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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기. 2004. 5월 운동과 지역권력구조의 변화. 「분권과 혁신」 제43호, 2004년 7월호.
광주항쟁과 비슷한 계기로서 지역사회의 권력구조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제도의 도입, 이를테면 참여예산제도나 지방정부 단체장의 교체를 상정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 같지만, 한번쯤 연구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최정기. 2004. 5월 운동과 지역권력구조의 변화. 「분권과 혁신」 제43호, 200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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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운동과 지역권력구조의 변화
최정기 (전남대 사회학과)
1. 문제제기
역사적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우리나라의 권력구조는 매우 중앙집중적인 형태이다. 멀리 왕조시대의 경험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본 식민지 시기의 총독부와 미군정,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 그리고 5공화국 및 6공화국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던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가 그러한 담론을 뒷받침하는 주된 논거이다. 중앙집중적인 권력구조하에서 지역권력은 중앙권력에 예속된 채, 중앙권력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촌지역을 대상으로 지역사회의 지배구조를 탐구한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한국가톨릭농민회(1990)가 '끄나불 조직에 의한 지배'로 개념화한 현상도 지역권력구조의 예속성을 지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 연구의 관심은 지역권력구조이며, 그중에서도 중앙권력과의 관계보다는 지역권력구조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 이럴 경우 지역권력구조는 여러가지 수준에서 정의될 수 있다. 우선 정치적 층위에서 정의가 가능하다. 이 경우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해내고 조직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지역내 국가장치들의 고위담당자들이 포함된다. 또한 경제적 지배권력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지역의 경우 이러한 지배권력은 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상정할 수 있는데, 이 지역의 성장이데올로기를 주도하는 층이다. 이와 함께 이데올로기적 지배권력도 존재한다. 광주지역의 경우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광범한 잔존과 관련하여 이들 지배권력의 지형은 매우 복잡한 상태이다. 학연이나 종교기관, 언론 등 다른 지역과 공통되는 요소들을 제외하고도 일단의 토착유지들이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지역내의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권력구조는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특정 사안이 발생하면 서로 중첩되거나 갈등을 일으키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실 본 연구에서 지역권력구조를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조화되어 존재하면서도 실체가 있는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공적인 의사결정에 연고주의나 사적 관계 등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우리 문화는 지역권력구조가 갖는 의미를 크게 하지만, 그 때문에 그것을 밝히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체계적이고 다양한 방식의 접근이 요구되는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사실상 지역권력구조에 대한 연구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장기적인 사회운동과 지역권력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위해 광주 및 전남지역은 가장 적합한 연구대상이다. 그것은 광주민중항쟁과 그후 해마다 5월을 계기로 전개되어 온 5월 운동의 경험 때문이다. 즉 산업화과정을 제외하면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지역권력구조에 별다른 충격이 없었던 다른 지역들에 비해, 광주·전남지역은 광주민중항쟁과 5월 운동을 통해 일종의 '국가외부의 정치'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광주민중항쟁은 국가권력의 상대성에 대한 경험이었다. 당시 시민군 점령하의 광주지역은 기존의 국가장치들이 작동을 중단하였으며, 국가권력의 정당성마저 붕괴된 상태였다. 최소한의 사회질서도 해체된 상황에서 정부는 아주 당연하게 군대를 동원하여 광주를 대상으로 군사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자신들이 주도했던 저항행동과 관련하여 생존권의 보호라는 차원에서 정당성을 발견하였으며, 자신들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국가권력과 국가장치들이 자신들을 적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는 그대로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 일시적이지만 그때까지의 지역권력구조가 무력화되고, 항쟁을 통해 저항공동체와 새로운 리더쉽이 형성되었던 경험이었다. 물론 항쟁의 초기에는 기존의 지역권력구조가 어느 정도 작동했었지만, 무장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들의 헤게모니와 지도력은 붕괴되었다. 더우기 대다수의 지역내 지배세력들이 항쟁에 소극적이거나 조기진압을 원했으며, 그중 일부는 도피했다는 사실은 향후 지역내 헤게모니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반면 1970년대까지는 별다른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았던 재야인사들, 학생운동의 지도부, 그리고 항쟁지도부 등이 항쟁의 와중에서 갑작스럽게 부각되었다.
셋째, 5월 운동을 통해 형성된 반권위주의 및 시민의식의 성장을 들 수 있다. 광주의 경험중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중 하나가 기억투쟁이라 할 수 있다. 즉 광주는 사건이 발생한지 불과 10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뒤바뀌는 기억투쟁을 추진한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전 시기에 걸쳐 광주에서 진행되었던 「진상규명 투쟁 및 '학살' 책임자 처벌을 위한 투쟁」은 군사쿠데타의 주역들, 권위주의정권의 최고 통치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기초 및 역사적 경험을 마련한 것이었다. 즉 시민들은 투쟁을 통해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대한 처벌을 이루어냈으며, 이러한 경험이 시민들에게 의미있는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광주민중항쟁 및 5월 운동은 광주·전남지역의 권력구조에 매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본 연구는 광주민중항쟁 및 5월 운동을 통해 광주와 전남의 지역권력구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본 연구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가설 1, 광주민중항쟁 및 5월 운동을 거치면서 광주·전남지역의 권력구조는 양적으로는 보다 폭넓은 참여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질적으로는 사회운동 진영이 주요 구성요소가 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가설 2, 지역내의 지배담론은 여전히 민주화보다는 성장이데올로기이다.
2. 연구방법에 대한 모색
1) 기존 연구 검토
(1) '누가 지배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연구들
지역권력구조에 대한 과학적 접근으로 가장 먼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미국에서 지역내의 권력구조를 대상으로 다원주의자와 엘리트주의자들 사이에서 전개된 논쟁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대략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의사결정 접근법이다. 이 방법을 사용한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 달(R. A. Dahl)의 「Who Governs?」(1961)인데, 그는 해당 지역사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권력자로 생각하였고, 조사결과 의사결정 과정에 다양한 이익단체들이 개입하기 때문에 지역권력구조가 다원주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로는 지위 접근법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저작이 밀즈(C. W. Mills)의 「Power Elite」(1956)인데, 여기에서 밀즈는 권력기관으로 인정된 장치들, 즉 정부관료, 군부, 그리고 대기업의 핵심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권력자로 생각하였다. 실제 조사결과 그는 이들 기관의 고위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강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으며, 하나의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들 파워엘리트(Power Elite)라는 개념으로 불렀다. 결국 그는 지역권력구조는 물론이고 미국사회의 권력구조 자체를 엘리트주의에 의해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세 번째로는 평판 접근법을 들 수 있다. 이 방법은 자신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안다는 가정하에 지역사회 성원들을 대상으로 누가 권력자라고 생각하는가를 조사하는 것이다. 헌터(F. Hunter)의 「Community Power Structure」(1953)를 대표적인 저작으로 들 수 있다. 실제 헌터의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공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권력자라고 답하였으며, 그 결과 헌터는 권력구조에 대해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미국 지역권력구조에 대한 연구의 영향을 받아 그곳에서 사용된 방법론을 우리 사회에 적용한 연구들이 있다. 이러한 연구는 일단 한국의 농촌 마을이 덜 개방적이고 동질적이다는 가정에 입각하여 지역사회를 폐쇄된 것으로 상정하고 그 안에서 권력구조를 분석한다. 그러나 이들 이론의 출발점은 지역사회가 먼저 형성되고, 그 다음에 그들이 모여 국가를 구성한 미국사회이며, 따라서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큰 무리가 따른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이론은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작동을 무시하고 지역사회를 하나의 폐쇄된 체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권력'(Lukes, 1992)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다만 정치의 아젠다(agenda)로 떠오른 사항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권력을 행사하는가에 대해서만 탐구할 뿐이다.
(2) '누구의 이익인가?'에 초점을 맞춘 연구들
다원주의자들과 엘리트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이 '누가 지배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졌다면, 권력구조가 무엇을 위하여(For what?) 존재하는가를 질문한 연구자들이 있다. 물론 여기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일단 돔호프(Domhoff, 1978)를 주목해보자. 그는 "권력이란 타인들에게 의도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효과를 생산하게 하는 어떤 사람들의 능력(capacity)이다"고 정의하면서, 여기에는 한 유형의 권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상층계급은 그들이 처분할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권력을 갖고 있으며, 이들 권력들의 축적되고 결합된 효과들이 상층계급을 지배계급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권력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의 완전한 지표는 있을 수 없으며, 다양한 유형의 복수의 지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가 사용하는 지표는 세 가지이다. 그것은 누가 이익인가?(Who Benefits?)와 누가 지배하는가?(Who Governs?), 그리고 이슈가 되는 영역에서 누가 승리하는가?(Who Wins?)이다.
한편 이와 같이 지역권력구조의 작동을 통해 누가 이익을 얻는가를 중심으로 구성한 권력 개념이 성장기제론(Growth Machines)이다(Logan & Molotch, 1987). 이에 따르면 특정 공동체의 권력구조는 토지를 더욱 집약적으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이윤을 얻고 있는, 토지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해당사자들이 하부로부터 집적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토지의 사용강도를 강화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은 성장이며, 따라서 성장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의 지배세력들이 배치된다. 성장기제론에서 표현되는 지역권력구조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외부투자를 위한 좋은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된다.
매우 설득력이 있는 논리지만, 이해관계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즉 이해관계에는 경제적 이익만이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으며, 실제 일상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현장인 지역에서의 권력구조는 경제적 이해관계 외의 요소들이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이익을 현실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도 어려운 점이 있다.
(3) 지역권력구조의 예속성을 강조하는 입장
한국사회에서의 지역권력구조에 관심을 갖는 연구들은 중앙집권적인 권력구조가 지배해 왔던 역사적 경험 때문인지 지역권력구조의 예속성을 보여주려고 한다. 여기에는 먼저 농촌사회를 대상으로 마을 외부의 권력, 구체적으로는 국가권력을 전제하면서도 마을내의 권력구조에 초점을 맞춘 김태일(1989)과 지역수준에서 자영업집단의 이익활동을 중앙정치의 하부조직을 통해 파악하면서 이들 자영업자가 성장연합의 하위파트너라고 하는 정상호(2001)가 있다.
김태일은 독점자본이 농민을 경제적으로 수탈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수탈에 대해 농민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국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국가가 농민의 의식화·조직화·정치적 진출을 저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국가장치의 효과가 지역사회와 농촌마을 단위에서 관철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농민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헤게모니적 지배유형'과 '공개적 테러지배유형'으로 구분하면서, 한국의 농민은 '강한 국가와 약한 농민'이라는 비대칭적 관계의 역사적 구조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농촌마을 내의 끄나풀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정상호는 197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정치의 주무대는 이미 농촌이 아니라 도시이며, 그 주역은 개별유권자가 아니라 느슨한 형태로나마 조직화되기 시작한 자영업자 중심의 이익조직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자영업자들은 통·반장과 관변단체들, 그리고 지방의회를 통해 정치적으로 조직되면서 지역정치의 전면으로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권위주의 시기의 정치과정에서 집권당이 동원할 수 있었던 최대 자원은 성장연합의 하위파트너로서 광범한 규제기능에 노출되어 있던 자영업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이들 제도들은 더 이상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동원되지 않으며, 독자적인 권력을 구축하면서 노골적으로 계층이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에서도 몇 가지 보완해야 될 점이 보인다. 우선 과도하게 단순해진 유형화이다. 김태일은 국가와 농민의 사이를 비대칭적 관계의 역사적 구조화로 설명하면서도 독점자본과 농민, 헤게모니적 지배와 테러적 지배 등 대칭적인 유형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종별적인 사회구성 원리들의 비대칭적인 절합을 사고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정상호 역시 연구목적이 자영업자에 맞추어진 결과 복합적이고 위계적인 권력구조에 접근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
2) 연구방법 및 한계
지역권력구조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현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외연도 불분명하며, 실체조차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망 속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지역 수준의 의사결정이나 정책결정에서 일상적인 행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영향을 미치지만,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 것, 그것이 지역권력구조이다. 특히 '보이지 않는 권력' 등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는 지역권력구조에 대한 탐구의 첫단계로 기획되었다.
우선 본 연구의 대상지역은 일단 광주지역으로 한정한다. 그것은 지역권력구조는 기본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을 중심으로 작동한다고 생각되며, 오늘날 그것은 시·군 지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공간은 마을 단위가 아니고, 행정적으로 광역자치단체나 기초자치단체 등으로 분류되는 공간도 아니며, 그보다는 교통체계나 통신체계, 시장 등 교역체계와 생산과 재생산관계 등과 관련하여 별다른 장애없이 일상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마치 전통사회에서 5일장 상권이 미치는 지역이나 통권권이 중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광주지역은 현재까지 하나의 대상지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서울 등 대규모로 성장해가는 지역에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 글의 주제는 사회운동과 지역권력구조 사이의 관계이며, 특히 사회운동으로 인한 지역권력구조의 변화양상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지역권력구조가 변화하는 원인이나 계기는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국가장치가 지닌 정당성 자체가 위기에 처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거나 무력화되는 경우로 지역권력구조는 자신의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국가장치의 담당자들을 교체하여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둘째, 국가장치와는 무관하게 주민들 사이의 이해대립이 격화되면서, 국가장치의 통제력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 과정에서 지역권력구조는 정당성을 위협받게 된다. 이 경우 국가권력은 기존의 지역권력구조를 변형하여 자신의 지배를 관철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셋째, 피지배민중의 정치가 활성화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국가권력의 작동방식에서 벗어나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을 얽어맸던 기존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끊어버리는 경우인데, 국가권력의 외부에서 작동하는 대항장치를 결성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5·18과 5월 운동은 마지막 세 번째의 경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5·18과 5월 운동을 전후하여 지역권력구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밝혀야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기존의 논의를 참조하되, 현실적으로 획득가능한 자료를 감안하여 네 가지 지표를 검토하였다. 하나, 5·18 당시의 지역권력구조 재편 상황이다. 둘, 유지집단의 변화양상과 유력단체의 활동상의 변화 여부이다. 셋, 지역 정치인들의 출신 경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았다. 넷, 각종 선거에서 표방되는 공약의 변화 여부이다.
3. 5·18 당시의 지역권력구조 재편
5·18은 지역적 수준에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태의 전개였다. 특히 군부대의 진압과 그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 그리고 사태가 그렇게 확산될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따라서 지역권력구조와 관련하여 5·18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5·18은 지역권력구조의 작동과정을 보여준다. 최초 사태가 발생하면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역권력구조에 포함된 사람들은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도청이나 계엄군 측에 과잉진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전달하는 한편, 시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등장한 조직이 19일에 결성된 시민수습위원회였다. 이때의 시민수습위원회는 목사, 신부, 관료, 변호사, 기업가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그때까지 관에서 시민들의 의견 수렴이나 시민들의 동원이 필요할 때 이용하던 네트웍이라 할 수 있다. 즉 당시의 상황에서 관에서 동원할 수 있는 지역권력구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질서유지에 대한 바램이 담겨있는 수습위원회라는 명칭 자체가 항쟁에 적극 참여하고 있던 일반 시민들의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용어였으며, 그러한 거리감이 당시 동원된 네트웍의 결정적인 한계였다.
다음으로 5·18은 지역권력구조의 한계를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즉 엄청난 국가폭력과 시민들의 목숨을 건 저항이라는 비상사태 속에서 지역권력구조는 그 토대가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관 주도로 만들어진 시민수습위원회가 일반 시민들에게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민들의 불만의 표적이 된 상태에서 재야인사들이 주축이 된 시민수습위원회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흐름에는 1970년대에 걸쳐 김대중과 행보를 같이 했던 홍남순변호사 등 재야인사들과 1978년 '교육지표' 사건 이후 사회운동 진영에 포함된 교수들, 그리고 학생운동 출신으로 졸업후에도 네트웍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운동가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이 조직은 그동안 지역권력의 중심이었던 관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대안적인 세력이지만, 기존 사회질서의 유지라는 점에서 보면 또 다른 의미의 권력구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항쟁의 흐름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며, 결국 적극적인 항쟁을 주장하던 사회운동 세력들과 시민군 세력들에게 주도권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표 1) 5·18 당시 시민 지도부의 변화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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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위원회(19일, 21일) |
재야인사 수습위원회(25일) |
항쟁지도부(25일) |
인적 |
최한영(위원장,독립투사), 윤공희(위원장,천주교대주교)오병문(교수). 조비오(신부), 신승균(목사), 박영봉(목사), 이종기(변호사), 장세균(목사), 박윤봉(적십자사 지사장), 장휴동(태평양극장 사장), 신영순(교사) 등 |
홍남순(변호사), 송기숙(교수), 이기홍(변호사), 명노근(교수), 이성학(장로, 제헌국회의원), 조아라(YWCA 회장), 이애신(YWCA 총무), 장두석(신협이사), 김성룡(신부), 윤광장(교사), 윤영규(교사), 박석무(교사),윤상원, 정상용 |
김종배(위원장, 대학생), 허규정(대학생), 박남선(트럭 운전사), 김준봉(회사원), 구성주(무직), 김영철(빈민운동가),윤상원, 정상용, 이양현, 박효선, 정해직(이상 학생운동 출신으로 사회운동가) 등 |
특성 |
최초 19일 관 주도로 결성, |
재야인사와 교수들, 학생운동 출신 졸업생들이 주도함 |
학생운동 출신과 항쟁의 와중에서 지도부로 성장한 세력의 연합체 |
이상과 같이 5·18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역사적 경험으로, 광주·전남지역의 권력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광주·전남지역에서는 상당 기간 동안 기존의 권력구조와 사회운동 세력의 리더쉽이 공존하면서 갈등과 연대 등 다양한 상황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5월 운동 및 사회 전반의 민주화가 맞물리면서 1990년대부터는 사회운동 세력 및 시민사회단체가 지역권력구조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4. 5월 운동과 유지 집단의 변화
지역권력구조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는 지역유지로 불리는 집단일 것이다. 물론 유지가 과학적인 개념은 아니지만, 실제 행정조직이나 기업 등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는 매우 중요한 포섭의 대상이 된다. 물론 그 내부에도 비공식적인 위계구조가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광주지역에서 드러난 조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유지'들의 조직중 하나는 「전남지역개발협의회」이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이 조직은 적어도 전남도지사나 광주광역시장과 협조 관계를 맺는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권력구조의 변화와 관련하여 「전남지역개발협의회」의 설립과정 및 동 조직의 「광주·전남21세기발전협의회」로의 개편과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조직은 1977년 2월 지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인정되는 경제계와 언론계, 그리고 학계 인사 등이 모여 발족한 「전남개발연구회」가 모태가 되었는데, 애초에 이 조직은 '지역의 합리적 개발을 통한 경제성장과 생활수준의 향상'을 표방하는 민간단체였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후인 1982년 12월 15일 「전남개발연구회」는 당시 전남도지사의 재정지원과 회원모집 등 전폭적인 지원하에 「전남지역개발협의회」로 재편·설립되었다. 표면적인 재편 이유는 인재육성과 지역 적성산업 유치, 부존자원 개발, 그리고 문화예술의 진흥 등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광주민중항쟁 이후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조직이 재편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한 국민성금이 동 조직으로 흘러들어간 점, 그리고 망월묘역에 묻힌 광주항쟁 사망자들의 시신 이장작업을 동 조직이 주도한 점 등으로 분명해진다. 그러다가 5월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전남지역개발협의회」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고, 그 결과 1993년 동 조직은 「광주·전남21세기발전협의회」로 개편하였다. 두 조직의 구성원 및 사업내용 등을 비교한 결과는 표 2)와 같다.
표 2) 「전남지역개발협의회」와 「광주·전남21세기발전협의회」의 비교
전남지역개발협의회(1982) |
광주·전남21세기발전협의회(2004) | |
임원진 구성 |
경제계 - 고광표(회장, 대창석유회장), |
경제계 - 박용훈(회장, 신양파크호텔회장), 이계학, |
조직의 성격 |
비영리 민간단체(반관반민의 성격이 강함) |
비영리 민간단체 |
지역개발 관련 주요사업 |
1983∼1984년도 지역개발 사업실적 |
2000년도 지역개발 사업 실적 |
최초 「전남지역개발협의회」의 인적 구성은 광주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들이 모여있었다. 회장인 고광표는 광주지역을 대표하는 기업가이면서 개화기 이후 이 지역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창평 고씨 문중이다. 임광행은 보해양조 사장이고 박정구는 금호그룹을 대표한다. 또 언론계에서도 김종태는 광주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광주일보(그 전에는 전남일보) 회장이다. 학계의 박준채는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건의 주역이며, 허진득은 의제 허백련 선생의 아들로 기독병원장이었다. 즉 이 시기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그 외 다른 영역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강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광주·전남21세기발전협의회」의 구성원들도 매우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지만, 아무래도 이전에 비해 중량감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연속적인 두 단체가 갖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구체적인 사업내용에서 나타난다. 표에서 드러나듯이 1983∼1984년에는 전남공예품경진대회와 같이 비교적 규모가 크고, 도 정책과 관련된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연구 논문의 주제 역시 도 정책의 기반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하지만 2000년도 사업실적을 보면 도의 정책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으며, 산업시찰이나 법률상담, 군경 위문 등 매우 개별적이고 평범한 활동에 머무르고 있다. 1980년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조직의 위상이 급격하게 하락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직 위상의 하락을 보면서, 그것이 지역권력구조가 변화한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전남지역개발협의회」가 일정 정도 지역권력구조를 드러내는 장치였다면, 1990년대가 넘어서면서는 민주화 등 여러 가지 정세의 변화 속에서 그것이 다른 형태로 작동한다는 것이 올바른 인식일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의 시정원로자문회의를 들 수 있다(표 3). 물론 시정자문회의는 시장 등 광주시청에서 정책결정이나 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문을 얻는 정도의 조직으로 과거의 「전남지역개발협의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그 구성원을 살펴보면 「전남지역개발협의회」와 거의 유사하며, 이들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유지집단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표 3) 시정원로자문회의 위원 명단 2004년 6월 말 현재
성명 |
직위 및 주요경력 |
성명 |
직위 및 주요경력 |
고제철 |
금광기업회장 |
오병문 |
동신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장관 |
김양균 |
변호사, 헌법재판소 위원 |
이양우 |
유네스코광주전남회장, 전교육감 |
김종태 |
전 광주일보 회장 |
이정인 |
향림사 조실스님 |
마형렬 |
광주상공회의소 회장 |
장형태 |
IBT회장, 전 전남도지사 |
송언종 |
전 광주광역시장 |
조비오 |
풍암동성당 주임신부, 5·18 구속자 |
안 준 |
죽호학원 이사장, 전 광주시교육감 |
한완석 |
광주제일교회 원로목사 |
염홍섭 |
광주·전남경영자협회장 |
|
|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운동 진영의 포함 여부이다. 2004년이라는 시기는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하고, 5월 운동을 통하여 그에 대한 제도적인 정리와 사법적 처리, 그리고 기념사업까지 거의 마무리된 시점이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시민사회단체가 여러 가지 형태로 관료사회에 포함된 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정원로자문회의에 포함된 사람들중 시민사회단체, 혹은 사회운동 진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경우는 조비오신부가 있을 뿐이다.
5. 지역정치인들의 시기별 비교
1) 구성원 비교
지역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는 정치인들은 지역권력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거라는 공간이 지역권력구조의 인적 구성원을 충원하는 하나의 통로이면서, 동시에 지역권력구조의 일단을 드러내는 것이 선거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970년대와 1990년대에 광주·전남지역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을 비교해보면, 그들의 출신 경력에서 의미있는 변화를 찾을 수 있다. 다음 표 4)는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하기 전인 1970년대에 치루어진 세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출된 의원들과 5월 운동의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난 후에 치루어진 1980년대 후반 이후 세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을 비교한 것이다.
표 4) 1970년대와 1990년대의 국회의원 출신경력 비교
분류 |
1970년대(8, 9, 10대 국회의원) |
1990년대(13, 14, 15대 국회의원) | ||
경력자 수 |
비고 |
경력자 수 |
비고 | |
정당인 |
15 |
우익청년단 1명 |
11 |
5·18관련자 4명 |
재야인사 |
|
정치활동이 금지됨 |
3 |
|
사회운동 |
|
|
5 |
5·18관련자 4명 |
법조계 |
4 |
|
4 |
'70년대와 1명이 겹침 |
행정관료 |
7 |
중정지부장 출신 1명 |
|
|
군 |
5 |
5·16군사쿠데타 주체 1명 |
3 |
5·18관련자 1명 |
교수, 교사 |
1 |
|
6 |
|
상공업(경제계) |
4 |
금융관료 1명 |
7 |
'70년대와 1명이 겹침 |
언론인 |
3 |
|
|
|
교육행정, 학교설립 |
1 |
|
1 |
|
기타 |
3 |
사회사업, 의사, 서화가 각 1명 |
|
|
합계 |
43 |
|
40 |
|
두 시기 국회의원들의 경력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재야인사 및 사회운동 세력에서 찾을 수 있다. 즉 1970년대에는 재야인사나 사회운동 세력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경우가 단 한 건도 없지만, 1990년대에는 재야인사가 3명, 사회운동 활동가는 5명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이다. 특히 한 사람이 재선이나 3선을 한 경우도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선 횟수는 훨씬 늘어난다. 이와 함께 5·18 관련자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경우는 무려 9건이나 된다. 조사시기가 5월 운동이 강력하게 진행되었던 1980년대 중반이 아니라 어느 정도 정리된 다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결국 5·18과 5월 운동이 진행되면서 적어도 국회의원 수준에서는 사회운동 활동가들이나 5·18 관련자들이 대거 당선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회의원 선거 결과가 지역권력구조에 미치는 사회운동 세력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음 표 5)는 1978년에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와 2002년에 있었던 시·군의회의원 선거결과를 비교한 것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시·군의회의원을 비교하는 것이 여러 가지 점에서 무리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두 제도 모두 각각 당시의 수준에서 지역수준의 정치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목적상 비교가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표 5)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1978)과 자치구 시·군의회의원(2002) 비교
정당인 |
농·축수산업 |
상업 |
광·공업 |
운수업 |
건설업 |
금융업 |
약사 |
봉급생활자 |
교육·사회사업 |
무직 |
기타 |
합계 | |
'78 |
0 |
173 |
41 |
36 |
12 |
9 |
1 |
14 |
11 |
6 |
5 |
4 |
312 |
'02 |
22(26.2) |
3 |
9 |
0 |
0 |
11(13.1) |
4 |
0 |
4 |
1 |
5 |
25 |
84(100) |
78(26.8) |
106(36.4) |
33(11.3) |
1 |
2 |
22 |
3 |
0 |
4 |
0 |
9 |
33(11.3) |
291(100) |
* 2002의 웟 칸은 광주광역시, 아래칸은 전라남도의 지방의원 수치이다.
* ( )은 해당 항목의 비중을 나타낸다.
표 5)에서 나타난 결과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령 산업구조의 변화는 1차산업 종사자의 비중이 적어지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또 2002년도 시·군의회의원 선거결과에서 기타로 분류되는 경우가 30%에 이른 것은 대분류로는 표시할 수 없는 직업군이 늘어난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원인이 작용하겠지만, 표 5)가 보여주는 가장 의미있는 수치는 정당인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1970년대에는 정당인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단 한 건도 없었지만, 2002년에는 정당인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26% 이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수치는 2002년 무렵에 지역 수준에서 정치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 이 시기에는 1970년대 1980년대에 걸쳐서 재야나 사회운동으로 존재하던 영역들이 제도화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운동 활동가 출신이나 시민사회단체 구성원 출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2) 선거 공약 분석
지역권력구조와 관련하여 5·18과 5월 운동이 가져 온 가장 결정적인 효과는 거기에 포함되는 인적 구성원을 매우 다양하게 확장했다는 것이다. 광주·전남지역의 경우 1970년대까지는 관료와 기업가들이 지역권력구조의 주축을 이루고, 거기에 전통적인 유력 집안 출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 5·18 관련자들을 중심으로 재야인사와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면서, 그리고 5월 운동을 통해 사회운동 진영의 발언권이 커지면서 지역권력구조 역시 인적 구성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민주화의 진전으로 보아도 무방한가? 이를 위해 정치영역에서의 지배담론을 분석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그 한가지 예로 선거 공약을 제시한다. 다음 표 6)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이 제시한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관련 선거공약들이다.
표 6) 2002년 지방선거시 새천년민주당의 광주광역시 및 전라남도 관련 공약
광주광역시 |
○ 광주 도심 공동화현상에 대한 대책 조기에 마련 |
전라남도 |
○ 동북아경제권의 요충지인 서남권지역이 국제물류의 거점도시가 되도록 개발 |
새천년민주당의 선거공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된 담론들은 산업의 재구조화를 통한 경제발전, 복지 향상, 환경 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된 담론은 정부 수립후 50년 동안 지속되어 온 경제발전이데올로기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이나 인권, 평화 등의 담론은 광주지역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 광주광역시 관련 공약에서 광주정신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복지도시와 병행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그나마도 '삶의 질 향상'이라는 어구를 수식하는 정도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지역권력구조 편입이나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정계 진출 등으로 나타나는 지역권력구조의 변화를 민주주의의 확장이나 진전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지역권력구조를 보다 민주적으로 바꾸기보다는, 활동가들이 자신의 활동경력과는 달리 지역의 지배담론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6. 결어
광주·전남지역의 권력구조는 동 시기의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크고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5·18과 5월 운동의 효과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동안 일반 시민들을 통제하고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의 한계를 보여주었으며, 동시에 일반 시민들을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하면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그 결과 그때까지의 지역권력구조는 어떤 형태로든 변화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을 제시한 것은 5월 운동이었다. 1980년대 전반에 걸친 5월 운동은 사회운동 세력의 질적이고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으며, 지역내의 의사결정구조를 크게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본 연구를 통해 그러한 변화의 가시적인 성과가 지역권력구조를 구성하는 인적 요소의 변화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본 연구는 그러한 인적구성의 변화가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성격도 있지만, 보다 크게는 지배권력의 외연 확대에 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미 선거를 통해 확인되었다. 즉 평소에는 관료사회의 경직성이나 복지부동, 무능력 등을 질타하다가, 또 사회의식이 희박하고 개별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에 대해 비난하다가, 선거시만 되면 '관료출신이 유능하다'든가 'CEO형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식의 담론이 난무하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사회운동 활동가들마저 그러한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크게 변화하였다. 또 오늘날 시민사회단체 구성원들이 정부조직의 요소요소에 배치되고 있으며, 그 비중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민주화운동 등, 1980년대까지의 사회운동의 결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정부조직의 투명성, 의사결정의 합리성 등 보다 민주적이고 열린 공간으로 정부조직이나 지역권력구조가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는 광주·전남지역의 권력구조의 변화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회의적인 결론을 얻었다. 그보다는 사회운동의 진전 속에서 정당성의 토대가 약화되었던 기존의 권력구조가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충원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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