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현장에서

생생한 노동 이야기 〈현장을 가다〉(프레시안, 08-11-29)

새벽길 2008. 11. 29. 14:48
생생한 노동이라고 하여 반드시 <현장을 가다>에 나오는 것만은 아니며, 사무실에서 종이, 컴퓨터와 씨름하고, 실험실에서 밤새는 이들 또한 생생한 노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현장을 가다>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들의 노동을 제대로 모르고 지나친 이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그 현장을 뛰어다니며 취재한 기록을 책으로 펴낸 <현장을 가다>의 서평을 지나칠 수 없었다. 이 중에는 내가 언젠가 읽었던 사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이다. 이런 서평을 보면 프레시안과 같은 인터넷 매체가 종이신문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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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배원이 '죽인다'를 입에 달고 사는 까닭은? (프레시안, 여정민 기자, 2008-11-29 오전 9:53:55)
[화제의 책] 생생한 노동 이야기 〈현장을 가다
 
아버지는 30년째 우체국 집배원, 오빠는 자동차 부품 회사에서 일을 하고, 나는 KBS 합창단원으로 종종 텔레비전 속 무대 위에 오른다. 동생은 기관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 하고, 어머니의 어린 시절 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우리 유물을 보존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단다.

그런데 대체, 오토바이와 함께 하는 아버지의 하루는 어떨까? 어머니는 화려한 무대 위에 선 잠깐의 내 모습 말고, "일주일 내내 오전에는 연습을 오후에는 녹화와 모니터링을 하는" 내 일상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동생은 "죽음의 대기표를 들고 출근하는" 열차 기관사의 높은 산재 사고율을 알고는 있을까?

우리는 모두 일을 하고 살아간다. 누구는 '좋은 일자리'를 얘기하며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얘기하고, 또 누구는 "취업 자체가 축복인 시대"를 얘기하며 규제 완화에 핏대를 세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동을 둘러싼 이같은 대립은 나날이 치열해지고 있다.

그들은 과연 손에 꼽기도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노동, 그 복잡한 톱니바퀴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매일노동뉴스> 12명의 기자들이 직접 현장을 누비며 찾아낸 노동의 얘기가 담긴 책 <현장을 가다>(매일노동뉴스 펴냄)가 돋보이는 이유다.

"작업장의 사회적 관계는 매우 복잡해졌고, 새로운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노사 모두 '현장 속으로'를 외쳤지만 점점 현장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어졌고,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문제 해결이 용이하지 않게 됐습니다. (…) 그래도 우리는 '현장에 답이 있다'고 믿습니다."

매일노동뉴스 박성국 대표의 말이다. 그는 "문제가 발생한 현장을 외면하고 경제학 이론서를 뒤적이거나 일부 논거를 가지고 탁상공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념을 얘기하기 앞서 시대의 변화와 함께하는 현장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매일노동뉴스가 그동안 지면을 통해 보도했던 타워크레인 기사, 자동차·유리·마루 생산 업체 노동자부터 호텔 도어맨, 도축 노동자, 채권추심원, 고속도로 안전 순찰원, 국립공원관리공단 멸종위기종복원센터까지 20여 곳 일터의 생생한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낸 이유이다.

귀가 먹먹해지는 곳에서 '죽음 대기표' 들고 일하는 사람들
▲ <현장을 가다>(매일노동뉴스 펴냄) ⓒ프레시안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선다는 2만2900볼트의 고압선이 흐르는 14미터 상공"과 "귀가 먹먹해지고 땅이 울리는, 대형 화물차들이 시속 100킬로미터 속도로 눈앞을 지나가는 고속도로."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스스로를 '일렉트로닉파워 아티스트(전력 예술가)'라고 부르는" 전기원 노동자와 "고속도로의 만능엔터테이너"인 고속도로 순찰원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풍경이 수시로 벌어지는 일터에서 그들은 오늘도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전봇대 맨 위에 낙뢰를 방지하는 선과 2만9000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굵은 전압선, 220볼트 또는 380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저압선이 차례차례 연결돼 있다. 그 밑에 있는 굵직한 선이 케이블선이다. 전기원 노동자들이 커빗을 직접 조종하면서 9개가 넘는 전선 사이사이를 올라가는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전선에 닿는 순간 바로 사고다."

"전선을 잡고 있을 때는 옆에 있는 동료와 몸이 닿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 전기원 노동자에 비하면 "노면에 떨어진 타이어 조각을 줍기 위해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의 차들 속으로 뛰어드는" 고속도로 안전 순찰원은 그나마 '편한' 직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도의 예민한 상태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선로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열차라지만 잠시도 한 눈을 팔수가 없는" 기관사들도 마찬가지다. '혹시나 사람을 칠까' 하는 걱정에 "스트레스로 머리가 쭈뼛 설 정도"란다.

"아찔한 끼어들기 신공에 가슴이 철렁, 입에선 쌍시옷이 절로 나오는" 퀵서비스 노동자의 오늘도 사고와의 전쟁이다. "눈 쌓인 지리산 험로를 네 발로 기어"야 하는 반달곰 관리팀의 고역은 차라리 낭만이다.

화려한 직업, 그 안에 숨겨진 한숨들
화려해 보이는 겉보기와 그 속내가 다른 일터도 많다. 흔히들 '귀족 노동자'로 부르는 현대차 생산직 노동자는 "역설적이게도 세계 자동차 제조 노동자 가운데 가장 오래 일하는" 사람들이다. 취재 기자는 그 '귀족 노동자'의 일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공장 안 소음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각종 기계의 굉음과 작은 먼지들이 수없이 날아다녔다. 컨테이너벨트가 움직이는 소리는 물론이고 전기드릴과 나사 못 박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짧게는 1분 30초, 길에는 2분 30초 주기의 반복 작업을 수행하는 늙은 노동자들"이 "우리 월급 많다고 하는 사람들 보고 여기 와서 일주일만 야간에 작업해보라고 해라"고 얘기하는 이유다.

매달 1500만 원 이상의 채권을 받아내야 한 달에 200만 원에 근접한 월급을 손에 쥐는 '빚 독촉쟁이' 채권추심원은 비정규직이다. "30년을 근무했는데도 아직도 본관을 출입하려면 주민등록증을 맡겨야 한다. 고된 일은 다 시키면서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하소연하는 사람은 KBS 디지털미디어센터 노동자다.

먹을거리 안전성에 대한 관심은 100일 넘게 촛불을 타오르게 한 원동력이었지만, 그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소 도축 노동자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하는 일을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팔 수 있을 때 팔자'는 회사와 '벌 수 있을 때 벌자'는 노동자"
이들이 호소하는 어려움은 비단 "좋지 않은 직업"이라는 세상의 비난만은 아니다. 그들의 일터를 둘러싸고 겹겹이 씨줄과 날줄이 뒤섞여 있는 시스템의 문제는 개인에게는 쉽게 넘을 수 없는 벽이다. <현장을 가다>는 오랫동안 노동 현장을 취재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일반인은 쉽게 알 수 없는 이런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낸다.

기본급이 32%에 불과하고 휴일 야간 근무의 경우 통상임금의 350%가 지급되는 잔업수당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현대차 노동자들의 임금 체계는 "'팔 수 있을 때 만들어 팔자'는 회사 측의 입장과 '벌 수 있을 때 벌자'는 노동자의 이해 관계가 맞물린 결과"다.

"한 업체에서 한 번 찍히면 더 이상 일거리를 받을 수 없는" 퀵서비스 업계의 특성은 매달 무려 38만 원을 사납금으로 회사에 내고, 25만 원의 기름 값과 20만 원의 무전통신비·휴대전화 요금을 스스로 부담하는 시스템을 유지시킨다. 교통사고에 대비한 보험은 퀵서비스 기사의 몫이고, 고객들을 위한 월정 할인료와 쿠폰비도 기사의 부담이다.

"내수동, 역삼동 79번"…"여기 안 사세요? 그럼 죽여야겠네"
▲ 우체국 집배원도 그들만의 은어를 즐겨 쓴다. '치다'는 '배달한다'는 의미, '꺾다'는 많은 양의 우편물을 이틀 정도에 나눠서 순차적으로 배달하는 것을 뜻한다.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기자
그 분야 '전문가'만이 알 수 있는 은어도 알 수 있다. "내수동, 역삼동 79번." 내수동에 있는 물건을 역삼동으로 배달하라는 얘기다. 79번은 해당 기사의 고유 번호다.

퀵서비스 업계에서 쓰는 은어는 그밖에도 많다. △구내바리→가까운 지역 △45→대기 중 △46→정확히 수신했는가 △47→정확히 수신했다 △48→재송신하라 등이다.

같은 배달 직종이어서인지, 우체국 집배원도 그들만의 은어를 즐겨 쓴다. '치다'는 '배달한다'는 의미, '꺾다'는 많은 양의 우편물을 이틀 정도에 나눠서 순차적으로 배달하는 것을 뜻한다. 출근과 퇴근 대신 '출국'과 '귀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압권은 '죽인다'는 표현이다. 집배원들은 주소 불명 또는 수취인 불명 등의 사유로 우편물을 '반송처리'하는 행위를 '죽인다'고 말한다. (…) 채권·채무관련 법원 송달서를 배달해야 하는데 수취인의 어머니가 이를 막고 나섰다. 혹여 자식이 잘못될까봐 '그런 사람 여기 안 산다'고 말한 것이다. 그때 집배원이 이렇게 말했다. '죽여버려야겠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집배원이 우리 아들을 죽이려 한다'며 우체국에 민원을 제기했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곳에도 사람이 있었네
현장은 또 한 사람의 삶이기도 하다. 이제는 "2000통 중 1통 있을까 말까한" 연애편지 배달이 그리운 서울중랑우체국 집배원 김종현 씨는 "정작 힘든 건 비오는 날"이라고 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 힘들어요. 여름엔 이렇게 물 한 잔 얻어 마시고, 겨울에는 옷을 여러 벌 껴입는 식으로 날씨를 이겨내죠. 정작 힘든 건 비오는 날이에요. 우편물이 젖으면 안 되니까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쓰게 됩니다. 그런 날은 길바닥이 미끄러워서 오토바이 사고위험도 높아요."

취재 기자의 동행 취재가 마지막으로 일하는 날이었던 신용보증기금 비정규직 채권추심원 조영태 씨는 "오늘 하루 같이 있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다. "자신보다 어렵게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빚 독촉을 하지 않는다"던 그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11개월 단위로 계약을 맺고 일하다 끝내 계약이 해지됐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하며 살고 있는 곳, "현장을 다시 확인하고 답을 찾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이들의 목소리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