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의 생각/국제, 평화, 민족

프, 반자본주의신당 드디어 창당대회

새벽길 2009. 2. 11. 14:10
반자본주의신당이 잘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좌파당과의 연대 또한 잘 되었으면 좋겠다. 
사르코지에 맞서 프랑스 좌파진영이 의기투합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기에서 반자본주의 신당과 좌파당의 행보는 어떠한지 궁금했는데, 대부분의 신문에서는 여기까지는 다루지 않았다. 물론 검색을 잘해보면 알 수도 있었을 텐데... 확실히 국제연대 쪽으로는 아직 감이 부족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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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좌파, 사르코지 독주 제동거나 (서울, 파리 이종수특파원, 2009-02-06  15면)
 
지난달 29일 벌어진 프랑스 노동계의 총파업이 지리멸렬 상태의 좌파 진영을 묶어주는 구심점이 될 전망이다. 프랑스 좌파 진영의 12개 정당·정파가 3일(현지시간) 저녁 사회당의 제안으로 모처럼 한자리에 만났다. 이들은 공산당 당사에서 회동한 뒤 발표한 공동 성명서에서 “지난달 29일 총파업 당시 제기된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 모임에는 공산당을 비롯, 중도 좌파인 사회당,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한 ‘노동자의 투쟁’ 등 다양한 좌파 진영의 정당·정파가 참석했다. 모임에 참석했던 마리 조르주 뷔페 공산당 당수는 ‘좌파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좌파 진영 정당·정파가 한꺼번에 모인 것은 아주 의미있는 일”이라며 “우리는 너무 오랫 동안 ‘한몸’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프랑스 좌파 진영은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분화하면서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좌파의 전통적인 이슈들을 점하고 사회당 인사들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파격적인 노선을 취하면서 제1 야당인 사회당이 내홍에 빠져 좌파는 오랫동안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2006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로 나섰던 세골렌 루아얄이 최근 ‘사회당-극좌파 연합’을 주창하면서 연대의 물꼬를 텄다. 여기에 지난달 29일 노동계가 주도한 총파업이 좌파 진영을 묶어주는 촉매 역할을 했다. 뷔페 당수도 전망에 대해 “29일 총파업이 우리를 한 자리에 모았다.”면서도 “노동계와 같은 역할을 하기보다는 총파업 당시 제기된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데 힘을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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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거듭나는 프랑스 좌파 (서울, 이종수 파리 특파원, 2009-02-07  26면)
 
최근 프랑스 좌파 진영의 움직임이 부쩍 활발해졌다. 극좌파 진영인 ‘혁명공산주의연맹(LCR)’이 외연을 넓혀 6일(현지시간) ‘반(反)자본주의 신당(NPA)’을 창당했다. 다른 축에서는 좌파 정당이 연대해 유럽의회 의원 선거,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개혁 노선 수정 요구 등 사안에 따라 공조를 강화하고 있다.
 
프랑스 좌파 진영은 그동안 너무 미세한 분화와 현실적 대안 제시 실패 등 몇가지 원인이 겹쳐 ‘무기력증’에 걸려 있었다. 특히 186석의 의석을 가진 거대 야당인 사회당의 존재는 거의 유명무실했다. 당내 중진들이 이끄는 계파간 불협화음으로 적전 분열상마저 드러냈다. 또 사르코지 대통령의 ‘이슈 선점’ 앞에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면서 제1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전통의 공산당과 녹색당도 2007년 대선에서 예상 밖으로 저조한 지지율을 얻으면서 ‘잊혀진 정당’이 돼가고 있다.
 
이처럼 주요 좌파 정당이 무력해지자 극좌파 진영이 나섰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LCR이다. 일간 르 몽드와 르 피가로 등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LCR 5일 역사속으로… 6일 NPA로 확대 탄생’을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LCR는 1969년 태어났다. 1968년 5월 혁명 뒤 ‘친 트로츠키주의-반 스탈린주의’ 진영의 좌파 그룹이 결집한 정당이다. 관념적 과격성을 보이다가 1997년부터 총선에 자체 후보를 내고 노동총동맹 등 노조연합과 연계해 현실 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2002년 대선 당시 후보였던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좌파 스타’ 로 급부상했다.
 
현재 집배원으로 일하고 있는 34세의 브장스노는 2007년 대선에서도 4.08%대의 지지율로 전통의 공산당 후보를 제치며 기염을 토했다. 또 지난해 여론조사에서는 2012년 대선에서 사르코지에 맞설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면서 ‘브장스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브장스노는 지난해 말 사회당과 거리를 둔 범좌파의 통합을 주창하면서 LCR보다 몸집이 3배나 불어난 NPA 창당을 주도했다. 정치학자 드니 팽고는 5일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브장스노가 이끄는 NPA의 창당으로 정치 영역이 요동을 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좌파의 활발한 움직임은 LCR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3일에는 좌파 진영 12개 정당·정파가 모처럼 회동했다. 그들은 지난달 29일 노동계가 주도한 총파업 당시 분출한 다양한 주장에 대한 지지를 공식 밝히고 현실적 대안을 모색하기로 합의했다. 또 사르코지 대통령에게는 “개혁 노선을 바꾸라.”고 촉구했다. 앞서 지난해 11월28일에는 공산당의 당수로 연임한 마리 조르주 뷔페 당수가 2009년 유럽의회 의원 선거에서 좌파가 공동 전선을 형성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의 정치적 힘은 아직 크지 않다. 2007년 대선에서 10% 정도의 지지율을 확보한 정도다. 그리고 하원의 의석 수도 많지 않아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해서 일부는 사회당과 연대하거나 비슷한 성향의 소수 그룹이 연합해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 맞는 대안을 모색하고 거듭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면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좌우의 균형을 맞추는 데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좌파의 이런 활발한 움직임을 보노라면 침잠한 한국 좌파의 현실이 더 크게 다가온다. ‘종북주의’ 논란으로 분당한 민주노동당과 진보 신당, 당 정체성 혼란으로 무기력증에 빠진 듯한 민주당…. 그들은 언제 ‘정치 기지개’를 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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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 반자본주의신당 드디어 창당대회 (레디앙, 2009년 02월 06일 (금) 15:23:12 장석준)
[Left Side Story] 좌파당, 공산당과 연대,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  
 
2월 5일부터 8일까지 4일간 파리 외곽도시 생드니에서는 반자본주의신당(NPA)의 창당대회가 열린다. 창준위 단계에서 워낙 오랜 사전 준비와 토론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당이 이미 창당을 마쳤던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주말에야 비로소 정식 창당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진보신당,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 등의 대표단이 창당대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반자본주의신당에 대해서는 국내 진보 매체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여 왔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은, 독일 좌파당과 함께, 그간 진부하고 식상하기만 했던 유럽 좌파 지형에 오랜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전 세계 진보좌파의 이목을 끌고 있다. 
 
특히 반자본주의신당은 젊은 정치인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이름과 함께 더욱더 매력을 발한다. 브장스노는 최근 <파리 마치>의 여론조사에서도 호감도 60%를 기록한 현재 프랑스의 대표적인 좌파 대중 정치인이다.
 
트로츠키주의여 안녕?
반자본주의신당의 창당 기반은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LCR)이라는 트로츠키주의 조직이다. LCR은 제4인터내셔널 소속으로서, 한국의 ‘다함께’와는 흐름을 달리 한다. 그간 LCR을 이끌어오던 사람들은 대부분 68년 혁명운동 세대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세대의 지도자들은 신세대인 브장스노를 중심으로 사회당 왼쪽의 좌파를 재구성하려는 큰 승부수를 띄웠다.
 
LCR은 반자본주의신당 창당대회를 앞둔 2월 5일에 대의원대회를 통해 아예 조직을 해산하는 결정을 통과시킬 예정이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LCR 일부 조직원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트로츠키주의 전통을 너무 쉽게 저버렸다, 브장스노의 인기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등등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알랭 크리뱅(68년 5월 항쟁 당시 청년 지도자들 중 한 명), 다니엘 뱅사이드(저명한 맑스주의 철학자) 등 LCR 고참 지도자들의 뜻은 강력하다. 지금이야말로 좌파 재구성의 절체절명의 기회라는 것.
 
그렇다고 반자본주의신당이 단순히 LCR 플러스 알파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LCR 조직원이 최대 3천 명이었던 데 반해 반자본주의신당은 현재 당원 수가 1만 명에 가깝다. 노동 현장과 대학가에서 새롭게 급진화한 세대들이 다수 결합한 것이다. 또 다른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노동자 투쟁’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 주제 보베와 함께 대안세계화 농민운동을 벌여온 이들도 당에 합류했다.
 
당의 이념 역시 이런 새로운 인적 구성을 반영하여, 이제는 더 이상 트로츠키주의를 내세우지 않는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말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본주의 반대’로 이를 대신한다. 브장스노와 그의 동지들은 ‘생태사회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반자본주의신당과 함께 좌파당도 등장 
그렇다고 반자본주의신당에 장밋빛 미래만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당은 벌써부터 현실정치의 선택을 놓고 커다란 고민에 빠져 있다. 브장스노라는 걸출한 대중 정치인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대통령제인 프랑스 정치에서는 커다란 강점이다. 하지만 지역구 결선투표제를 실시하는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어쨌든 선거연합의 문제가 대두하지 않을 수 없다.
 
반자본주의신당의 창당 정신은 일단 사회당과는 어떠한 제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당을 제외한 좌파정당들과의 협력, 연대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지녀야 하는가? 그 강도를 놓고 이미 일부 이견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이 문제가 더욱 부각되는 것은 반자본주의신당의 출범과 거의 동시에 프랑스 진보좌파 안에 또 다른 신생 좌파정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프랑스 사회당 당대회 과정에서 당 내 좌파인 장-뤽 멜랑송 상원의원 등이 탈당하여 좌파당이라는 새 당을 출범시켰다. 이 당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 좌파당을 모델로 하고 있다.
 
좌파당은 또 다른 사회당 탈당 세력들(장-피에르 슈베느망을 중심으로 한 ‘시민공화운동’), 녹색당 좌파, 공산당 그리고 반자본주의신당과 선거연합을 구성해 총선에 대응하려 한다. 좌파당의 기본 구상은 이 선거연합을 통합정당으로까지 발전시켜 프랑스에도 독일 좌파당과 비슷한 스펙트럼을 지닌 강력한 대안 좌파정당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반자본주의신당은 일단 이 구상에 대해 비판적이다. 반자본주의신당의 대다수는 독일 좌파당에 비해 사회민주주의 전통에 대해 더욱 거리를 두려 한다. 또한 그간 공산당이 사회당과 선거연합을 맺어왔기 때문에 공산당과의 협력이 자칫 사회당까지 함께하는 연합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우려한다.
 
하지만 지난 1월 29일 총파업 당시 공산당, 좌파당, 반자본주의신당은 파업을 지지하며 긴밀하게 협력한 바 있다. 이를 계기로 반자본주의신당의 일부가 좌파당과의 대화 및 공동행동을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럽의회 선거에서 반자본주의신당과 좌파당이 공동후보명부를 제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반자본주의신당의 등장은 프랑스 좌파 재구성의 강력한 중핵이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것으로 재구성 과정이 완결된 것은 아니다.
 
100여 년 전 공화주의적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와 일군의 맑스주의자들이 힘을 합쳐 프랑스 최초의 통합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했던 것과 비슷한 과정이 지금 21세기의 프랑스에서 반복되고 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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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주의’ 선언 (레디앙, 2009년 02월 10일 (화) 11:36:17 박지연 / 파리통신원)
[NPA 창당대회] 브장스노 대변인 선출, 공산당 등과 선거연합
 
반자본주의신당이 공식적으로 창당되었고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2월 5일부터 8일까지 나흘간 파리 교외 생드니에서 진행된 당 대회에서 첫날인 5일, 혁명적 공산주의동맹(LCR)이 해체되었다. 제 18회 LCR 당 대회이자 마지막 당 대회가 된 이 날, 해체 제안 연설은 68혁명세대의 상징적 인물인 알랑 크리빈느가 시작하였다.
 
68세대의 상징이자, 올리비에 브장스노 이전에 LCR의 대표적 전략가로서 활동을 해 온 알랑 크리빈느가 해체를 위한 연단에 올랐을 때, 이미 그것 자체가 LCR의 역사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당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크리빈느는 “혁명적 전투는 계속된다”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그는 “정당은 종파와는 다르다. 정당의 목표는 정당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당은 LCR에서 배운 많은 전략들을 실행할 것이다 … 자본주의의 몰락이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지금이야말로 반자본주의를 위한 새로운 정당 건설을 위한 시간이다. NPA는 내일을 위한 불가피한 반자본주의자들의 힘이 될 것이다”라고 단호한 어조로 선언하였다. 이어서 “우리는 이미 정부에 의해서 두 번의 당 해체를 경험하였다.(69년, 73년) 그러나 이번엔 우리 스스로가 해체하는 것이다”라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제 해체는 실행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계속 진행할 것이며 모두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올리비에 브장스노로 이어진 연설에서 그는 “LCR의 위대한 유산이 매우! 매우! 자랑스럽다”고 선언하였다. 거수로 진행된 LCR 해체에 관한 투표에서 87.1%가 찬성하여 이로써 40년간 이어져 온 정당은 새로운 역사를 위하여 길을 비켜주었다.
 
대회장 밖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티셔츠, 볼펜, 당기관지 등 LCR 관련 물품 60% 할인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벽에는 ‘가게 주인이 바뀐 관계로 대폭 할인’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오후에 진행된 제4인터내셔널과의 관계를 위한 의제에서도 새로운 정당의 새로운 행보를 위하여 NPA는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 날 회의에서 새로운 정당은 국제 연대라는 위대한 혁명 전통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라며, NPA 또한 제4인터내셔널에 남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 정통을 뛰어넘는 새로운 정당이어야 함이 더 주요한 과제임을 인식하였기에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만, 여태까지 LCR이 제4인터내셔널 프랑스의 주요한 자금책이었던 점을 고려하여 2012년까지 NPA는 재정적 지원만은 계속하기로 하였다.
 
대회의장을 장식했던 ‘100% 좌파 LCR’의 붉은 깃발과 플래카드는 정리되었고,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반자본주의신당 창당대회장은 어느새 연단과 벽면에 NPA의 새로운 깃발이 장식되었다.
 
6일부터 8일까지 3일 동안 현 정치 상황, 당면과제와 이와 관련한 규약, 당 강령, 당명 등에 관한 토론과 표결이 시작되었다. 각각의 위원회별로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각국에서 참가한 해외 좌파정당들과 운동단체들은 LCR과 NPA의 정치국 일원인 프랑스와 사바두의 사회로 ‘경제위기와 환경위기’를 주제로 한 회의가 따로 열렸다.
 
프랑스와 사바두는 발제 연설에서 오늘날 전 세계에서 자본가들의 문제가 비정규직이라는 시스템을 가동시키며 혹독한 착취가 진행되고 있으며, 문제는 생태에 관한 위협으로까지 발전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각국의 정당에서 자신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경제적 문제 혹은 정치적 특수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다시 프랑스와 사바두는 이러한 모든 발언들에 기초하여 우리는 실천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적 사회운동을 조직화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모색할 것과 그러한 틀 속에서 오는 4월 3일 이날의 토론 내용이었던 ‘경제와 환경위기’에 관한 국제적 시위를 유럽의사당이 있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조직할 것이라고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대회 3일째인 7일에는 남미, 캐나다, 아프리카 그리고 한국의 진보신당과 사회주의노동자당 준비위원회 등 25여 개 나라 150여 명의 좌파정당 대표단 혹은 운동단체들이 공식적으로 참가한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자유를 위한 민중전선’의 대표참가자가 공식 발언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본 회의에서는 전날 각 위원회 혹은 지역 당에서 올라온 의제에 관한 거수 투표가 진행되었다. 사회주의에 관한 문구에서는 ‘사회주의’, ‘생태사회주의’, ‘21세기 사회주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여, NPA는 ‘21세기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당명에 관해서는 반자본주의신당, 혁명적 반자본주의당, 혁명적 좌파국제주의동맹, 반자본주의당, 반자본주의좌파당 5개가 투표에 붙여졌으며, 이 중 반자본주의신당과 혁명적 반자본주의당이 결선 투표에 올라 반자본주의신당 NPA의 이름이 고수되었다.
 
이 날 많은 안건들이 투표되었으며 어떤 것들은 반대표와 찬성표가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이 모든 것이 끝난 뒤 이것들이 강령으로 채택되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 표의 반대표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언론과 다른 여타 좌파정당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며 기다리던 다른 좌파 정당들과의 연대에 관한 투표와 NPA 중앙당위원과 정치국 선출은 대회 마지막 날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모두들 조금스레 내놓던 예상을 뒤엎고 차후의 정치, 지역 사업에 다른 좌파와 연대할 것이라는 방침이 80%의 찬성을 얻어냈다.
  
그래서 표면상으로는 유럽의회 선거에 같이 공동 전선을 형성하고 후보를 같이 내는 것에 대문이 열린 듯하다. 하지만 NPA가 내건 조건이 연대를 기다리던 공산당과 좌파당에게는 부담을 주고 있다. NPA는 이미 창당 이전부터 사회당과는 좌파전선을 형성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고, 이번 선거를 위한 좌파 전선은 당장 눈앞에 있는 유럽 선거뿐만 아니라 지방선거까지 같이 하는 조건을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중앙당위원은 192명의 중앙위원들 중 전 LCR의 출신은 45%로 과반수를 넘기지 못하게 스스로 제한하였다. 이는 NPA가 LCR에서 탄생한 것임에도 스스로 종파주의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이 중에서 정치국이 구성되었으며, 또한 중앙위원회에서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78%의 득표율을 차지하여 반자본주의신당 대변인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모든 공식대회는 마감되었다. 여성당원 35.3%, 남성당원 64.7%, 직업별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40%, 교수 및 연구직 10.3%, 교사 17.6%, 실업자 6%, 학생 12.4%, 농업 및 장인 2.4% 등의 분포를 보이고, 18세 이하 당원 213명, 64세 이상 당원 338명, 34세부터 54세까지가 가장 많은 분포를 가진 새로운 당이 탄생하였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69년 4월 10여 명의 혁명적 정치가들 앙리 웨버, 줄리앙 드라이, 피에르 모스코비치, 소피 부세 페터슨 그리고 프랑스의 대표 지성 중의 한 명인 맑시스트 철학자 다니엘 뱅사이드 등이 모여 창당을 도모하여 120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혁명적 공산주의동맹이 40년이 지난 2009년에 새로운 장으로 진입한 것이다.
 
노혁명가들은 한결 같이 같은 말을 했다. 어떠한 아스라한 향수도 가지지 않는다고. 그래서 68년 당시의 68은 실패했을지라도 오늘날 68은 승리를 향하여 진군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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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적 좌파의 새로운 실험 (참세상, 안재훈 (사회주의노동자정당 준비모임)/ 2009년02월11일 10시18분)
[기고] LCR 해산과 NPA 창립
 
2009년 2월 5일부터 8일까지 프랑스 파리 교외 생드니의 유로사이트 컨벤션센터에서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LCR)의 해산총회와 반자본주의신당(NPA)의 창립 총회가 열렸다. 이는 1968년 5월 투쟁의 성과물로 건설된 LCR이 40여년의 역사를 마감하는 자리이자, NPA 건설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정치적/문화적/세대적 확장의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는 자리였다.
 
LCR의 NPA로의 전환과 좌파정치운동의 지각변동은 프랑스 내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 좌파진영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번 LCR 해산총회와 NPA 창립총회에 사회주의노동자정당 준비모임과 진보신당이 초청을 받아 참여했고, 그 외에 21세기코리아연구소 등이 참여했다.
 
LCR의 역사적 해산: 두 개의 경향, 두 개의 동의안
2월 5일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LCR 해산총회는 450여명의 대의원과 100여명의 해외 대표단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총회에는 두 개의 안(A안과 B안)이 제출되어 찬반토론의 형태로 오전과 오후에 걸쳐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두 개안은 LCR의 해산과 NPA의 조직적 결합에 대해서 이견이 없었지만, 결합 이후 제4인터내셔널(트로츠키주의 국제조직)과의 관계설정 문제를 둘러싸고 큰 견해 차이를 보였다. 알랭 크리빈이 설명한 A안은 다수파의 견해로 LCR 해산 이후에 NPA 내부에 별도의 LCR 그룹/경향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LCR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왔던 제4인터내셔널 문제 역시 NPA안에서 열어놓고 논의하고 결정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B안의 제안자인 크리스티앙 피케는 소수파의 입장을 대변하여 LCR의 해산과정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된 구LCR 회원의 조직으로서 ‘제4인터 협회’(association)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다수파는 협회의 설립이 NPA가 조직적으로 공고화되어야 하는 시점에 불필요한 안팎의 오해와 분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으므로 소수파의 견해에 반대했다.
 
오전과 오후의 공개회의를 이후에 진행된 저녁의 비공개 회의에서 두 개안과 재정문제 등에 관한 표결이 이루어졌는데, A안이 참석 대의원 87.1%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B안은 11.5%의 표를 얻었고, 1.4%는 기권했다. 이와 같은 LCR 총회의 최종적 결정은 일체의 기득권을 넘어 NPA를 아래로부터 건설하겠다는 LCR 노장투사들의 단호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NPA 창립: 새롭고 젊어진 반자본주의운동
NPA 창립총회는 프랑스 전국에서 모인 630여명의 대의원들 참여한 가운데 2월 6일부터 2박3일의 일정으로 같은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총회는 2월 6일 오전의 전체회의를 통해 개막되었는데, 오전 회의에는 회의진행 설명, 투쟁보고(최근 구 프랑스 식민지 과달루페에서 일어난 총파업 사례), NPA 건설 경과보고의 순서로 이어졌다. 간략한 경과보고를 통해 NPA가 당의 기본단위인 467개의 위원회와 9,123명의 당원으로 결성되는 성과가 확인되었다. 회원 중에서 여성비율이며, 새로 발간된 주간지 구독자가 11,000명을 넘었다는 보고도 이뤄졌다. 경과보고를 증명하듯이, 전날의 LCR 총회보다 많은 참석자들로 회의장은 가득 찼다. 또 LCR 총회장이 노장들의 진중한 토론이 주를 이루었다면, NPA 총회의 분위기는 젊은 당원들의 활기찬 생동감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경과보고에 이어 총괄 정치보고는 지난 2002년과 2007년 대선에서 LCR의 ‘붉은 우편배달부’ 후보로서 대중적 스타로 부상한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나섰다.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환경/공해문제까지도 포함해서 자본가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은 노동자 총파업 밖에 없다”며 “공적자금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할 것이 아니라 투쟁으로 맞서자”고 주장했다. 또한 “NPA가 경제위기 속에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반자본주의 투쟁의 정치적 도구”로서 전투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대중적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언론의 지극한 관심이었다. 회의장을 움직이는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NPA 당원들은 그러한 언론의 선정주의에 대해 소리를 내며 야유를 보냈다. NPA에 당원들에게 중요한 것은 올리비에 브장스노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30여국 해외 대표단들, NPA 창립 축하
해외 30여국에서 참가한 좌파정당들의 대표단은 다양한 비공식 접촉과 지역별 모임 등을 통해 각국의 투쟁상황을 공유하고 NPA 창립과정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한국에서 참가한 대표단 역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참가단들과 최근의 각 단위에 대한 소개와 좌파정당운동에 대한 고민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2월 6일에는 예정에 없던 해외참가단 전체 모임도 즉석에서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경제위기와 반자본주의 투쟁에 대한 각국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1월 30일 브라질 벨렝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서 진행된 국제급진좌파회의에 대한 보고도 있었다. 이후 해외대표단들은 NPA에서 준비한 공식만찬에 참여해 창립을 축하했다.
 
반자본주의 신당(NAP) 당명 채택
반자본주의 동의하는 세력과 유럽의회선거 대응

NPA 창립총회는 2월 6일 오후부터 2월 7일 오전까지 NPA의 창립원칙, 임시규약, 정치결의안, 유럽의회선거 대응 결의안 등의 핵심주제에 대하여 분과토론을 진행했다. 이 분과토론을 통해 각 위원회에서 문건으로 제출된 세부 수정안에 대해 심의하였고, 2월 7일 오후부터 2월 8일 오후까지 전체회의를 통해 각 수정안에 대한 찬반토론과 표결을 진행했다.
 
창립원칙에 대한 심의에서는 사회주의의 표현과 관련해 사회주의, 생태사회주의, 21세기 사회주의가 제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21세기 사회주의’라는 표현이 채택되었다. 규약에서는 당명과 관련해 반자본주의신당, 혁명적 반자본주의당, 혁명적 좌파국제주의 동맹, 반자본주의 좌파당 등 5개 안이 제출되었다. 논의 끝에 결선에서 반자본주의신당(NPA)이 혁명적 반자본주의당(PAR)을 316대 270표로 누르고 공식 당명으로 채택되었다.
 
LCR 해산 총회에서도 쟁점으로 논의되었던 2009년 유럽의회 선거와 관련한 방침에서 두 개의 안이 제출되었다. 다수안은 사회당과의 연합을 배제하되, 반자본주의에 동의하는 세력의 연합을 통해 선거를 대응한다는 것이다. 소수안(크리스티앙 피케 제안)은 공산당(PCF) 및 좌파당(PG) 이 주도하는 <좌파전선> 가입을 통한 선거연합을 제안하는 안이다. 결론은 76%의 지지로 다수안이 가결되었다. 소수파는 16.7%의 지지를 받았다.
 
NPA 총회는 3가지의 주요 안건을 채택한 다음, 새로운 당의 정치적 지도부인 192인 전국정치평의회(CPN)를 개별투표로 선출했다. 올리비에 브장스노도 78% 득표로 지도부에 선출되었고, 그 가운데 45%가 LCR 출신이었다. 반면 소수파 동의안을 제출했던 크리스티앙 피케가 선출되지 못했고, 대회 의결에서 16%를 획득한 소수파가 13명 밖에 선출되지 않자 소수파측에서는 불만을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도 대회는 임시집행위원회(20명인 규모)를 표결없이 추천하여, 3월 7~8일에 열릴 전국정치평의회 1차회의까지 당의 운영을 책임지도록 했다. 3월의 전국정치평의회에서 정식으로 집행위원회가 선출될 예정이며, 대외적으로 당을 대표할 대변인 문제도 논의할 예정이다.
 
2박3일 간의 열띤 토론과 정치적 결정을 마무리한 총회는 마지막으로 “1월 29일 총파업의 정신을 이어 투쟁하자!”의 제목아래, “과달루페와 마르티니크의 투쟁이 우리의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총파업투쟁!”이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이다! 투쟁을 계속하자”는 구호가 스크린에 떠 있는 가운데, 인터내셔널가를 제창하며 총회를 마무리했다.
 
NPA, 거대한 변혁의 첫 걸음을 내딛는 실험
LCR의 NPA로의 전환은 양적, 내용적으로 더 확장을 이루었다. 지역중심, 다원주의, 연방주의라는 조직원리를 통해 넓혔다. 사업단위로 보면 기존 LCR의 사업단위를 NPA로 이전해서 사업의 연속성을 이어나가면서, 새롭게 빈민/교외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운동을 담당할 사업단위와 제소자인권/인권탄압 대책을 위한 사업위원회가 추가되었다. 이는 지난 교외지역 폭동 이후에 과거에 탈정치화되어 있던 청소년층이 정치적 급진화 되면서 사회운동으로 접근하는 것을 인권적 차원에서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이번 NPA 창립은 일단 순조로워 보이고 상당한 탄력을 갖고 프랑스 좌파운동 뿐 아니라 유럽좌파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아직 NPA의 실험은 이제 시작이며, 앞으로 중장기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는 적지 않다.
 
현재적 수준에서 NPA의 정체성은 핵심적으로 확고한 반자본주의 투쟁정당이며, 이는 정치적으로 사회당과 연대를 통한 제도적 포섭의 단호한 거부로 모아지고 있지만, 프랑스의 복잡한 정치적 지형 속에서 자본주의체제를 변혁할 전략과 전술을 구체화해야 할 과제가 주어져 있다.
 
또한 새롭게 결합된 젊은 활동가들이 기존의 활동가들과 정치적/문화적/세대적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NPA를 건설할 수 있었던 하나의 동력이었던 청년층의 불만과 반란을 어떻게 변혁의 전망 하에 정치적으로 조직할 수 있을지, 또 그들을 차세대 지도력으로 키워나갈지가 중요한 과제로 남은 것이다. 이를 위해 환경, 차별, 계급 등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을 어떻게 접합하고 융합할 것인지의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간 헌신적으로 투쟁해온 LCR의 문을 내리고 NPA의 새로운 실험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새로운 당 자체의 정치적 성장만이 아니라, 공산당과 사회당에 의해 주도된 20세기 프랑스 좌파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21세기 사회주의를 실현한 정치적 도구로서 첫 걸음을 뗀 LCR-NPA의 정치적 실험은 프랑스만의 고유한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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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개량되지 않는다" (레디앙, 2009년 02월 11일 (수) 08:30:14 박지연 / 파리통신원)
[인터뷰-올리비에 브장스노] "사회적 부 직접 통제해야" 
   
"한 개인이 스타가 되는 것은 좌파적 방식이 아니라 우파적 방식"이라며 기자에게 던진 올리비에 브장스노 말의 뜻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좌우를 불문하고 리더십은 정치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분명한 만큼 <레디앙>은 그와의 인터뷰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2002년 대선 후보였던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당시 ‘좌파 스타’ 로 급부상했다. 현재 집배원으로 일하고 있는 34세의 브장스노는 2007년 대선에서도 4.08%대의 지지율로 공산당 후보를 제치며 주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또 지난해 여론조사에서는 2012년 대선에서 사르코지에 맞설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면서 프랑스에서 ‘브장스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한 정치학자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브장스노가 이끄는 NPA의 창당으로 정치 영역이 요동을 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그는 18%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어 '전투적 좌파' 정치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우파들은 브장스노가 부유한 아내와 함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가짜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장을 퍼뜨리기도 했으며, 그가 전기총 소지를 반대하자, 지난 해 10월 한 전기총 제조회사 사장이 사설탐정과 전·현직 경찰관들을 고용해 브장스노 가족의 사생활을 감시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기도 했다.
 
반자본주의 신당 대변인이 된 올리비에 브장스노와 8일 저녁 창당대회가 다 마무리되어져 가는 시점에 만났다. 한달 월급 1100유로, 직장 축구부의 자칭 주전 선수, 마치 우리의 평범한 이웃을 보는 듯한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한 젊은 혁명가의 모습을 읽기도 한다.
 
<레디앙>과의 짧은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에 대해 동의하기가 어렵다든지, 한국적 맥락에서 볼 때 비현실적이라든지 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같은 철학과 입장을 가진 정치인이 사회당까지 우경화됐다고 비판받는 오늘의 프랑스를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 * *
- 어제 당령 투표에서 사회주의, 생태사회주의, 21세기 사회주의 등 많은 단어들이 오고 갔다. 당신이 원하고 준비하는 사회는 어떠한 것인가?
= 그 단어들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내가 원하는 사회주의의 핵심은 아주 간단하다. 사회에는 자본주의적 모델이 있고, 동구권에서는 관료주의적 사회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어쨌건 이러한 두 사회의 경우 모두 소수 개인들을 위해 다수가 존재하게 된다. 아직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회가 있는데, 그것은 다수가 다수 그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세 번째 모델이라고 종종 부른다. 새로운 사회와 경제를 위하여 부자들의 것들을 국유화하고 통제하면서 새로 출발하는 것이다. 지금 자본주의 가장 큰 문제는 다수의 노동자들이 소수의 부를 위하여 노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 당신은 통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어제(7일) 다니엘 뱅사이드교수와 대담했는데, 당신과 그가 함께 쓴 책 『정당을 건설하자』에서 그러한 경제적 프로그램이 들어있는 단락을 봤다. 경제적 통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사회적인 모든 부를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자본가들에게 집중되어 있던 것을 다시 우리의 것으로 삼고, 그것을 다시 재분배한다. 하지만 이것이 관료적 사회주의와 다른 점은 지역에서 직장 차원의 단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기존의 통제 계획이 중앙권력에서 집행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아래에서 진행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통제를 위한 정치적 제도 또한 변화해야 한다. 다만, 그 책에도 잘 나와 있듯이 어떠한 경우에도 전제주의에 관한 경계는 끊임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들은 실현 가능하다. 다만,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제도 내에서 불가능한 것일 뿐이다.
 
- 이러한 사회적 모델에는 혁명적 방법은 불가피한 것 같다. 하지만 반자본주의신당에서 혁명적 기운이 제거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은 아니다. 어떻게 이러한 세 번째 사회 모델에 도달할 것인가?
= 나는 항상 혁명주의자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남을 것이다. 혁명이란 민중들이 민주적인 조직 안에서 민중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폭력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사회의 다수가 되어 폭력 없는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혁명주의자들은 소수로 남아 있기를 선고받지 않았다.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전투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효과와 유용성에 대하여도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 속에 한 단위에서 다수파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좀 더 서민적인 동네에서 우리의 요구들을 주장하는 것이다. 월급 인상, 해고 금지, 빈집 점거,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여하게 만드는 것 등...
 
- 개혁과 혁명에 관한 답으로 들었다. 그럼 NPA의 목표는 ‘투쟁 정당’이라는 개념인가? 이것은 선거주의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 우리가 의회선거에 적극 참여하고는 있지만, 구성이 잘된 좋은 의회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비록 현존 제도권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적겠지만, 사회의 변화는 정치적 장에서 대중의 봉기가 일어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당신의 동료 피에르 루쎄씨로부터 NPA는 반자본주의이지 반자유경제주의 당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NPA라는 이름의 진정성을 조금 이해했다. 어떻게 당명은 결정되었는가?
= 자본주의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위기에 따른 고통의 분담하는데 자본가들이 책임을 지지 않고 민중들에게 그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분노할 일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이 가장 착취당하는 민중의 수가 많은 시기다. 반자본주의 시간이 온 것이다.
 
반자본주의이라는 단어는 중앙당에서, 정치국에서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다. 한 당원이 호소문을 작성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이고, 이것이 지역위원회에서 사용이 거듭되어지면서 지금의 당명이 되었다. 물론 혁명이라는 단어가 삭제된 것에 대해서 많은 동지들의 반발들이 있었다. 우리의 사상을 제대로 표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당명이 우리를 완전하게 설득시키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당원들을 위하여 새로운 오렌테이션 프로그램 속에서 그들을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당명을 결정하는 투표에서 5가지 당명 중 반자본주의신당과 혁명적 반자본주의당이 비슷비슷하게 표를 얻었지만, 2차 투표에서 둘 만을 놓고 결선을 벌였을 땐 반자본주의신당이 압도적으로 많은 표를 얻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을 같이 공유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당명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다. 단어 속에 혁명이 포함되었는지 안되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 이후의 대안을 정확하게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개량되거나 도덕적으로 변모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차츰 다른 방식으로 고민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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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화에서 새 당이 태어났다" (레디앙, 2009년 02월 17일 (화) 10:51:19 박지연 / 파리통신원)
[인터뷰 - LCR의 두 혁명가] 제도정치와 사회운동 접합 추구
  
68세대의 두 혁명가, 알랭 크리빈과 다니엘 벤사이드를, 반자본주의신당(NPA) 창당대회에 공식 초청되어 참가 중인 진보신당 당원들과 함께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이 둘은 작년, 68혁명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쓴 『1968. 시작과 연속』의 공동저자인 동시에 평생을 같이 해온 동지이기도 하다. 알랭 크리빈은 행동가로서 공산혁명전선 LCR의 전략을, 다니엘 벤사이드는 철학가로서 LCR의 이론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일조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둘을 항상 같이 기억한다. ‘전략과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NPA의 역사적 원류를 만든 이가 크리빈이다. 사회당 의원의 사위였지만, 공산당 당원으로서 활동을 하다가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를 조직하면서 혁명적 공산주의청년단 JCR을 결성하게 된다. JCR은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고 크리빈은 68년 감옥에 투옥되면서 JCR은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나 1년 후 그가 출옥하자마자 제일 처음 행한 활동이 다시 LCR을 창단한 것이다. 2002년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서기 전까지는 알랭 크리빈이 선거 후보의 임무를 늘 맡았다. 대중들에게 크리빈은 68혁명의 상징으로써 확신에 찬 활동가로 널리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투옥과 정치탄압의 힘든 투쟁 속에서 스스로 일궈온 정당을 크리빈은 그 어느 누구보다 더 큰 목소리로 LCR는 이제 해체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새로운 세대를 위한 투쟁을 만들어 가야만 하는 새로운 시간이 왔음을 인식한 것이다.
 
크리빈의 한결 같은 동지이자, 제 4인터내셔널 비서인 다니엘 벤사이드는 지난 한국에서 일어난 촛불시위 연행자에 대한 석방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서를 노암 촘스키 교수 등과 같이 발표하였다. 발터 벤야민과 칼 마르크스가 전공인 다니엘 벤사이드 전 파리 8대학 교수는 69년 LCR 창단에 참가하면서 앙리 베버와 함께 초대 정치국 일원이 되었다. LCR의 정치국은 단순히 한 정당의 정치위원회를 넘어선 전체 좌파의 철학과 정치이론의 주요한 근원지 중의 한 곳이다.
 
다니엘 벤사이드는 우리에게도 『저항: 일반 두더지에 대한 시도』의 저자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는 루이 알튀세이, 알랭 바디우, 자크 데리다, 안토니오 네그리 등을 등장시켜 혁명에 상응하는 정치적 행동으로써의 ‘저항’을 다룬 이 책 외에도 서른 권 정도의 저서를 집필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좌파 지성인 중 한 사람이다.
 
최근에는 올리비에 브장스노와 함께 『정당을 건설하자: 21세기 사회주의를 위하여』를 발간하기도 하고, 얼마 전 알랭 바디우의 ‘혁명을 준비하지 않는 NPA’에 대한 비판을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반박 기재하면서 논쟁을 이끄는 등 여전히 좌파 철학자로서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다니엘 벤사이드 교수는 진보신당 참가단과 함께 한 인터뷰에서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상과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칠 것인가에 대한 그의 견해를 <레디앙>에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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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벤사이드
 
- 당신과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공동으로 쓴 『정당을 건설하자』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생각들을 발견하였다. 이 책과 관련하여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질문에 앞서 68세대로서 새로운 정당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한가?
= 매우 만족스럽다. 우리는 68년도에 많은 희망을 가졌었다. 그때는 이 사회를 빠른 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는 혁명적 운동에 관한 생각도 동시에 했다. 68은 단순히 프랑스에만 국한되는 사건이 아니었다. 69년을 지나면서 이탈리아의 노동자 투쟁, 74년의 영국, 스페인, 포루투칼 혁명 등으로 번졌다.
 
그러나 20세기는 큰 실패로 끝나버렸다. 이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과 같은 역사적 사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존재하는 1억 명 정도의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의 전 세계 노동자들이 어떠한 사회적 보호도 없이 열악한 노동과 투쟁 환경 속에서 처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계급과 자본의 세계 속에서의 힘의 역학관계에 의한 노동 계급의 약화로 발현되었다. 80년대 들어서 유럽의 많은 혁명적 좌파들이 사라졌다. LCR 또한 활동성이 매우 위축된 시기였다. 이탈리아에서도 많은 활동가들과 함께 3개의 주요한 일간지가 사라졌고, 영국에서 시작된 자유경제주의가 득세하고 사회 운동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94년 이후부터 멕시코 등지에서 새로운 활동의 시작을 상장하는 징후가 나타났다.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되는데, 물론 그 이전부터 한국에서는 학생운동들을 포함하는 강력한 저항과 운동들이 존재하긴 했어도, 전 세계적으로는 반세계화 운동, 95년 프랑스 총파업과 같은 노동 운동의 새로운 상징들이 포착된 것이다. 
 
오래전부터 새로운 역사를 이어갈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계획으로 현실화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유럽의회에서 승리(유럽의회 법안 거부)와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의 전통을 이어받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당에 들어오면서부터 이러한 생각은 새로운 조직 건설이라는 구체적 실천으로 옮아오게 되었다.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그러한 예이다. 그는 정치운동을 이러한 ‘94년 멕시코’와 같이 시작한 젊은 세대이다. 올리비에를 처음 만났을 때 그것은 ‘새로운 운동’이라는 상징적 사건처럼 새로운 세대라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당에 들어왔다.
 
나는 툴루즈(프랑스 남서부도시) 출신이다. 거기에는 스페인 등에서 온 이민자 세대들이 넘쳐났고 그들은 늘 전쟁의 역사와 함께 한 이민자들이었다. 스페인 내전, 독일 점령 하에서의 전쟁 경험 속에 우리는 태어났으며, 또한 모든 사회적 운동을 겪으며 커왔다. 하지만 올리비에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달랐다. 학습도 우리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을 읽었다면, 올리비에는 ‘마르코스(멕시코 혁명가)와 안토니오’를 읽었다. 물론 그도 이후에는 고전들을 읽기 시작했지만. 지금 NPA에 있어서 LCR과 비교하여 정책이 변화한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사상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변한 것은 사회이고 여기에 상응해야 하는 조직이 바뀐 것이다. 조직이 대중에게 뿌리를 내린다는 의미이다.
 
좌파에게 가장 큰 문제는 아프리카와 아랍지역 대중들이 모여있는 방리유(도시근교지역)의 문제였다. 그 이전의 프랑스 정치문화에는 노동운동에 관한 공동의 역사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국가적 역사, 프랑스 혁명, 파리코뮌 등등. 그러나 알제리, 모로코에서 건너온 젊은이들에게는 이러한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21세기를 살면서 혁명을 준비한다면 이들과 함께 역사를 나누며 또 함께 건설을 해야 한다. 우리는 2005년 방리유에서의 저항 이후부터 그들이 왜 NPA에 들어오는지 이해를 해야만 하고 같이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다. 지하철에서의 인종 분포도와 NPA 창당대회에서의 인종 분포는 확연하게 다르다. 오늘 이 자리에는 95%의 백인이 모여 있다. 아직도 우리는 프랑스 대중과 다른 지점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또 다른 임무가 나오는 것이고 그것은 사르코지가 하고 있는 TV 광고가 아닌 아주 현실적인 사회를 기본으로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당을 보며 느끼는 당원으로서의 심정이다.
 
- 우선 당신에겐 더 이상 전통적인 정당 개념이 없는 것인가를 묻고 싶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회당이나 공산당이 보여주는 형태와 같은.
= 상당히 논쟁적인 질문인 것 같다. 전통적인 정당에는 직업 정치적이며 관료화된 이미지가 강하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정당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의 새로운 민주적 정당 건설에 성공한다면, 그래서 직업 정치적인 요소를 피하면서도 더 많은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면, 이것은 하나의 ‘집합적인 기능’으로써, 지금까지로선 화폐와 미디어 등의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골렌 루와얄(프랑스 사회당)의 선거캠페인을 보면, TV쇼 등으로 매우 인물화되어 있고 집합적인 기능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치가 민주적인 논쟁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선거 캠페인을 살펴보자. 물론 그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분명한 통제 속에 있었고, 따라서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다. 흔히들 비제도적인 네트워크가 많을수록 민주주의가 더 적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 생각에 이건 진실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의 가치는 큰 것이다.
 
- 당신의 책을 보면 ‘투쟁 정당’이란 개념이 보이는데
= 그렇다. 우리는 ‘투쟁 정당’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또한 우리는 노동조합과 다른 운동들을 포괄하는 사회운동 정당을 지향한다. 궁극적으론 정치의 형태를 바꾸어내기 위해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멕시코 사파티스타의 경험을 참고할 수 있을 게다. 그들의 슬로건, ‘권력을 가지지 않고 세계를 바꾸자’는 이른바 ‘권력 문제’, 즉 권력이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사회운동은 매우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사회운동들이나 이주노동자와의 연대를 위한 저항 등 모든 사회운동들이 우리에겐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운동의 자율성을 존중하고자 한다면, 특히 정당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확해질 것이다.단순히 사회운동에 뭔가를 덧붙이는 수준이 아니라 지구적 관점을 갖는 것, 그리고 사회적으로 공통의 관점을 갖는 것 말이다.
 
- 그러면 NPA나 당신에게 제도정치 또는 정치의 제도적인 양상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물론 우리는 참여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거에도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선거시스템은 의회로의 진입이 매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제도정치에 참가한다는 것은 (다른 정당들과의) ‘타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이 점이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와 다른 점이다.
 
- 요컨대, 당신은 제도정치와 사회운동의 정치 양자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인가?
=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그 둘을 접합하는 정치이다. 물론 우선적인 것은 사회적인 운동과 투쟁이지만 말이다.
 
- 그러면 당신의 이러한 정당과 정치에 대한 개념은 새로운 것인가?
= 물론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의 경험들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1백년 이상의 선거정치의 경험을 갖고 있는 유럽의 나라들에서, 선거에서의 일정한 승리가 없이, 혁명에 직접 도달하리라고 상상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 여기서 스페인(인민전선과 스페인 내전)이나 칠레(아옌데 정권)에서의 역사적인 경험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거와 운동, 이 둘과 함께 가는 거리의 정치를 원한다. 혁명적인 상황이란 때로는 총파업과 함께 시작된 이후 선거가 뒤따라오는 방식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선거에서의 승리와 함께 시작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도 전국적인 총파업의 가능성은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중심적인 것은 물론 사회운동이다.
 
- 당신의 책 『정당을 건설하자』에 보면 ‘민주적 자주 관리’란 주장이 중요한 원리로 등장한다.
= 이건 예를 들어 공공부문의 민영화에 대항하는 원리로써 중요하다. 특히 80년대 프랑스 좌파연합 정부의 경험과 관련해서 말이다. 만일 우리가 공공부문에 대한 국유화를 시도하려 한다면 대단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왜냐하면 공공부문의 기능이 이미 시장과 경영의 기준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몇몇 공공부문의 재국유화를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작업장에서의 토론과 민주주의를 조직하고 실행하기 위한 ‘민주적 자주 관리’를 매우 중요한 원리로 제출한 바 있다.
 
- 새로운 인터내셔널리즘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국제주의는 말하자면 일종의 ‘국가 중심의 인터내셔널리즘’이었다. 예를 들어 과거(1968년) 소련이 체코 사태에 개입했을 때, 그건 소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내셔널리즘’이었다. 때문에 앞으로 우리에겐 새로운 종류의 인터내셔널이 필요하다. 왜냐면 최근엔 한 국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운동들과 그룹들 상호간의 직접적인 연대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종류의 인터내셔널리즘 혹은 인터내셔널은, 예를 들어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뭄바이와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에서의 세계사회포럼의 경험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포럼들에서 새롭게 변형된 인터내셔널리즘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 그렇다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새로운 조직이 아니라, 새로운 네트워크일 수도 있는가?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건 갈수록 투쟁이 국제화되고 있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원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도 어떠한 종류의 인터내셔널이냐, 즉 ‘조직’에 관한 문제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조직적으로 지탱하기에는 유용하지만 아직은 작은 국제적 흐름에 속해 있다. 더구나 다양한 역사와 경향을 갖고 있는 활동가들이 함께 있고, 이것을 매개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커다란 ‘조직’을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심화시키고 공고히 하는 것과 이를 통해 공통의 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보면, 국제적으로 심지어 대륙을 넘나드는 모임과 공동의 작업을 통해 반자본주의적 조직의 흐름을 네트워크 이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우리는 6개월마다 반자본주의적 흐름의 국제회의를 열고 있다. 최근의 회의에서 우리는 올 6월에 있을 유럽의회 선거에서, 어떤 정치를 말하고 공동 대처할 것인지 토론한 바 있고, 반자본주의적 후보들의 성공을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동시에 지난 1월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서도 우리는 반자본주의적 조직들의 국제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전 세계 25개국의 활동가들이 참가했다.
 
- 사회주의, 생태사회주의, 21세기 사회주의란 어떤 내용들의 차이가 있는가?
= 아니다. 내 생각에 그 차이가 큰 것은 아니라고 본다. '소셜리즘과 코뮤니즘'은 생태와 페미니즘의 가치를 포함하는 것 아닌가? 만일 당신이 사회주의를 주장한다면, 그것이 왜 사회-페미니즘이 될 수 없겠는가? 내 생각에는 그런 방식으로 충분히 결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태-사회주의를 지지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생태와 사회주의는 전적으로 함께 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럼 당신 스스로를 이념적으로 정의해본다면?
= 나 자신에 대해서는 ‘국제주의적 코뮤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NPA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민주주의를 심화/확장/급진화시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 잘 알다시피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만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주류 정치학에서는 민주주의가 주로 ‘선거’를 의미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들이 중요하고, 핵심적으로 민주주의는 정치적 대표자들에 대한 통제 그것도 지속적인 통제를 포함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들 것이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참여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난 정확하게 이것이 예컨대 ‘보다 적극적인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 민주주의는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알져졌듯이, 포르토 알레그레에서는 구역 단위별로 평의회(council)들이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의료, 교육, 심지어 도로를 어떻게 낼 것인지 등까지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시 행정에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시 예산에도 반영된다. 참여예산제로 알려진 것.)
 
이곳에서의 구체적인 경험을 일컬어 소위 참여 민주주의 공동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일종의 ‘결정과 함께 정당성’(decision and legitimacy)을 동시에 확보하는 이중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예산에 대해 개입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단순한 컨설턴트의 역할이 아닌 직접적으로 권력의 실행 자체에 개입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이곳에서는 또 다른 권력이 형성된 바 있다. (나중엔 시의 선출직 정치가들을 제어하는 대항권력이 형성됨.)
 
지난 대선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이 대의 민주주의를 혁신한다면서, 시민 패널 위원회를 주창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토론하고 자문하는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다. 따라서 포르토 알레그레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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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LCR의 전 대변인 알랭 크리빈과 새로운 정당건설을 바라보며 나눈 짧은 인터뷰이다.
• 알랭 크리빈
 
- LCR은 이제 사라졌다. LCR의 창단자로서 당의 해체와 새로운 정당을 바라보는 기분이 어떠한가?
= 행복하다. 너무 기쁘다는 말밖에 달리 없다. 우리가 LCR을 창단할 때는 120명으로 시작했다. 그 역사가 이제 오늘을 낳았다. 왜냐면 지금의 NPA는 40년간의 LCR이 투쟁해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의 경제적 위기와 함께 정치적 운동을 현실화 시키게 만드는 정치적 국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민주주의와 마주 선 우리와 같은 68세대들의 사회에 대한 저항은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효과적 대안을 찾기 위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의 총체적 결론이 반자본주의이다. 이제 나는 당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NPA에서 지급하는 연금을 받으면서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와 투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 NPA의 비젼은 무엇인가?
= NPA는 다양한 정당들이 재통합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개혁이 아닌 자본주의 위기를 근원적으로 맞서는 반자본주의를 위해 통합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세계화되어 착취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국지적인 투쟁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반자본주의 투쟁은 전 세계 민중들과 같이 국제적 관계를 유지하며 투쟁하게 될 것이다.
 
- NPA는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NPA의 국제적 연대 투쟁들은 계속될 것이라 믿는다.
= 국제적 연대를 위해서 투쟁하던 모든 LCR 동지들이 NPA로 다 옮겨왔다. 그 정신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제4인터내셔널도 너무 작은 그룹이다. 그래서 오히려 NPA는 여러 노조들, 아탁 등 좀 더 광범위한 대안 세계화 운동에 나서야 한다.
 
- 덧붙이고 싶은 한 마디는
= 지나간 68과 40년의 세월에 어떠한 향수도 느끼지 않는다. 뒤돌아보며 추억담을 늘어놓기에는 앞으로 가야 할 투쟁들이 연속해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의 68년은 실패했다. 하지만 NPA는 68세대의 승리이다. 우리는 프랑스를 승리와 함께 바꿔야만 한다. 그리고 NPA는 미래의 승리에도 도착할 것이다.

- 다니엘 벤사이드 교수와 당신이 같이 집필한 책 『1968. 시작과 연속』을 한 권 샀다. 헌사를 부탁한다.
= 68혁명의 계승과 승리를 위한 작은 기여 하나.
정리 : 진보신당 독일 당원 류용선, 파리당 원 정의헌, 레디앙 파리통신원 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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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인물을 평하지 않는다 (레디앙, 2009년 02월 17일 (화) 14:21:03 박지연 / 파리통신원)
[NPA 창당대회 후기] 만난 사람들과 못 만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