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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광 교수 논문, “한국 노동자문화, 대중문화에 포섭 독자성 빈약” (한겨레, 2009-01-29)

새벽길 2009. 1. 30. 13:12
박해광 교수가 내린 결론은 문화운동을 하고 있는 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한국에서 노동자문화가 빈약하다는 건 나도 아는 사실인데... 당장 민중가요만 해도 여전히 90년대 초반에 나왔던 노래가 아직도 집회판에서 불리워지고 있으며, 서정적인 노래들은 뒷풀이 자리에서 소화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집단적으로 모여서 노래를 부르고 즐길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그래서 민중의 집과 같은 공간이 여기저기 생겨나야 할 필요가 있는데, 문제는 이런 공간이 단기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가지고 명백을 유지하며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투쟁을 잘하고 현장이 되살아나는 것은 노동자문화가 정착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건 일상에서의 진보와도 관련이 있다. 일상의 문화가 진보적이지 않고 노동자문화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현장의 활력 또한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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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자문화, 대중문화에 포섭 독자성 빈약”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1-28 오후 06:48:01)
박해광 교수 ‘한국…’ 논문
민노총 설문…첫 수량적 분석 
  
 
» 한국 노동운동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에는 전국 어디서나 노동자 예술단체의 문화공연이 수시로 열렸다. 1996년 4월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노동자 문화제 ‘자, 우리 손을 잡자’의 공연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신문 오락적 이용·TV 몰입 등 노동운동 발전과 비례 안해”
“한국에 노동자 문화는 있는가?”
 
1990년대 한국 노동운동은 세계 반체제운동의 중핵이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전노협(1990년)과 민주노총(1995년) 설립을 거쳐 1996년 노동법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한국 노동운동이 성취한 눈부신 발전은 침체에 빠진 서구 좌파들에겐 경이로움 자체였다. 전국 공단 어디서나 노동자 예술단체의 공연이 수시로 열리고, 기름밥 먹는 사내라면 ‘진짜 노동자’ ‘총파업가’ 같은 노동가요 서너 곡은 메들리로 뽑아내던 시절이었다. 유럽 노동계급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급진화되고 남성적인 집단문화가 조직 노동자 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진단이 잇따랐다.
 
최근 박해광 전남대 교수(사회학)가 <민주주의와 인권>(5·18연구소 펴냄)에 기고한 ‘한국 노동자문화의 성격’이란 논문은 우리 사회에 대중문화와 구별되는 노동자만의 ‘계급문화’가 존재하는지를 수량적 데이터 분석을 통해 규명하려 한 첫 시도다. 그동안 한국 노동자 문화에 대해서는 산업화 시기 노동자들의 생활사나 80~90년대 노동조합 문화에 관한 미시적 연구가 몇 차례 이뤄졌지만, 대중문화와 구별되는 계급문화의 소재를 확인하고 그 특징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그런데 박 교수의 분석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다. 2002년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 566명을 상대로 벌인 실태조사 결과를 분석해 보니, 노동자들이 대중문화에 저항하며 독자적 문화를 만들어내기보다 “대중문화와 공모하면서 그 부정적 성격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선 △액션영화 선호 △신문의 오락적 이용 △텔레비전 몰입 △대중가요 선호 △연예인 따라하기 등 대중문화의 상징적 지표들이 노동자들의 문화 속에서도 매우 보편적인 형태로 발견됐다. 박 교수는 “노동자들이 대중문화에 강하게 포섭돼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반면 노동자문화의 두 가지 핵심 요소로 가정한 △민중적·육체적 문화 △노동조합 문화는 대중문화와의 관계에서 의미 있는 대립관계를 보여주지 못했다. 다만 젊은 남성 육체노동자 집단에서 ‘과음과 난봉’으로 상징되는 민중문화의 유산이 ‘여성을 동반한 술마시기’라는 형태로 전승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박 교수는 “음주문화는 계급 문화라기보다 한국의 남성 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노동자들의 이런 문화가 대중들의 하급 문화와 공모하면서 서로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자명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응답자의 38.1%가 노동가요 테이프를 갖고 있고, 28%가 노동조합 풍물패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는 등 독자적 노동자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표도 있었지만, 이것과 대중문화 향유 지표와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보니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요컨대 노동조합 문화에 우호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성향이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데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서구의 이론적 논의나 노동운동의 폭발적인 전개 양상을 고려한다면, 한국은 대중문화와 구별되는 강력한 노동계급 문화가 형성돼 있을 것이라고 예단하기 쉽다”며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당혹스러워했다. 그는 이런 분석 결과에 대해 “지표 선정이 정교하지 못했던 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서구와는 다른 한국 노동자들의 문화적 형성과정이 제대로 고려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노동자들의 이주나 주거 양상 등 집단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기제에 대한 분석과 함께 인터뷰 등을 통해 양적 접근으로 드러나지 않는 현장의 의미세계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