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는 재미/노래도 부르고

빈쇠전 (신경림 시, 문홍주 곡)

새벽길 2024. 5. 25. 01:39

경림 시인이 지난 5월 22일 어제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신경림 시인 하면 가난한 사랑노래라는 시를 떠올린다. 그의 부고가 뜨자 페북에 그를 추모하며 '가난한 사랑노래'를 올린 이들이 꽤 있었다.

노찾사 3집에 실린 '사랑노래'는 신경림의 시가 아니라 백무산의 시 <김씨의 사랑노래>에 신지아가 곡을 붙인 것이다. 노찾사 3집에서는 '살다보면'이라는 노래로 알려진 권진원이 불렀다. 이 노래가 노래방에 없어서 아쉬웠는데...

나는 신경림 시인의 시를 가지고 만든 노래 가운데 '빈쇠전'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대학 학부 시절 이 노래와 '돌아가리라'라는 노래를 곧잘 부르곤 했다. 빈쇠전과 돌아가리라 모두 신경림 시인의 두번째 시집 <새재>(1979) 가운데 장시 '새재'의 일부에 문홍주가 곡을 붙인 것이다. 이런 시들 때문에 신경림 시인을 민중시인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돌아가리라'는 노노단2(노동자노래단 2집, 1989)에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리라'로 노가바하여 실리기도 했다.
 
나도 돌규처럼 '빈쇠전'의 가사 " 너희들은 오로지 너희들의 편이다. 나는 다만 우리 위해 싸울 뿐이다"라는 대목에서 전율했다. 이렇게도 계급의식을 드러낼 수도 있구나.  

오랜만에 빈쇠전을 불러봤는데, 역시 어릴 때 즐거부르던 노래는 몇 군데 가사가 애매한 부분이 있었지만, 요즘도 매일 부르는 것처럼 바로 떠올려진다. 민요연구회에서 제작한 테입에 이 노래가 실려 있어서 올려놓는다.  
  

민요연구회 - A_08_빈쇠전.mp3
4.54MB


빈쇠전
                                                                 신경림 시, 문홍주 곡
 
그들이 얼마나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 말하지만
나는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우리들 어리고 어리석은 백성의 소란으로
나라를 되찾는 일이 더욱 어지러워진다지만
나라 걱정 백성 걱정에 잠 못 이룬다 하지만
나는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너희들은 오로지 너희들의 편이다 나는 다만 우리 위해 싸울 뿐이다
살아남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 위해 죽을 뿐이다
멀리서 둥둥둥 북소리 들리고
싸우리라 싸우리라 이 모진 목숨을 바쳐
 

돌아가리라
                                                           신경림 시, 문홍주 곡
 
모내기전에 돌아가리라 황새떼오기 전 돌아가리라
정참판네 하인들 눈 뒤집고 우릴 찾는다해도
두팔을 들어 어깨를 끼고 열이 아니다 스물이 아니다
빼앗긴 땅 되찾으려다 쫓겨난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찔레꽃이 피기 전에 돌아가리라 새우젖배 오기 전에 돌아가리라
그 어느 한곳 찾아 목숨 걸건가 이 억센 두 주먹 불끈쥔 채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두팔 들어 어깨를 끼고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이 억센 주먹 불끈쥔 채

이 억센 가슴 어디에 쓰랴 더딘 봄날 푸진 햇살만
등 줄기에 따스운데 잠 덜깬 연이는 나를 수줍게 웃네
이 억센 다릴 어디에 쓰랴 그의 몸에선 비린 물내음
그의 몸에서는 신살구내음 취할 듯 진한 살구꽃내음
이 억센 주먹을 어디에 쓰랴 부엉이가 울고 여울이 울고
여울 속에서 이무기울고 새벽 하늘 성근별 헛헛한 가슴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두팔을 들어 어깨를 끼고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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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41567.html
‘농무’ 신경림 시인 별세…민중시로 우리의 마음 울리고 (한겨레, 최재봉 선임기자, 임인택 기자, 2024-05-22 11:47)
향년 89…‘새재’ ‘가난한 사랑노래’ 등
1973년 자비로 300부 한정 ‘농무’
이후 창비시선 1호로 시선집 기조
1955년 동국대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독서회에 가담해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좌익계 서적을 탐독했고, 이듬해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를 비롯한 시가 추천되어 등단한다. ‘갈대’는 그의 첫 시집 ‘농무’를 대표하는 민중시들과는 전혀 다른 결을 지녔지만, 호젓한 정조와 삶에 관한 명상적 태도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갈대’ 전문)
이른 나이에 등단한 시인은 그러나 이듬해 홀연 낙향한 뒤 ‘겨울밤’을 발표하는 1965년 말까지 10년 가까운 시기를 강원도와 충청도 등지를 떠돈다. 이때 광부와 농부, 장사꾼, 인부, 강사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목격하고 경험한 밑바닥 삶은 새로운 차원의 민중시로 바뀌어 시집 ‘농무’의 몸통을 이룬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겨울밤’ 앞부분)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농무’ 앞부분)
그의 시에 그려진 것은 전통적인 농촌 사회가 무너져 가면서 농민들과 날품 인부들이 겪는 슬픔과 고통, 분노였다. 이런 시를 두고 문단 안팎에서 신선하고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쏟아졌지만, 신경림 자신은 “실상 제 시는 백석이나 이용악 등등 그 전부터 있다가 끊어진 맥을 다시 이은 거”라고 어느 대담에서 말한 바 있다. 
시집 ‘농무’가 1973년 자비출판 형식에 300부 한정판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이채롭다. 어디에서도 시집 출간 제의가 없어서 고민하던 그에게 소설가 이문구가 자신이 일하던 잡지 ‘월간문학’의 이름을 딴 월간문학사 명의를 빌려준 것이다. 이렇게 등록도 되지 않은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이 이듬해 창작과비평사(창비)가 제정한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고, 1975년에는 창비에서 출범한 ‘창비시선’의 첫 권으로 증보 출간되었다. 올해 500권을 넘어선 창비시선의 첫 권으로서 시집 ‘농무’는 이 시집 시리즈의 기조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민중시의 전범을 제시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시집의 대중화라는 물꼬도 튼다. ‘농무’는 출간 다음달 비소설 베스트셀러 1위, 당해 4위를 기록한다. 이듬해까지 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민음사, 1974)와 함께 1만부를 돌파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민요에 심취한 그는 1984년에는 민요연구회를 만들어 전국의 민요 현장을 누볐다. 그에 앞서 1979년에는 저 유명한 시 ‘목계장터’가 실린 두 번째 시집 ‘새재’를 출간한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목계장터’ 앞부분)
신경림은 1980년대에도 ‘달 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 노래’ 등을 부지런히 내놓는 한편, 산문집 ‘민요기행’과 평론집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등을 펴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로 시작해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로 마무리되는 시 ‘가난한 사랑 노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1990년대에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는 한편 시집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등을 묶어 냈다. 산문집 ‘시인을 찾아서’는 베스트셀러 도서가 되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로도 ‘뿔’ ‘낙타’ 등을 꾸준히 내며 영원한 현역을 구가한 시인은 생전에 낸 마지막 시집 ‘사진관집 이층’에 실린 시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에서 자신의 시와 삶을 이렇게 담담하게 정리했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부분)
 
https://www.yna.co.kr/view/AKR20240522070651005?input=1195m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쓴 대표 민중시인 신경림 별세(종합)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2024-05-22 11:48)
민초들 애환을 질박한 생활언어로 노래한 '민중적 서정시인'
시인은 이후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새재'(1979), '달 넘세'(1985), '민요기행 1'(1985), '남한강'(1987), '가난한 사랑노래'(1988), '민요기행 2'(1989), '길'(1990),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9), '낙타'(2008), '사진관집 이층'(2014) 등의 시집을 써냈다. 
 
https://www.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2405232156005
[여적] 민중의 벗, 신경림 (경향, 이명희 논설위원, 2024.05.23 18:19)
시인은 단골 선술집 주인의 딸을 위해 두 편의 시를 지었는데, 사연이 있다. 당시 연인이 지명수배를 당해 희망이 없다는 술집 딸의 얘기를 듣고, “결혼하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결혼식 주례까지 선 그는 주례사는 1분 만에 끝내고, ‘너희 사랑’이란 축시를 읽었다. 그 흥에 나중에 덤으로 쓴 시가 ‘가난한 사랑 노래’이다. 이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는 시구는 언제 읽어도 콧등을 찡하게 한다.
시인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잘살고 그 아들딸들이 마음 놓고 잘사는 나라’가 수록된 어린이 잡지 ‘별나라’를 좋아했다고 한다. ‘별나라’가 아닌 세상에서 ‘이웃’을 위해 우리는 어떤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의 ‘민생’이라는 호명 속에는 ‘가난’이 읽히지 않아 씁쓸하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농무’)
 
https://www.yna.co.kr/view/AKR20240524149000005?input=1195m
"시의 고아가 된 심정으로 이별"…민중시인 신경림 영결식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2024-05-24 21:55)

후배 문인들 조시 낭독하며 울먹여…생전 영상에선 "밝은 시 쓰고파"
미발표 시 모아 유고시집 발간도 추진
"시의 고아가 된 심정으로 우리는 신경림 시인과 영원히 이별하는 자리를 갖게 됐습니다."
2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장례식장에선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시인 고(故) 신경림의 영결식이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시간 남짓 진행됐다.
시인의 장례가 한국시인협회와 한국문인협회 등 문인단체들이 함께 참여하는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진 가운데, 이날 시인의 약력을 소개한 도종환 시인(국회의원)은 "시의 고아가 된 심정"이라면서 애통해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원로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조사에서 "선생은 이름난 시인이 되고 난 다음에도 유명인 행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면서 "그는 시에서 자신의 잘난 모습보다 못난 모습을 더 자주 묘사했다. 독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자신들의 감춰진 자화상을 보고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문정희 국립한국문학관장(시인)은 추도사에서 "시인은 죽고 난 후 그의 시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 죽는다고 한다"며 "선생의 시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오래 살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료와 후배 문인들의 조시 낭송도 이어졌다. 이근배 시인(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한 시대를 들어 올린 가난한 사랑노래 온 누리에 펼치소서'라는 조시를 낭독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정희성 시인은 '신경림 선생이 가셨다'라는 시에서 "선생은 못난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셨다 /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며 / 세상사 물으면 짐짓 손저어 대답하면서 / 선생은 홀로이 슬픈 낙타처럼 늙으셨다"고 나직이 읊었다.
생전에 고인을 인터뷰한 영상이 상영되자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밝은 시를 쓰고 싶은데…. 밝은 세상을 우리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합니다. 밝은 세상이 돼야만 밝은 시도 나올 수 있는 거지요."
생전에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고인을 위해 후배 예술인들은 그의 시에 노래를 붙인 곡들도 준비했다. 시 '돌아가리라'에 곡을 붙인 노래를 가수 정태춘 등 민중노래패 '민요연구회' 멤버들이 나와서 함께 부르며 고인을 기렸다.
이날 영결식에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전 창비 편집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 문화계 인사들 외에도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 등 정치권 인사도 일부 참석했다.
박 원내대표는 "선생의 시는 언제나 사람을 향해 있었고 시대와 함께했다"며 "어른이 귀한 시대에 참 다정한 어른 한 분을 또 잃어서 슬프고 안타깝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25일 오전 5시 30분 발인을 거쳐 고향인 충북 충주의 선영에서 영면에 들 예정이다.
출판사 창비는 유족과 협의를 거쳐 고인의 미발표 시들을 모아 유고 시집을 출간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창비는 고인의 1975년 첫 시집인 '농무'와 마지막 시집인 '사진관집 이층'(2014년)을 간행하는 등 인연이 깊은 출판사다.
다만, 창비 관계자는 "(신경림 시인의) 차기작이 이미 몇 년 전부터 출간 예정 리스트에 있기는 했다"면서 "유고 시집 출간은 내부 검토와 유족과의 협의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