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는 재미/노래도 부르고

민들레처럼

새벽길 2022. 3. 18. 19:20

민들레처럼
                                                                       박노해

일주일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염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고무신을 끌고
어질 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오"
어느 도적놈인진 조직폭력배인지
민들레꽃 한 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 쥐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도 맞춰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합니다
민들레꽃 한 송이로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아 산다는 것은 정녕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하며
민들레 꽃을 바라봅니다
어디선가 묶은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와 내 손에까지 몰래 쥐어준
그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꽃으로는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는
흔하고 너른 풀잎 속에서 자연스레 피어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은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순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퉁이
쇠창살 너머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가진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밟히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 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 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성의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가
마침내 바람찬 허공 중에 수천 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민들레 민들레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문으로 멍들은 상처투성이 가슴 위에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 받아 들고
글썽이는 눈물로 결의합니다
아 아 동지들, 형제들
준엄한 고난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그렇게 저는 다시 설 것입니다
 
얼마 전 꽃다지 으라차차에서 곽경희 님의 목소리로 '민들레처럼'이 올라온 것을 들었다. 이젠 30여년 가까이 된 노래이건만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건 내가 아재감성, 운동권 감성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민들레처럼'은 '박노해의 희망메시지'라고 하여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될 당시 박노해석방대책위원회에서 엮은 책의 제목이다. 거기에 나오는 박노해의 시에 조민하가 곡을 붙여 이 노래가 나왔다. 당연히 시보다는 노래가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994년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하며 [희망의노래 꽃다지]가 발매한 노동가요 최초의 합법 음반 꽃다지 1집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이 앨범에는 당시에 유명한 민중가요들이 대폭 들어가 있다.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에서는 꽃다지에 단결투쟁가를 비롯한 대부분의 곡들에 개작요구를 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싸워 원안대로 실렸다. 집회 때 웅장하게 울려퍼지곤 하는 '단결투쟁가' 합창곡도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사실 민들레는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의미부여해서 노래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내가 30년 가까이 좋아하는 노래 중의 하나가 될 줄은 더욱 몰랐고... 이 노래를 엉뚱하게 써먹는 넘들도 있긴 하지만, 내가 힘들 때, 아니면 주위 벗들이 힘들 때 듣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노래다.

https://www.youtube.com/watch?v=Ki9tgBbPwLw
[꽃다지 으라차차 e_03]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시 박노해, 곡 조민하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대도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 할 저 투쟁의 길에
온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 해방에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 할 저 투쟁의 길에
온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 해방에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아 해방에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