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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주식투자, 주식투자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이유

새벽길 2008. 12. 2. 18:02

2008/12/02 18:02
 
나는 주식투자를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고, 그것이 투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뭐, 남이 주식투자하는 것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주식투자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이라면, 자신이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노동자의 이해에 어긋나는 주식투자를 해서는 안되고, 이를 부끄러워 해야 한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자기 회사 주식을 사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여기에는 딜레마가 작용하고 간단하게 재단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다만, 노동자들이 자기 회사 주식을 보유하게 된 후 자본가와 비슷한 행태를 보이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걸 보면 그리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주가의 등락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이들을 보면 뭐라고 해줄 말이 없다. 주가는 경제 상황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척도가 될 수는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내 주위에 주식, 펀드를 하는 이들이 꽤 있지만, 그들 중에서 주식'투자'를 하는 이들은 한 명도 없다. 모두 '돈 놓고 돈 먹기'를 한다는 점에서 주식 '투기'를 할 뿐이다. 
 
글이 나온지는 벌써 한달이 넘었지만 이정환의 글을 읽어보길 권한다. 여전히, 아니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 더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에게 주식투자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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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주식 투자 (규항넷, 2008/11/15 13:43)
 
시골의사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을 알 것이다. ‘불쌍한 이웃’에 대한 눈물이 똑똑 떨어질 만한 글을 쓰면서 동시에 주식 투자의 대가로 활동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대단히 분열적이라고 느끼지만 그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는 좌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투사의 얼굴로 삼성과 싸우던 참여연대 장하성 씨가 장하성 펀드로 귀결한 것을 두고 실망했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그의 두 행동이 일관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좌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그런 ‘양심적인 우파들’이 좌파로 여겨지다 보니 근래는 좌파진영에 있으면서 주식이니 펀드니 하는 걸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이따금 보곤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비난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측은한 마음이 든다. ‘굳이 왜 좌파를 해, 그냥 양심적인 우파하면서 살지.’ 라고 조용히 말해주고 싶어진다. 마침 이정환이 이 문제에 대해 짤막한 글을 썼더라. 그는 상당한 내공을 가진 경제 전문기자이거니와 나보다 훨씬 더 현실주의적인 경제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 내 말이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는 사람은 그의 말을 곰곰이 들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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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8
 
레디앙에 연재하고 있는 한석호 선배의 글 중에 아래에 발췌한 글은 좋은 평가를 얻었다. 사실 노동운동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중앙파를 비롯한 자기 자신을 반성한다고 하지만, 뭔가 자기 합리화를 한다는 느낌 때문에 한석호 선배의 글은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아래 글은 자본과 투쟁을 하면서도 자본의 포로가 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생활 혁신이 필요함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에 호응이 있었다고 본다.
 
사실 한석호 선배가 이러한 생각을 꾸준히 해왔던 것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전진 활동을 하면서 일을 벌이고 제대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여러 군데 관여하고 있는 활동 가운데 한 두 가지에만 집중해서 하면 좋을 성과를 거둘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물론 나는 사교육에 대해서도 부정적이고(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유롭기도 하지만, 사교육시장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활동가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주식도 하지 않으며,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석호 선배의 글이 나에게 의미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많은 활동가들에게는 나름의 울림이 되지 않을까 싶어 담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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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투자하는 운동가들 (레디앙, 2008년 12월 18일 (목) 13:14:37 한석호)
[노동운동과 나] 자본의 포로가 된 우리 삶…생활 혁신부터
  
나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가정 일에 매정하리만치 무관심했었다. 그러나 딸의 성장과 교육문제 만큼은 나 몰라라 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에 대한 사랑과 의무감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성장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나에게는 그 과정이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을 더 깊게 생각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많은 것을 깨닫고 후회하고 고민했다.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은 사교육 천국이 되어버린 한국의 교육정책을 비판하고 투쟁한다. 투기가 난무하는 주택정책을 비판하고 단체를 만들어 실천한다. 주식 광풍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비판한다. 의료정책에 대해서도, 연금정책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투쟁한다. 모두 대중의 삶과 연관되는 문제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은 대중의 삶과 괴리되어 있다. 그것은 대중의 삶과의 괴리만이 아니다. 자신의 삶도 자신의 운동과 괴리되어 있다. 이율배반이다.
 
이번에 발생한 세계경제 공황을 맞아 노동대중이 타격을 입은 것은 고용과 임금과 노동조건과 복지만이 아니었다. 그것이 본격 닥치기도 전에 노동대중은 이미 주식폭락과 집값 하락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주식과 주택이 바로 그들의 문제였던 것이다.
 
진보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는 의식 있는 활동가들 또한 주식을 했다. 스스로의 판단이었든 은행원의 달콤한 유혹의 전화 한 통이었든, 펀드에도 가입했다. 투기목적으로 아파트를 불리기도 했다. 밖에서는 공적 보험의 강화를 주장하면서 집에서는 생명보험에 가입했다. 공교육의 강화를 외치면서 자신의 아이는 사교육 시장에 맡겼다.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삶이 철저하게 자본의 포로가 되어 있다. 도대체 왜 이런 한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가. 악어 아가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몸통을 들이밀고 있는가.
 
우리의 진보운동과 노동운동을 탓해야 한다. 교육정책, 주택정책, 연금정책, 의료정책 등을 고민하고 투쟁했지만, 우리의 실천은 거대담론에 머물러 있었다. 삶의 문제는 각자의 문제로 떠넘겨 버렸다. 그러는 사이 대중의 삶은 자본의 포로가 되어 갔고, 활동가의 삶도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의지하게 되었다.
 
거대담론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는 사이 활동가들은, 간부들은, 진보적 성향의 대중들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기대게 되었다. 실생활에서 아이의 교육은 어떻게 고민하고 풀어가야 하는지, 학원에 보내더라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아이가 자연스럽게 인권, 평화, 평등의식을 가지도록 도와줄 수 있는 책 가운데 하나로 <고래가 그랬어> 같은 훌륭한 어린이 만화 월간지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한 달에 소주 2병 반만 덜 마시면 아이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주식과 펀드문제에서도, 주택문제에서도, 의료문제에서도, 연금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담론 차원에서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판단했다. 생활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매년 임금인상의 욕구를 강하게 느끼고, 한 대가리라도 잔업 철야를 더 하려고 기를 쓴 이유가 하루 세끼 먹는 문제 때문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천착하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그랬던 것은 생명보험을 유지하기 위해 매달 십수 만 원이 필요하고, 주식과 아파트를 구입하면서 빌린 은행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매달 백여 만 원 안팎의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자식의 학원비 때문에 적게는 십수 만 원에서 많게는 백여 만 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서리라 기대하는 것은 고목나무에서 싹이 트기를 기대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이것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 진보운동과 노동운동은 현재의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 온존하고 보완하는 역할에 그친다. 담론과 구조만으로 변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중의 삶과 연동되어야 한다.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보강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러나 나는 이럴 때일수록 삶의 문제를 싸안아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래야 태풍과 칼바람에서 비켜서 있는 조합원들에게도 바리케이드에 동참할 것을 설득할 수 있다. 더 이상 그런 문제를 개량주의로 치부하지 않아야 한다. 배부르고 한가한 운동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에 조합원 대중의 삶을 고민하고 대안을 만들고 실천하는 사업이 필요하다. 민주노총과 각 산별단위, 지역본부, 사업장 단위노조에 ‘생활 사업부’를 신설하는 것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