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가는 길/이길저길-샛길(펌글)

역사의 정치화? 선정적 포르노와 무엇이 다른가 (김영민, 2023.9.12)

새벽길 2023. 9. 28. 02:37

반적으로 김영민 교수의 칼럼에 동의는 된다. 하지만 역사를 정치화하진 않을지라도, 어떻게든지 법칙을 찾아내고, 교훈을 얻어려 애쓰진 않을지라도, 역사를 배우는 의미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1701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역사의 정치화? 선정적 포르노와 무엇이 다른가 (중앙일보,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3.09.12 01:02)
역사는 법칙과 교훈을 넘어서
영웅과 악당 이분법은 무의미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역사관
가짜·허상 투사한 포르노 같아
역사는 ‘진흙탕’ 탐색하는 과정
치밀한 실증과 상상력이 필요
역사는 어디에 있나
전 국민이 일제히 믿는 종교가 없는 곳에서 역사는 종종 종교의 역할을 대신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지시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런 역사는 정치인과 사회운동가에게 어필한다.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단지 물질적 이익을 약속하는 일을 넘어 삶의 의미를 선물할 수 있기에. 그래서 대중을 동원하고 싶은 정치인들은 습관처럼 역사에 호소하고, 정치 지향의 역사가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 부응한다.
역사와 함께 진보한다는 착각
그들은 종종 역사에서 법칙을 발견하고 싶어한다. 오늘 하루도 내 삶의 멱살을 쥐고 어디론가 끌고 가야 하는데,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이렇게 헤매는 사람에게 말하는 거다. 역사에는 법칙이 있다! 그 법칙을 어기면 네 인생은 꼬일 것이고, 너는 인생의 패자가 될 것이다. 역사의 법칙에 올라타라! 법칙이라는 이름의 기관차는 레일 위를 질주하여 너를 결국 도래할 미래로 좀 더 빨리 데려다줄 것이다. 이 얼마나 솔깃한 제안이란 말인가. 법칙과 함께 하는 나는 역사의 진보와 함께한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나는 나보다 큰 법칙의 일부니까.
역사에서 쉽게 법칙을 발견하려 드는 사람을 경계한다. 과거에서 역사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역사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미리 염두에 둔 법칙을 과거에 투사한 것 같던데? 그냥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인류의 역사가 법칙적으로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마침내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다.
그러나 역사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어도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서구의 가치가 보편화할 것을 믿었으나,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그런 보편화에 저항하는 흐름이 진행 중이다. 마음껏 종언을 선언하렴, 나는 나의 길을 갈 테니, 하며 역사는 오늘도 걸음을 분주히 옮기고 있다.
데이트하면서도 ‘법칙’ 찾을까
법칙을 주장하는 역사는 법칙을 준수하는 데이트처럼 재미없다. 2주간 데이트 뒤에는 손을 잡는 게 법칙입니다, 자, 손을 잡읍시다. 손잡은 뒤 1주일이 지나면 키스를 하는 게 법칙입니다, 자, 키스를 합시다. 키스를 했군요, 그럼 이제 아이스크림을 서로에게 떠먹여 줄 단계입니다…. 이처럼 과정과 결론이 뻔한 데이트를 누가 즐긴단 말인가. 한때는 사랑스럽던 사람이 맥락이 바뀌면 꼴 보기 싫어지는 것이 연애요, 한때 자랑스러웠던 것이 맥락이 바뀌면 수치스러워지는 것이 현실이요, 한때 진보적이었던 것이 맥락이 바뀌면 보수적이 되는 것이 역사다. 자유와 품위와 관용을 강조하던 낭만주의가 맥락이 바뀌어 자유를 억압하는 파시즘으로 변하기도 하는 게 역사다. 인간은 늘 예상치 못했던 변화의 와중에 있다.
역사에서 쉽게 교훈을 찾으려 드는 사람을 경계한다. 교훈 중독자들은 어디서든 교훈을 찾아낸다. 교육용 동화책과 교장 선생님 훈화에서 그치지 않고, 드라마·그림·노래·도박에서까지 교훈을 찾는다. 역사 속 인물에게서 현재 필요한 리더십의 교훈을 찾는다고? 정말로? 오늘날 필요한 리더십을 과거의 인물에게 투사한 것이겠지.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고 싶다고? 차라리 맛집에서 교훈을 배우는 것은 어떤가.
오늘은 참치 뱃살이 사람 뱃살에 주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 초밥집에 가자! 입맞춤에서 교훈을 배우는 것은 어떤가. 연인에게 말하는 거다. 오늘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키스를 해보자. 천년의 발정도 식어버릴 발언이 아닌가. 헤어지며 말하는 거다. 우리의 포옹은 참 교훈적이었어. 그런가. 교훈이 되어버린 역사는 곧 흥미가 없어질 텐데.
선한 의도가 나쁜 결과 부를 수도
역사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비하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과도한 미화나 비판을 통해서는 과거 그 자체보다는 그 과거를 말하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자존감이 쉽게 채워지지 않길래, 무엇인가를 과하게 자랑하거나 비하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자존감의 불쏘시개가 되기에 역사는 너무 다면적이고 복합적이다. 일방적으로 자랑하거나 폄하해도 좋을 만큼 과거의 의미가 단순하지는 않다.
조선시대에 양반이었다는 것은 세련된 문화를 누렸다는 뜻이기도 하고, 동료 인간을 노비로 부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때 제국이었다는 것은 국력을 신장시켰다는 뜻이기도 하고, 타국을 괴롭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때 식민지였다는 것은 패배자였다는 뜻이기도 하고 타국을 침략하지는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나라도 아름답거나 추하기만 한 경우는 없다.
역사에서 손쉽게 선인과 악인, 영웅과 범인을 구별하려 드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누군가를 예외적인 영웅이나 성군으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이 조건의 산물이라는 점을 망각하는 일이다. 인간은 주어진 조건에서 분투하는 존재이며, 주어진 조건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던가. 역사에서는 선한 의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고, 나쁜 의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고,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서 꼭 원래 나쁜 놈이었다는 법도 없고, 전날의 성취가 뒷날의 악행을 가려주는 것도 아니다. 딱히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모두가 고통받는 게 역사이기도 하고, 고통을 받았기에 희생양을 찾는 게 역사이기도 하고, 독신으로 살겠다며 맞선 자리에서 뛰쳐나오다 부딪힌 여성과 결혼에 이르는 게 역사이기도 하다.
정치의 수족으로 전락한 역사
역사를 이데올로기의 수족으로 만드는 사람을 경계한다. 지나치게 정치화된 역사는 대개 실제 현실과 무관하지 않던가. 이데올로기가 설파하는 것만큼 인간의 역사가 깔끔하던가.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역사가 깔끔하지 않은 진흙탕이라는 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다. 그리고 그 진흙탕에서 기어이 한걸음 내디딘 사람들의 노력을 폄하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다. 그렇게 해서 내디딘 발이 결국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도 있음에 눈감는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다.
법칙에, 교훈에,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역사는 섹시하지 않다. 그것은 포르노만큼이나 섹시하지 않다. 영국의 작가 제프 다이어는 포르노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 적이 있다. 포르노는 매우 사적인 비밀을 폭로하는 형식을 띠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공된 것이며, 사람들이 자신의 정념을 마구잡이로 투사할 수 있게 만든 공허한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정치의 수족이 된 역사도 그렇지 않던가. 그런 역사는 마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폭로하는 형식을 띠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공된 것이며, 사람들이 정치적 정념을 마구잡이로 투사할 수 있게 만든 공허한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역사는 대중의 정념을 투사할 대상을 던져주는 데 급급하다. 포르노가 자본에 영합하듯이 단순화된 역사는 이데올로기에 영합한다. 마치 포르노가 실제가 아닌 꾸며낸 상황을 찍듯이 정치 선전이 된 역사는 실제가 아닌 꾸며낸 과거를 기억한다. 포르노가 가짜 세상을 보게 하여 수요를 창출하듯이, 정치화된 역사는 가짜 과거를 보게 하여 수요를 창출한다.
역사는 목적지가 아닌 곳으로도 흘러가
실제에 이르기 위한 섬세한 탐색 없이 법칙과 교훈과 이데올로기를 백주 대낮에 전시해대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 포르노다. 포르노가 욕망의 대상을 즉각적으로 노출해서 지루해지고 천박해지듯이, 선전물이 된 역사는 이데올로기를 즉각적으로 노출해서 지루해지고 천박해진다.
날 선 육체가 예복 속에 봉인되어 있을 때 매혹적이듯, 역사는 사료에 가려져 있을 때 섹시하다. 날 선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장인의 손길로 섬세하게 사료라는 옷을 하나하나 헤쳐가야 한다. 역사를 음미한다는 것은 그 탐색 과정에서 얻는 발견의 기쁨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비약과 과장을 조심하면서, 조율된 상상력과 엄정한 실증과 촘촘한 논리로 얽히고설킨 맥락을 하나하나 풀어헤칠 때 비로소 역사의 몸에 다가갈 수 있다.
역사는 삼천포에 있는 법, 사료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대개 예정 도착지가 아니라 삼천포에 이르게 된다. 마침내 삼천포에 도달한 역사가는 법칙이나 교훈이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법칙과 교훈과 이데올로기를 끝내 초과해버린 그 넓은 삼천포의 수평선을 보면서 간신히 어떤 감각을 체득한다. 이를테면, 역사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감각, 인간의 삶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는 감각, 좀 더 긴 안목을 갖고 살아가야겠다는 감각 같은 것들, 그런 감각을 느낀 역사가는 함부로 과거를 정치적 도구로 만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