까.
22일 시위 현장에서 만난 여성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소식을 공유”하고, “커뮤니티에서 키운 정의감을 바탕” 삼아 “내 편을 지키고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기꺼이 응원봉을 들고 남태령역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집회에 참석한 회사원 엄승원씨(32)가 22일 오전 유튜브 라이브방송과 엑스(옛 트위터)에서 본 것은 2024년에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적 장면들이었다. 트랙터 유리창이 파손되고 경찰은 집회 참가자를 연행했다. 차벽에 막힌 시민들이 길 위에 떨고 있었다. 그는 “집회 신고도 돼 있고, 차선 하나만 내주면 되는데 경찰이 길을 막는 게 과연 합법적이냐”며 “화가 치밀어 부랴부랴 (남태령역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인천 서구 강채원씨(33)도 엄씨와 같은 마음으로 남태령역으로 향했다. 강씨는 “고등학생 때인 2008년 미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대학생 때인 2016년 박근혜 탄핵 집회를 거치며 시위 인원이 많을수록 진압이 폭력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했다”면서 “어떻게든 농민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이들은 20~30대 여성의 높은 시위 참여도가 ‘덕질’(팬 활동)로 단련된 SNS 활용 능력 덕분이라고 했다.
또 20~30대 여성의 연대감은 엑스나 커뮤니티에서 키워온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는 정모씨(20)는 “커뮤니티와 엑스는 덕질만 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를 꺼내고 나누는 공간”이라고 전했다. 커뮤니티와 엑스를 통해 사회적 이슈와 의견·정보를 공유하면서 나름의 정의감을 키운다는 것이다.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신연수씨(21)는 이날 엑스에 공유된 남태령 사태를 예로 들었다. 신씨는 “남태령 전까지는 농민들이 경찰의 엄호를 받으며 행진을 했는데, 서울 경찰만 특별히 남태령에서 이들을 제지했다”며 “부조리한 공권력 사용을 참지 못하고 나온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행운을 주는 검은 고양이 연합’ 깃발을 들고 남태령 집회에 참여한 성윤서씨(22)는 “집회에는 여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들도 있다”며 “늘 거기 존재했는데, 가려졌던 사람들이 더 도드라지는 게 어쩌면 이번 시위의 특징일 거 같다”고 말했다.
https://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52133
[사설] 농민-청년 결합 대동세상 역사가 된 ‘남태령 대첩’ (광주드림, 2024.12.24 00:00)
전국 농민들이 “내란 수괴와 부역자를 갈아엎겠다”고 출발한 상경 트랙터 시위가 남태령에서 역사적 신기원을 열었다.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전국 농민들은 내란 수괴 윤석열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차벽 대첩을 이뤄냈다. 특히 이번 시위에는 서울의 수많은 청년들이 함께해 농민과 청년이 함께한 위대한 승리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껏 농민시위는 대중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쌀값 20만 원 보장하라”는 생존권 차원의 농민 외침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광주·전남의 농민들이 16일 무안을 출발할 때만 해도 트렉터 시위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순항하던 트렉터 시위가 서울 남태령에서 저지당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순식간에 정의의 사도와 내란세력 간의 다툼으로 변한 것이다.
영하 10도에 달하는 강추위를 마다않고 청년들이 하나둘 합세하기 시작한 시위대는 어느듯 3만 명에 달했다. 농민과 청년들은 하룻밤을 꼬박 대치했다. 부당한 공권력에 대항해 눈물겨운 항쟁에 돌입한지 26시간만에 남태령 차벽이 열리기 시작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했으니 이를 “남태령 대첩”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남태령 대첩 장면은 5·18의 대동정신과도 맞닿아 있어 주목된다. 추위에 떠는 농민과 젊은이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뜨거운 물과 핫백. 김밥, 커피, 피자 등을 나누는 모습은 5·18때 주먹밥을 나누던 대동세상과 일맥이 닿아 있다. 이번 쾌거는 단지 차벽을 뚫은 것을 넘어 농민과 청년들이 함께해 불의의 차벽을 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해도 부족함이 없다.
남태령 쾌거는 내란 수괴 윤석열에게 국민의 뜻이 어디 있는 지를 똑똑히 보여 주었다. 이미 수명이 다한 정부에게 농민과 청년들은 민심이 천심임을 극명히 보여 주었다. 남태령 대첩은 내란 수괴 윤석열에게는 가슴 서늘한 경고지만 농민과 청년들에게는 너무나 고귀한 승리의 경험이었다. 남태령 대첩은 내란 정국을 헤쳐 나가는데도 큰 분수령이 될 것이 분명하다. 모든 것이 사필 귀정이다. 승리가 머지 않았다.
https://www.nocutnews.co.kr/news/6266699
신세계 열어버린 28시간 '남태령 대첩', 이번엔 무엇이 달랐을까[씨리얼] (씨리얼 신혜림PD, 2024-12-24 13:44)
농민들과 영하 9도의 새벽을 함께 버텨낸 남태령의 시민들
'저기, 여기 전농 맞나요?' 하며 바로 바닥에 앉아
장혜영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시민들의 정치적 감각 열어"
"모든 책임은 농민들이 지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아닙니다! 같이 집시다!"
https://www.youtube.com/watch?v=G8COPd270C4
2024년 12월 21일 토요일 저녁 7시경, 다급한 SOS가 각종 SNS에 올라왔습니다. '2024년의 우금치, 남태령으로 모여달라'. SOS를 친 것은 다름 아닌 농민 조직 '전봉준투쟁단'. 전봉준투쟁단은 2015년 민중총궐기 중 故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쓰러진 데 분노한 전국농민총연맹(전농)과 전국여성농민총연합(전여농) 소속 1,000여 명의 농민이 만든 조직입니다. 전봉준투쟁단이 박근혜 탄핵을 위해 상경 시위를 시도했던 8년 전, 경찰은 서울 길목 양재IC 근처에서 강경 해산 작전을 벌였습니다. 결국 36명의 농민이 연행되고 3명의 농민이 부상을 입은 채 당시 트랙터의 상경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2024년 12월, 8년 만에 윤석열 퇴진 시위를 위해 재결성된 전봉준투쟁단은 지난 16일 또다시 트랙터 대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경남 진주, 전남 무안에서 나눠 출발해 한남동 윤석열 관저로 향하는 6일 간의 일정. 순조롭게 진행되던 시위는 지난 21일, 서울 입성을 코앞에 둔 남태령에서 또다시 가로막혔습니다.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습니다. 각종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소식을 전해 받으며 트랙터 행렬이 서울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대규모 광화문 토요 집회가 있었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농민들의 다급한 SOS를 본 사람들이 각지에서 산골짜기 남태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영하 9도의 새벽, 수많은 시민들 농민들과 함께 밤샘 대치를 했습니다. 트랙터의 서울행을 가로막았던 경찰 버스는 결국 대치 28시간 만에 철수했습니다.
"2030 여성들이 광화문에서 있던 그 복장 그대로 남태령에 와서 '저기, 여기 전농 맞나요?' 막 이러면서 바로 바닥에 앉아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농민) 분들이 너무 깜짝 놀라셨어요." (향연, 10년 차 농부)
남태령에서 구호 물품을 나눠주며 상황을 지켜본 장혜영 정의당 전 의원은 이를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열어낸 시민들의 정치적인 감각'이라고 평했습니다. 탄핵이라는 하나의 의제를 위해서 모여있는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인지 깨달아가며 시민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겁니다.
신세계를 열어낸 '남태령 대첩'.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28시간 동안 대체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씨리얼이 담아낸 7분의 영상에서 바로 확인해 보세요.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74769.html
죽은 자와 위태로운 삶이 만났다, 남태령 이곳에서 [이유진의 바디올로지] (한겨레, 이유진 | 한겨레21 선임기자, 2024-12-25 08:00)
마지막회 _죽음과 부활
2024년 한국을 또다시 계엄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자는 귀를 의심케 하는 이유를 들먹였다. 대통령 윤석열은 레드 콤플렉스라는 이념의 낡은 버튼을 정확히 눌렀다. 국회가 계엄 요구안을 가결한 뒤엔 “2시간짜리 내란이라는 것이 있느냐”고 말했다. 시민들은 ‘탄핵봉’을 흔들면서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광장을 수놓았다. 다 죽어도 나만은 살겠다는 생존 감각은 남도 살리고 나도 살겠다는 공생의 감각을 잠식하지 못했다.
남을 살리고 내가 죽는 길을 택한 이들도 있다. 전태일은 유서에서 남은 이들을 “나의 나인 그대들”이라고 불렀다. ‘12·3 내란사태’ 다음날 오전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한겨레21과 만난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는 “나는 군중 가운데 한명”임을 기억하라며 “상호의존성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했다. 계엄과 내란사태에 맞선 시민들은 이 상호의존성에 대한 신뢰를 여실히 증명했다.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국회로 달려 나가 선두에 선 장년층 시민들은 기꺼이 젊은이들을 위해 자신들의 몸을 총알받이로 쓰려고 했다. “데모하지 마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란 세대의 딸들은 ‘덕질’을 하면서 소중하게 간직해온 응원봉을 닦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내란수괴” “국짐”의 장례를 치러주겠다며 ‘상여투쟁’을 하던 농민들은 며칠 뒤 아끼던 트랙터를 몰고 일주일에 걸쳐 서울로 향했다. 농민들이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의 차벽에 앞뒤로 가로막혀 고립되자, 시민들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시위대에 속속 합류했다. 시위 인원이 다수였을 때 진압이 악랄해지지 않더라며 남태령으로 간 이들 다수가 청년 여성들이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고립시켜 난방 차량을 이용하는 것도 어렵게 했다. 바깥의 사람들은 저체온증을 막는 핫팩과 뜨거운 음식을 끊임없이 전달했다.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이들에게 ‘농민가’를 배우고, 늙은 세대는 청년들의 ‘다시 만난 세계’를 익히고 함께 춤을 추면서 새벽 추위를 버텼다. 트랜스여성 운동선수이자 농업인인 나화린씨는 연단에 올라 “하늘은 우리 편”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이라는 20대 여성은 새벽 첫차를 타고 달려 나왔다. 농민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청년들은 “전봉준투쟁단 폐정개혁안 12조에 이미 여성·장애인·이주민·소수자 혐오와 차별 철폐가 들어있었다. 농민들은 이미 우리와 함께하고 계셨다”고 했다.
버틀러는 ‘애도 가능한 계급’과 애도조차 여의치 않은 ‘폐기 가능한 계급’으로 나뉜다고 말했다. 소설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민주주의 광장에서는 공적 애도가 금지되었던, ‘폐기 가능한 계급’에 대한 애도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 역시 자기 삶의 위태로움을 절박하게 느껴온 사람들이었다. 2015년 11월 앞장서서 물대포를 맞고 사망한 백남기 농민 덕분에 더 이상 추운날 물대포를 맞지 않게 됐다고 청년들은 말했다. 트랙터에 올라서서, 사회연결망서비스와 커뮤니티를 통해 백남기 농민 이야기를 쉼 없이 퍼 날랐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렸다고 했다.
사람들은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교제 살인 피해자, 성폭력 피해자, 현장학습 실습 중 사망한 고등학생, 성확정수술 뒤 2020년 육군 강제 전역 처분을 당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난 변희수 하사의 이름을 차례로 외쳤다. 스스로 ‘젠더 퀴어’라고 밝힌 청년은 윤석열 정부의 성소수자 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산 자가 죽은 자를 호명했다.
2020년 12월 한파 속에서 세상을 떠난 캄보디아 여성이주노동자 속헹,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산 26년을 포함해 32년 짧은 생을 살다 간 강태완(몽골 이름 타이왕), 장애해방을 외치며 산화한 장애인 열사들의 죽음을 딛고 살게 된 것을, 광장의 가장 위태로운 사람들은 떠올렸다. 엄동설한 경찰차가 만든 고립된 차벽 안에서 사람들은 차별 철폐를 외쳤다. 죽음과 삶의 감각을 경험하고 돌봄의 공동체를 새롭게 구성했다. “핫팩, 음식 보내주지 않았으면 정말 말 그대로 우린 죽었어, … 여전히 사람들이 계속 핫팩 보내주고 서로 옆 사람 확인하고 해서 살아남았어.”(‘더쿠’ 게시물) 이들은 얼어붙으면서 ‘먹고사니즘’의 생존 경제로부터 ‘세계’를 되찾아왔다.
장갑차를 온몸으로 막은 시민들, 젊은이들 대신 죽자고 결의한 늙은 시민들, 저체온증에 쓰러질 때까지 농민들의 곁을 떠나지 않은 청년 시민들…. 이들이 2025년 비상계엄이라는 비상하고도 비장한 죽음의 순간, 겁 없이 민주주의의 숨을 불어넣었다. 죽은 자들의 시간을 딛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깨달으며 삶과 살과 피와 뼈와 숨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며 외치고 또 춤췄다.
남태령 고개에서 대치가 시작된 지 30여시간 만에 행진을 다시 시작하게 된 전봉준의 후예들은 눈물로 트랙터의 시동을 걸었다. 투쟁 단장은 주름진 얼굴로 청년 여성들을 “동지”라고 불렀다. 전태일의료센터건립위원회에 사람들이 벽돌값을 보내고 있다. 여성농민들의 생산물을 판매하는 쇼핑몰의 서버가 버벅거릴 만큼 시민들의 결제가 이어진다. 민주주의 장례식장에서 선결제된 국밥을 삼키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차별과 혐오의 장례를 치르고 부활을 준비한다.
한국인들의 몰염치한 ‘생존 사상'을 설명한 김홍중도 21세기 한국 사회의 취약한 존재들이 울부짖는 생존에 대한 호소는 “타자들과 ‘함께-생존하기’”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번 ‘남태령 대첩’에서 공동체와 ‘사회’에 연결되려는 취약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위태로운 자들이 상호의존하며 ‘나만 생존하는 경제’에서 되찾아온 세계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권력을 수호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경찰청 블라인드에는 시민을 개와 바퀴벌레에 견주는 조롱이 올라왔다. 보수 언론은 남태령 시위가 ‘불법’이라 을러댄다. 시민들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어렵지 않게 전락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차가운 겨울날 헛간에서 태어난 가느다란 생명이었다. 말 구유에서 첫 숨을 들이쉰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떠날 때까지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전했으며 죽음과 부활의 기적을 일깨웠다. 그가 꿈꾸던 세계는 가능하기나 한 걸까? 우리는 왜 지상에 없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가?
적어도 여기까진 왔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의 질문에, 시민들이 대신 답했다. 우금치의 과거가 남태령의 현재를 도왔고, 죽은 전태일이, 백남기가, 변희수가 산 자들을 구했다고 했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 우리가 살아 있음을 잊지 않는다고 청년들이 응답했다. 2024년 12월, 미래가 답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22511430001872?type=AB7
'하루 7건→400건' 하청 노조에 후원 폭주···남태령서 눈뜬 시민의식, 약자 향했다 (한국일보, 최나실 기자, 2024.12.25 20:45)
21·22일 28시간 밤샘 '남태령 대첩' 이후
장기농성 노동자·전태일 병원 후원 폭주
"비정규직 목소리도 귀 기울여주셨으면"
'남태령에서 온 소녀' '20대 여성 연대' '응원봉 연대' '연대한 트랜스젠더' '생일자 퀴어 페미' '아동학대생존자' '더쿠 아재' '거제의 딸' '2030 페미니스트' '아줌마도 한다' '한강진역의 청년노동자' '통영 조선공의 딸' '현중(현대중공업) 하청 직원 딸' '부산 조선공의 딸' '서초동 주부' '전라도에서 경상도까지' '옳은 것을 위하여' '노동자 화이팅'···.
지난 21·22일 '남태령 트랙터 시위'를 기점으로,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에 쇄도한 후원자 명단 일부다. 거통고 조선하청지회는 조선업 호황에도 여전히 열악한 하청노동자의 처우개선과 임금체불·산업재해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며 지난달부터 노숙·단식농성 중이다.
이김춘택 조선하청지회 사무장은 24일 페이스북에 1,000여 건이 넘는 후원자 중 일부를 발췌해 올리면서 "모금 초반에는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점점 줄어서 12월 21일은 모금이 7건으로 가장 적었다"며 "이제 어느 정도 모금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22일 70여 건으로 늘더니, 23일 무려 400건 이상, 24일 새벽 2시까지 벌써 200건을 넘겼다"고 썼다.
그는 "지난 주말 남태령에서의 뜨거운 연대가 우리(조선소 하청노동자 투쟁)에게도 불똥이 튀어 얼떨떨하다, 놀랍다, 그리고 고맙다"고 소회를 밝혔다.
'전장연 연대'서부터 투쟁기금 후원까지
12·3 불법계엄 사태 이후 서울 여의도와 광화문, 남태령 등 전국 곳곳에서 집회와 시위가 잇따른 가운데, 민주주의 회복과 사회개혁 요구 목소리가 농민·여성·성소수자·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연대로도 확산되고 있다.
특히 노동조건 개선과 고용안정 등을 요구하며 장기농성을 벌여 온 노동자들에게 후원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관계자는 "남태령 투쟁 후 거통고 조선하청지회, 자동차판매연대지회,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등에 후원이 쏟아지고 있다"며 "급격히 늘어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 규모를 봐도 이례적인 연대 양상"이라고 밝혔다.
한국옵티칼 해고노동자 박정혜·소현숙씨는 본인들과 동료 5명의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올해 1월부터 공장 옥상에서 고공농성 중이다. (관련 기사 : 일본계 LG디스플레이 협력업체 '먹튀 논란'… 노동자 고공농성 돌입) 하루 10건 미만이던 후원은 22일 58건, 23일 20건 등으로 크게 늘었다.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원청 교섭을 요구하며 25일 기준 968일째 천막농성(국회 앞은 660일째) 중인 자동차판매연대지회에도 투쟁 기금 마련을 위한 김 판매가 하루 약 50건씩 이뤄지고 있다.
영세·비정규·플랫폼·특수고용직 등 취약 노동자들을 위한 병원 설립을 추진 중인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위원회'도 22일부터 후원 폭주로 "홈페이지 서버 한도가 초과하고 사무국 전화가 끊임없이 울리는 기적"이 벌어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길"
불법계엄 반대 시위에서 촉발된 각계각층의 연대 물결이 '더 평등하고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많다. 이김춘택 사무장은 한국일보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왜 노동3권이 필요한지, 노조법 2·3조가 왜 개정돼야 하는지도 귀 기울여주셨으면 한다"며 "한국 사회가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태일의료센터도 후원 물결에 감사를 표하며 "탄핵 이후 만날 세계를 상상하며 노동자와 농민은 물론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모두를 위한 공간이 될 수 있게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262126015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남태령 대첩과 줄탁동기 (경향,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2024.12.26 21:26)
남태령은 한양과 삼남(충청, 전라, 경상)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이젠 지하철이 뚫려 고개인 줄도 모르고 고개를 넘는다. 집으로 와서 마침내 탄핵안 가결의 순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이런 뉴스. “전남과 경남에서 동군과 서군으로 나눠 공주 우금치에서 합류한 전봉준 투쟁단은 트랙터를 몰고 ‘윤석열 체포·구속’을 내걸고 서울로 출발했다. 이들은 평화롭게 전진하다가 과천 지나 남태령에서 경찰에 막혔다.” 다음날 듣게 된 더 놀라운 소식.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길이자 내일의 문화였다. “이 소식에 시민들이 달려와 혹한의 밤을 꼬박 길에서 새웠다. 22일 오후 4시께 차벽이 열렸다. 대치가 시작된 지 28시간여 만이었다.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한양을 탈환하려 했던 전봉준의 꿈이 130년 만에 이뤄졌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줄탁동기(?啄同機)’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고 새끼와 어미가 안팎에서 서로 쫀다는 말이다. 서로의 노력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성공한다는 뜻이다. 농민이 올라오고 시민이 마중 나간 ‘남태령 대첩’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줄탁동기!
동작대교를 건너는 트랙터들의 상냥한 굉음. 내 늙은 마음에서 오랜 둑 하나가 툭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야흐로 거대한 개벽이 박두하고 있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262127015
[세상읽기] 트랙터의 시간에서 호미의 시간으로 (경향,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2024.12.26 21:27)
한덕수 권한대행의 첫 행보는 양곡관리법을 위시한 농업4법 거부권이다. 윤석열 정부의 1호 거부권도 양곡관리법이었는데 탄핵정국에서도 1호 거부다.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농업4법을 날리면 대신 쌍특검과 헌법재판관 임명은 받으라고 민주당이 던진 미끼가 아니었을지 미심쩍다. 결국 농민들은 소똥을 푸고 땅을 다지는 트랙터에 ‘농민헌법 쟁취, 윤석열 체포, 국민의힘 해체’를 써 붙이고 서울로 내달렸다. 경찰 차벽에 막혀 골바람 부는 남태령에 농민이 고립되자 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심야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그렇게 이틀 만에 동작대교를 열어젖히고 트랙터 헤드라이트와 응원봉을 반짝거리며 한남동으로 향했다. 농민과 시민들은 ‘남태령대첩’이라며 “이겼다!”를 외쳤다. 명량대첩에서 들어본 ‘대첩’은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는 뜻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의 ‘전봉준투쟁단’은 “쌀값은 올리고 윤석열은 내리자”며 한참 전부터 윤석열 퇴진 운동을 줄기차게 펼쳐 왔다. 나도 대통령 부부의 해괴망측한 행보에 기함하면서도 바닥 지지율로 임기는 대충 마치겠거니 했다. 하나 농민들이 움직이면 권력은 뿌리째 뽑힌다는 선험이 농민운동에는 있다. 8년 전 백남기 농민이 쌀값 보장을 외치다 물대포에 쓰러지자 전봉준투쟁단은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박근혜 탄핵의 포문을 열었으나 농민들이 죽지 않고 신나게 농사짓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외침은 끝내 멈춰 있다. 여전히 많은 농민들이 빚에 치여 죽고, 농기계에 치여 다치고 죽는다. 하여 남태령은 전봉준이 끝내 넘지 못한 우금치이자 미완의 대첩이다.
동지섣달 남태령의 밤은 노래와 춤으로 가득했다. 시민들은 네댓 시간씩 기다려 마이크를 쥐고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외쳤다. 쌀밥을 먹으면서도 양곡관리법이 뭔지, 농민들이 왜 트랙터를 끌고 와야만 했는지 이제 알았다며 미안하다 하였다. 정부도 국회도 적당히 포로교환용으로 쓰려던 양곡관리법을 제대로 공부하겠다 다짐했다. 이어서 자신의 응원봉이 누구를 향한 덕질인지 고백하며 사랑한다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도 고백했다. 이주노동자의 자녀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호남혐오를 마주하는 호남 출신의 분노에 대해 토로했다. 성소수자 남성의 삶을, 여성 농민으로 농업정책과 농촌에서 받았던 차별과 배제를 고발했다. 남태령에선 ‘의장님 한 말씀’으로 시작되는 관성화된 집회가 아닌 이야기의 향연이 펼쳐졌다. 농민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시민이 ‘농민가’를 배우며 서로를 경청했다. 이날 남태령은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트랙터와 응원봉이 만나 어떤 세계를 만들어가야 할지 토론하는 만민공동회의 장이었다.
비싼 스포츠카는 볼 수 있어도 트랙터 볼 일은 없는 도시에서 트랙터의 도열은 자체로 장관이다. 농민은 신기해하는 시민들이 트랙터에 타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트랙터는 기름도 많이 먹고 바퀴도 비싸다. 흙바닥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트랙터가 아스팔트 위를 달리면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바퀴가 닳아버린다. 트랙터는 농가의 주요 자산이어서 빚을 갚지 못하면 빨간딱지가 가장 먼저 붙는다. 농사지어 트랙터값 할부 갚고 나면 통장은 마이너스다. 그래서 트랙터는 농민에게 애증의 존재다. 반면 트랙터를 부릴 수 없는 농민들도 많다. 농사 규모가 작은 청년농민과 고령의 여성농민들이 그렇다. 평생 할머니 농민은 트랙터 없이 호미 한 자루로 풀도 뽑고 무릎과 허리도 뽑으며 농사를 지어왔다.
트랙터로 땅을 갈고 나면 씨앗을 심고 풀을 매는 호미의 시간이 다가온다. 이제 트랙터의 시간이 지났다. 트랙터 너머 호미와 응원봉이 만날 시간과 장소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이 시간을 놓치면 그날 남태령은 동지섣달 꽃 본 듯, 잠시 신기했던 한겨울 밤의 꿈일 뿐이다.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3384
남태령에서 온 소녀 (미디어오늘,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4.12.28 05:29)
[이송희일의 견문발검]
12월21일, 서울로 올라오던 전봉준 투쟁단 트랙터가 남태령에서 봉쇄당했다. 경찰이 농민들을 폭력적으로 저지하는 동영상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에 SNS에서 분노의 소리가 증폭됐다.
“경찰들은 밥을 처먹지 말라”, “나라의 근간은 농민이다”와 같은 목소리들이 들고일어나는가 하면, 전농 후원 공지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 불길의 발화점은 청년들, 특히 2030 여성들이었다.
2016년 촛불정국에도 전봉준 투쟁단에 응원이 쏟아졌지만, 그때는 광화문으로 진격하는 아군 이미지에 대한 열광이었지 트랙터에 실린 농민들의 분노와 멍든 마음까지는 헤아리지 못한 터였다. 더군다나 경찰이 양재IC에서 투쟁단을 봉쇄되자 대중의 기억 속에 트랙터는 까무룩히 잊혀졌다. 대치 과정에서 농민들이 외롭게 다치고 경찰들에게 서럽게 끌려갔다는 사실도.
그러나 22일, 남태령의 동짓날 새벽은 판이했다. 트랙터 앞에서 물결치는 천 개의 응원봉들, 칼바람 속에서 노래와 춤으로 서로를 감싸안은 연대의 열기. 누가 봐도 전혀 새로운 시간이었다.
이번 시국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까. 그것은 대통령 하나만을 파면하는 데 집중하는 ‘탄핵의 시간’도 아니며, 정권 재창출이라는 정치 일정표에 종속된 ‘민주당의 시간’과도 다르다. 오히려 2016년 ‘나중에’로 가차없이 밀려났던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 들이 2024년 ‘가장 먼저’ 달려와 농민들과 함께 펼쳐낸 광장의 시간이었다.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유령처럼, 제 삶이 부정당한 주체들은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나라는 2030 여성을 버렸지만 2030 여성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며 응원봉을 들고 트랙터 앞에 몰려온 젊은 여성들, 아무리 광장에서 무지개 깃발을 흔들어도 끝내 나중에 라는 말과 함께 영겁처럼 배신당해왔던 성소수자들, 이 정부든 저 정부든 끊임없이 권리를 부정당해왔던 장애인들, 기본권 보장도 없이 죽고 다치고 생존의 수레바퀴에 갈려나가는 노동자들, 그리고 저 소멸의 끝자락에서 외롭게 저항하는 농민들. 이렇게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바로 이 시민 주체들이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부조하기 위해 연대의 스크럼을 짠 채 우금치와 백남기의 기억을 끌어안고 마침내 차벽을 뚫어낸 이 역사적인 순간은 정확히 ‘시민의 시간’이다.
시민의 시간은 동심원을 그리며 세차게 퍼져나간다. 남태평 대첩 직후 전태일 의료센터에 쏟아진 수억 원의 기부금처럼, 여성 농민의 농산물 플랫폼인 ‘언니네 텃밭’에 우우 밀려든 회원가입처럼, 안국역에 드러눕고 전장연과 함께 이동권 투쟁을 벌인 2030 여성들처럼, 거통고 조선 하청지회 파업기금에 간밤의 눈같이 쌓인 후원금처럼, 또는 저기 353일째 고공농성을 벌이던 구미 옵티칼 공장에 줄지어 밀려든 생수들처럼. 바야흐로 연대의 지평선이 펼쳐졌다.
광장은 여러 시간이 흐르기도 하고, 단 하나의 시간이 지배적이기도 하다. 2016 시국 때는 다양한 시민 주체들을 배제한 의회와 민주당의 시간이 지배적이었다. 문재인 지지자들은 성소수자들을 향해 매몰차게 나중에를 외쳤고, 뒤이어 우원식 국회의장은 2020년 총선에서 “동성애를 반대합니다”며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태연하게 자랑했다. 그 나중에는 오늘날까지도 여봐란 듯 이어진다. 12월4일, 국회 앞에서 이재명 대표는 박경석 전장연 대표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이런 행사하는 데 와서 그렇게 하면 그게 호소력이 있겠어요? 더 미움받지.”
당연히 탄핵의 시간은 중요하다.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윤석열과 내란 종범들을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발본색원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민의 시간도 필연적으로 중요하다. 시민의 시간이 또 나중에로 밀려나면, 그리고 광장을 수놓는 수천 개의 빛들이 꺼져 버린다면 다시 만날 민주주의는 또다시 불완전할 것이고,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는 여전히 불평등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세계, 괴물 윤석열을 대통령에 앉히고 그 부패한 일당을 제멋대로 날뛰게 만든 이 병폐적 세계는 단순히 윤석열 개인 하나 제거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 불완전한 민주주의와 불평등한 세계가 지속되는 한 제2의, 제3의 윤석열이 끊임없이 귀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난 2016의 결정적 교훈이다. 그리고 2024의 광장, 우리는 비로소 다른 시간이 펼쳐지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남태령이 그 서막이다.
반드시, 나중에로 유예됐던 시간들은 이 망가진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약속처럼 귀환한다. 윤석열 세계의 시간을 뿌리까지 도려내고 봉인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시민의 시간이다. 탄핵 너머를 응시하며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연대와 평등, 더 많은 꿈의 언어를 광장에 쏟아내야 하는 시간, 바로 남태령에서 온 소녀가 들고 있는 불꽃의 시간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75252.html
다시 만난 ‘남태령 대첩’ 시민들…”함께여서 추운 동짓날 밤 견뎠죠” (한겨레, 고나린 기자, 2024-12-28 14:00)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집담회 열어
오후 4시 ‘윤석열 퇴진 범시민 대행진’
“함께여서 추운 동짓날 밤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어져 있습니다”
트랙터 행진 중 경찰에 가로막힌 농민들을 돕겠다며 시민들이 서울 남태령으로 달려가 길을 낸, 이른바 ‘남태령 대첩’에 함께했던 시민들이 일주일 만에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28일 오전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은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연 ‘남태령 뒤풀이-남태령 대첩을 함께 한 우리들의 집담회’(집담회)를 열었다.
집담회가 열리는 교회 밖에는 시민들이 참여를 신청하며 적은 ‘남태령 대첩 출전 동기’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시민들은 그날 남태령에 달려간 이유로 “농가에서 태어나 농민들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서”, “비상계엄 때 국회로 달려갔던 시민들의 용감함이 생각나서”, “농민의 눈물을 보고”, “가지 않으면 도저히 부채감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적었다.
그렇게 만난 시민들은 추운 날씨에도 서로를 보며 희망과 온기를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집담회에 참석한 이춘선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정책위원장은 “당일 농민들은 경찰에 다 잡혀갈 각오하고 버티고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 시민들이 몰려왔다. 젊은 여성들의 반짝이는 눈을 보고 발언을 들으며 힘을 얻었다”면서 “농민 투쟁은 이기는 싸움이 되기 어려운데 그날 희망을 봤다. 연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집담회에 참석한 시민들도 7∼8명씩 모듬을 꾸려 모여 앉아 그날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공유하며 남태령에서의 기억 조각을 맞춰갔다. 시민들은 ‘(남태령대첩 당시) 가장 인상 깊었거나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장면’으로, “남태령 지하철역에서 수많은 계단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의 행렬과 남태령에서 사당까지 행진할 때 우시던 농민분들”, “함께 다시만난세계를 부르던 것과 끊임없이 지원물품이 오던 장면”을 짚었다. “잠깐 인도에 앉아 쉴 때 모르는 분이 커다란 담요를 덮어줬던 것”, “짧은 거리 전진하던 순간, 어둠 속에서 트랙터의 헤드라이트에 불이 들어오던 때, 그리고 내 주변에 있던 너무 어린 친구들의 얼굴”을 오래 기억에 남을 장면으로 꼽은 이도 있었다.
이날 모인 시민들은 모듬 별로 ‘앞으로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을 두고 이야기 한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 시민이 “공권력이 시민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 시민을 지키는 세상, 남태령의 현장과 같은 세상, 정치권뿐만 아니라 시민 또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세상, 소수자 혐오가 종식되는 세상을 꿈꾼다”고 발표하자,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집담회를 마친 이들은 뒤풀이 공간 밖에 놓인 ‘그 자리에 함께했던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남읍시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또 함께 구호를 외쳤으면 좋겠어요”. 남태령에서의 기억으로, 다음 현장, 그다음 현장에서도 함께 싸우자는 다짐이 적혀 있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122716254543771
남태령, 안국역, 명동…'나중에'는 더이상 없다 (프레시안, 지수 민달팽이유니온 활동가 | 2024.12.28. 19:01:07)
[윤석열 퇴진 시키고 평등으로] '무박 2일 남태령 대첩'이 만든 역사
12월 21일 남태령 고개에서 보낸 28시간은 탄핵의 광장을 삶과 세상을 바꾸는 힘이 광장에 나온 우리에게 있다는 걸 보여줬다.
먼저, 남태령에 모인 시민들은 서로가 겪고 있는 고통을 마주하고 공감했다. 그곳에서 여성들은, 퀴어들은, 노동자들은 농민이 되었다. 각자의 삶과 농민들의 투쟁을 연결시켰고 우리가 바꾸고 싶은 세상에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로 존재했다.
둘째, 인적이 드문 남태령역에 사람들이 모이고 핫팩과 간식과 음료 등 후원물품이 쏟아지는 장면을 목격한 이들은 조선하청노동자들이 있는 거제도로, 장애인들이 있는 여의도로, 고용안정을 외치는 옵티컬 노동자의 고공농성장으로 연대를 넓혔다. 우리는 짧은 시간임에도 '연대'가 세상을 바꿀 힘이라는 걸 느꼈다.
나아가 여성, 농민, 퀴어, 노동자, 소수자들은 광장에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고 세상을 바꾸는 주체'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남태령에서 경찰 차벽이 열릴 때 퇴진 너머의 길을 보았다. 그 생생한 목소리를 전한다. 이 목소리들이 모여 광장을 굳건하게 지키면서 세상을 바꾸는 길을 열어갈 것이다.
남태령이라는 빨간 약
'나중에'는 없다. 세상을 바꾸는 우리들은 동짓날, 남태령 그곳에 '지금 당장' 존재했다. 언론이 없어도, 국회가 없어도, 우리는 모였다. 수많은 102030여성들과 청소년들과 이주민들과 성소수자들과 도시노동자들과 세입자들과… 그동안 정부와 국회와 언론과 주류 시선들이 쉽게 후순위로 미뤄두던, 그렇게 너무나 쉽게 뒤에 남겨지지던 소수자들이 가장 앞에 서서 농민들과 남태령을 지켰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만들 새로운 세계를 구현해냈다. 무박2일 남태령 대첩, 올해 가장 긴 겨울밤이던 그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남태령을 지켜 낸 강한 인간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존엄을 멸시하지 않는 평등 세상의 주체들이었다. 남태령은 보았다, 세상 바꾸는 우리를. 우리는 확신했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우리가 기어코 세상을 바꾼다면, 이토록 평등하고 안전한 세계를 그려내고 말 것임을. 이건 단 한 사람만의 망상이 아니라, 몰아치던 혐오와 차별과 불평등으로부터 나와 너와 우리의 삶을 구원하고야 말겠다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열망임을.
남태령, 안국역, 명동…계속해서 세상을 바꾸는 연대
네가 있어 나 또한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들이 이어졌다. 8년 전에는 '나중에'로 밀려났던 이들, 그간 온갖 혐오와 백래시와 차별과 불평등에 짓눌렸던 이들을 서로가 호명했다. 농민을 착취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는 세상은 장애인, 이주민, 청소년, 노동자, 세입자, 여성, 성소수자를 착취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남태령, 그 안에서 우리는 농민이었고, 여성이었고, 청소년이었고, 성소수자였고, 전세사기 피해자였고, 노동자였고, 동덕여대 학생이었고, 또 나였다.
그렇게 꿰어진 연대의 끈은, 계속되고 있다. 흩어지지 않는 연대의 힘으로 탄압받는 소수자들의 현재를 바꾸고 있다. 안국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함께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를 함께 외치며, 장애인을 끌어내는 경찰을 막아섰다. 명동에서 탈시설장애인연대와 함께 '시설은 아니다, 탈시설이 답이다'를 함께 외치며, 탈시설 당사자들의 삶을 듣고 동덕여대 시위와의 연대를 이야기 했다. 무지개 집회에 함께 하여 '차별금지법 제정하라'를 외치며, 지상파 언론으로 하여금 '윤석열 탄핵 집회가 반혐오·반차별 집회로 거듭나고 있다'는 말을 받아적게 했다. 이제는 새해를 앞두고 거창으로 달려가 탄압받는 노동자들과 연대할 궁리를 한다.
지난 12월 3일 비상계엄령 선포로부터 이제 겨우 3주가 지났다. 보라, 이미 우리는 세상을 바꿨다. 안티페미니스트의 말로를 또렷하게 드러내고, 페미니즘과 함께 나아갈 평등하고 존엄한 세계의 장면들을 겹겹이 쌓아가며 말이다.
주의! 여성을 지우지 말 것, 응원봉으로 대상화하지 말 것
무박2일 남태령 대첩, 이것은 그 누구도 함부로 지울 수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우리의 강한 연대는 매일매일 역사를 만들며 나아가고 있으니, 전국 곳곳에서 광장을 만들어가며 끝내 세상을 바꿔 낼 주체는 바로 우리다. 남태령으로 달려가 올해 가장 긴 밤을 지켜낸 우리의 연대는 강하다. 여성을 지우려 하고, 종북 프레임을 씌우고, 투쟁하는 소수자들을 운동권으로 구분 짓고, 동원만 하고 우리의 요구들은 또 나중에로 미루는 온갖 시도들은 이미 너무나 낡고 헐어 구린내가 잔뜩 난다.
우리를 지울 때, 우리를 대상화 할 때, 우리를 탄핵만 요구하는 군중으로 납작하게 짓누를 때, 우리는 더 거세게 몰아칠 것이다.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삶을 우리의 연대로 지키고 쟁취할 것이다. 8년 전에는 남태령을 넘지 못했던 트렉터가 오늘에는 기어코 남태령을 넘어와 대통령 관저 앞으로 행진했던 것처럼, 서로가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남태령에서 함께 구현한, 우리 모두가 마땅히 존중되는 그 세계를 다시 구현하기 위해.
https://www.news1.kr/society/incident-accident/5644643
'尹 탄핵 집회' 주도하는 2030 여성들…차기 대선 '태풍의 눈'으로 (서울=뉴스1, 유수연 기자, 2024.12.29 오전 06:00)
탄핵 집회 후 남태령 집회로 달려간 MZ여성들…"사회 문제 관심 확대"
"시민들이 다들 부끄럽다고 해요. '국회에 못 가서 부끄럽다', '농민들에 대해 잘 몰라서 부끄럽다'… 저도 부끄러워서 이 자리에 나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남태령역 앞 과천대로에서 진행한 집회 무대에 오른 여성 A 씨는 이같이 말했다. 20·30대로 추정되는 A 씨는 동이 트기 시작할 때부터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트랙터가 경찰과 대치하던 현장으로 달려왔다.
앞서 전날 트랙터 등을 몰고 용산구 한남동 관저로 향하는 상경 투쟁을 시도한 전농은 남태령에서 서울 진입을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했다. 당시 광화문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성 집회를 마치고 남태령으로 달려온 20·30대 여성들이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트랙터를 호위했다. 결국 1박 2일 대치 끝에 경찰은 전농 측과 합의해 차 벽을 해제했다.
현장에서 A 씨뿐 아니라 많은 20·30대 여성들이 무대에 올라 "농민들에 대해 잘 몰랐던 과거가 죄송스럽다"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등 연대 발언을 이어갔다. 시민들은 한남동까지 행진해 '다시 만난 세계' 등 노래를 부르며 집회를 마무리했다.
탄핵 정국에 20·30대 여성 주도적 역할…전장연 지하철 선전전엔 300명 몰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이어진 탄핵 정국에 20·30대 여성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들은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축제 같은 분위기로 국회를 압박하며 탄핵소추안 가결을 끌어냈다. 농민·장애인 다른 사회적 약자로 20·30대 여성들의 관심이 이어지며 이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탄핵 정국을 계기로 20·30대 여성들의 집회에 대한 장벽이 허물어졌다고 분석했다.
지난 24일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 승강장에서 진행된 전국장애인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승강장 다이인 행동'에는 300여 명(전장연 추산)의 시민이 동참했다. 27일에도 전장연 추산 50~60명의 시민이 혜화역 집회에 참여하는 등 기존 진행하던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에 비해 많은 시민이 함께했다.
지난 24일 전장연 집회에 참여했다는 B 씨(여·27)는 "평소 장애인 등 소수자 권리에 관심은 있었지만, 관심에서 그쳤다"며 "이번 (탄핵 집회를) 계기로 내가 직접 목소리를 내면 달라진다는 효능감이 생겼다. 앞으로도 권리를 위한 집회가 있다면 적극 동참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필순 전장연 조직실장은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이) 벌써 3년이 넘었는데 시간이 길어질수록 연대의 힘이 약해지면서 긴 시간을 견뎠다"며 "안국역에서부터 적극적으로 결합해 주시고 일상 투쟁처럼 매일 아침 8시에 진행되는 혜화역까지 같이 연대해 주실지는 몰라서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전문가 "약자들과 연대에 적극적인 여성들…차기 대선 땐 성별에 따라 표심 갈리는 현상↑"
전문가들은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여성들이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큰 정치적 경험을 계기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준일 시사평론가는 "집회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며 "또 집회는 일반적으로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엔 우리(20·30대 여성)만의 방식으로 집회하며 장벽이 허물어졌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위치기 때문에 사회 문제에 있어 다른 약자들과 연대에 더 적극적이다"며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지난 대선처럼) 20·30대 세대에서 젠더가 극명하게 갈린 기조가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6632.html
10인10색 ‘남태령 대첩’ 출전 동기 “우리가 서로에게 이렇게 따뜻할 수 있구나 계속 눈물이 났어요” (한겨레21, 신다은 기자, 2024-12-29 14:42)
12월28일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서 열린 집담회서 경험 나눠 “연대 덕분에 하나도 춥거나 배고프지 않았다”
“친구 중 한 명이 ‘저분들 식사도 못하셨다고 들었다, 따뜻한 죽을 보내고 싶다'고 하셔서 돈을 보탰습니다. 그러고 말 생각이었는데요. 죽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전농티브이(TV) 라이브를 보는데 어떤 어르신께서 죽 드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때 정말 문득… 저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24년 12월21일 오후부터 1박2일 동안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농민들의 ‘남태령 대첩’에 힘을 보탰던 시민들이 저마다 그날의 강렬했던 기억을 글로 풀어놓았다.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12월28일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마련한 집담회 자리에서다. 남태령 대첩이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농업 4법 거부권 행사에 반발해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향한 농민들이 서울 입구인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 차벽에 가로막히자 2030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이 일거에 합류해 차벽을 허문 사건이다. 비상행동 쪽은 그날 밤 남태령대첩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적은 참가자 70여명 쪽지를 집담회 공간 앞에 전시했다. 한겨레21이 이를 요약해 소개한다.
“스무살 때 학교에서 용역 깡패에게 끌려가 본 적이 있는데, 그 이후 폭력이라는 감각에 굉장히 예민해진 채로 살고 있어요. 나도 저 사람들도 권력에 의해 억압받으면 안 된다는 연대 의식이 남태령 현장을 계속 지켜보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농가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며칠 전부터 트랙터가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경찰이 차벽을 세우고 트랙터 창문을 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농민들이 남태령을 지켜달라고 부탁하는데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민들은 저마다의 경험으로 남태령과 연결돼 있었다. “농민분들이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것에 같은 여성으로서도 분노와 서러움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더는 폭력적으로 진압할 수 없단 말에 달려갔던 것 같아요.” “물대포 진압으로 돌아가신 백남기 농민(을 떠올렸습니다).”
12·3 내란 때 국회를 지켰던 시민들에 대한 부채감에 남태령으로 달려간 이도 있었다. “그때 국회에 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남태령의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12월3일 이후 머리가 멍한 채로 다니고 있어서 큰 생각없이 그냥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또 광화문 집회에서 농민들이 경찰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서 그 장면이 자꾸 떠올랐어요.”
기존 집회에서 느꼈던 고립감을 이번 남태령 대첩에서 해소했다는 이들도 있다. “노동·퀴어·장애·기후 등 여러 집회를 느슨하게 오가면서도 제 자신이 각기 다른 자아들로 찢어져 그저 부유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어서 신기했어요. 비관만 늘면서 사회 운동에 대한 기대를 접었던 차에 무언가 새로운 길을 위한 작은 새싹이 돋아난 것 같았고 그건 다 함께 해 주신 분들 덕분인 것 같습니다.”
남태령 집회는 ‘다양한 정체성의 모임’이었다. “얼굴과 몸을 꽁꽁 감추어야 했을 정도로 페미니스트인 것을 숨겨야 했던 2030여성이 남태령 대첩을 계기로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됐”고 “이민자 2세의 자유발언을 들으며 이 곳에 있는 우리 모두 대한민국 국민”임을 되새겼다고 한다.
“남태령 집회에서의 시민발언은 발언에 앞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여성 농민, 농민, 여성, 소수자, 직업 등을 먼저 밝히고 본인의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우리 모두 특성은 다르지만, 어떤 혐오도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 같아 평화롭고 따뜻했습니다.”
시민들은 인상 깊은 기억도 하나씩 꼽았다.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이름 모를 누군가가 롱패딩을 벗어주시고 가심”, “농민들의 눈물과 감사인사,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남태령 2번 출구 앞 후원물자 관리하던 분들과 통성명도 없이 묵묵히 일하다 청소 싹 끝내고 쿨하게 ‘그럼 언젠가 다시’라며 인사함”, “지하철역에서 두 줄로 끊임없이 올라오던 젊은 여성의 행렬”, “음식과 물건이 물밀듯이 밀려오지만 뒷사람을 위해 딱 필요한 만큼만 챙기는 모습, 빨갛게 얼어붙은 작은 손들” 등이다.
“저는 트랙터가 통과하는 장면도 좋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저와 같은 시민들이 같이 핫팩을 나누고 음식 나누는 장면이 잊히지 않습니다. 시위 나온 사람들을 절대 굶게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고요. 덕분에 하나도 춥거나 배고프지 않았어요. 우리가 서로에게 이렇게 따뜻할 수 있구나 계속 눈물이 났어요.”
한 시민은 남태령 대첩의 의미를 이렇게 썼다. “진짜 세상은 인터넷 밖에 있고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경험이었고 좀 더 사람에게 다정할 수 있도록 영향을 많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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