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는 재미/노래도 부르고

꽃다지의 노래, 그들 삶의 ‘꽃다지’

새벽길 2008. 11. 26. 18:06
인터넷한겨레에만 실리는 꽃다지에 관한 기사. 몇 개월 만에 다음과 같이 댓글을 달았다.
 
"꽃다지를 인터넷 한겨레를 통해서 볼 수 있어서 좋네요.
힘들고 어려울 때 꽃다지의 노래를 통해서 힘을 얻었습니다.
민중가요의 자존심으로 항상 현장에서 희망의 노래를 불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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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의 노래, 그들 삶의 ‘꽃다지’ (한겨레, 연출·글/ 박수진 피디, 2008-11-19 오전 10:20:18)
[한겨레다큐 ‘한큐’]⑦ 노동자 노래패 꽃다지
노래 거름 삼아, 노동 햇빛 삼아 ‘희망 열매’ 익혀
하루 두세 곳씩 20년 한결같이 “앵콜은 3곡 이상” 

 
‘희망의 노래’ <꽃다지> 그들이 사는 세상 
 
  
#‘그 때 그 노래’의 부활
‘꽃다지.’ 낯설다, 그러나 예쁘다. 순 우리말이다. 사전에는 ‘오이·가지·호박 등의 맨 처음에 열린 열매’라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노래를 만난 꽃다지는 뭘까. 그것도 노동, 투쟁 등 ‘과격’한 꼬리가 붙은…. 그 꽃다지는 어떤 열매일까. 
 
사람들은 그들을 ‘민중가수’라고 부른다. 꽃다지 스스로는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불나비’, ‘바위처럼’, ‘민들레처럼’, ‘전화카드 한 장’, ‘노래의 꿈’…. 지난 20년 동안 꽃다지가 노동자와 민중들이 싸우는 현장 한복판에서 목청껏 부른 노래들이다. 그들의 노래는 노동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고, 그러다 지친 서로에 대한 위로였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의 불씨이기도 했다.  
 
지난 5월~8월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이 들불처럼 타오르며 ‘거리의 함성’, ‘광장의 몸짓’이 다시 부활한 2008년. 꽃다지 노래도 그 현장을 함께 했다. 세월은 거꾸로 흘러, ‘386’들이 목놓아 불렀던 ‘불나비’를 그들의 자식뻘인 ‘촛불 여고생’들이 따라 불렀고, 90년대 대학가를 풍미했던 ‘바위처럼’ 율동은 인터넷 카페 회원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 때 그 노래’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그 중심에 선 꽃다지의 가수 이태수, 조성일, 송미연씨도 덩달아 바빴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람이 불어도, 밤이든 낮이든, 노동의 현장, 삶의 현장 어디라도 달려간다는 그들. 그들 삶의 ‘꽃다지’가 영그는 현장을 함께 했다.
 
##탁구와 가수
꽃다지의 새내기 여성 가수 송미연씨의 집엔 상장과 상패, 트로피가 가득하다. 가수이니 당연히 노래해서 받은 상이라고 생각해 물었더니 뜻밖이다. 
 
“제가 어렸을 때 탁구선수였어요. 그때 받은 상이예요.” 송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업팀 탁구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가수의 꿈 또한 송씨의 가슴 한켠에는 시들지 않았다. 노래 실력도 남달랐다. 주변에선 항상 노래 잘한다고 칭찬했고, 탁구선수 시절 감독은 쉬는 시간에도, 훈련갈 때도 툭하면 “미연아, 노래 한 번 불러봐”라고 말했다. 그는 탁구선수로 성공하기 보다는 “탁구선수 출신 가수가 되는 것”을 꿈꿨다. 
 
그런 송씨지만 왜 하필(?)이면 꽃다지의 가수가 되었을까? ‘IMF 구제금융’은 그의 삶을 180도 바꿔놓았다. 선수로 있던 은행 탁구팀이 해체돼, 그는 운동복을 벗고 난데없이 은행원 유니폼을 갈아 입게 됐다. 그렇게 평범한 은행원이었던 그의 인생은 노동조합 활동으로 또 한번 전환기를 맞았다. 
 
“IMF 그 즈음, 금융권 파업이 있었어요. 노조원으로서 파업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불나비’를 불렀죠. 그 때 꽃다지 기획자의 눈에 들어 발탁된 거죠.” 
 
오랜 꿈을 이룬 송씨는 “상업적 기류에 편승하지 않고 소신있는 음악, 힘이 되는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송씨는 꽃다지 노래 ‘이 길의 전부’ 중에서 ‘좋은 이들과 함께한다는 건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의 전부’라는 가사를 가장 좋아한다. 그에게 가수의 길은 그가 부르는 노랫말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 ‘꽃다지’ 가수 조성일씨 조성일씨는 성실한 예비 아빠다.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새벽 잠을 마다하고 우유배달에 나섰다. 조씨는 “꽃다지 활동을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겨낼 것이다”고 말했다.
  
###새벽 우유배달
“생계 문제가 걱정이 되죠. 곧 애 아빠가 되려고 하니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지난 11일 새벽 3시30분 서울 신정역 근처. 새벽바람이 차다. 꽃다지 맴버 조성일씨가 새벽 우유배달을 시작하는 곳이다. 조씨는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 운동복 차림이다. 무대에서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얼굴엔 피곤한 빛이 어려 있지만, 표정은 밝다. 내년 2월에 아빠가 되는 조씨는 “요즘 전국적으로 축하를 받고 다닌다”며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새롭다”며 웃음기가 여명처럼 번진다.
 
조씨가 노래 부르는 것 외에 새벽에 우유배달을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손에 쥔 모래알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월급만으로는, 태어날 아이와 아내를 먹여 살리기 어렵다. 그는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해 노래하지만, 그 스스로도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저임금의 ‘가수 노동자’다. 그러나 조씨는 “꽃다지 음악이 해야할 일이 있다”며 “경제적인 어려움이 민중가수를 선택한 것을 흔들리게 할 때도 있지만 이겨내야 한다”고 말했다.
 
####무대 위, 무대 아래
“앵콜곡은 언제나 3곡 이상 불러요. (우리가) 한 곡 더 부르면 사람들이 더 힘을 내지 않을까 싶어서죠.” 하루에도 2~3곳씩 현장을 찾아 비슷한 노래를 부르지만, 느낌은 제각각이다. 그러나 현장을 부추기는 노래의 목청은 한결같다. 
 
늦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촉촉히 내리던 지난달 25일, 꽃다지의 첫무대는 서울 당산동에 자리잡은 ‘영등포 산업선교회’의 50주년 기념행사장이었다. 뜻 있는 목회자들이 1958년 이곳에 선교회를 세운 뒤 50여년간 노동자들의 인권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 구실을 했다. 꽃다지는 이날 산업선교회의 활동과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노래를 주로 불렀다. 공연중 마이크를 잡은 조성일씨는 “영등포 산업선교회 50년의 역사는 이 땅의 민주화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민주화와 노동자 인권은 산업선교회가 50년 동안 소중하게 지켜온 가치다. 이는 꽃다지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공연이 끝난 뒤 꽃다지는 서울 구로동 기륭전자 앞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500여일 동안 직접 고용과 정규직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현장이다. 이날 꽃다지는 밤새 내리는 궂은 비에도 기륭 노동자들, ‘촛불 시민’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송미연씨는 “며칠 전에 왔을 때는 (경찰의 진압으로) 현장이 어수선해 마음이 아팠는데, 다시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도와주니 새로운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꽃다지는 지난 여름 이곳을 찾아 단식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과 함께 단식하고, 촛불도 들었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아픔까지도 함께 나누는 것. 꽃다지의 노래 방식이다.
 
#####꽃다지가 간다
꽃다지 가수들이 사는 곳은 서울이지만, 일주일에 1~2번은 꼭 지방을 찾는다. 11월 6일에는 천안에서 열린 ‘공공노조 가스공사지부 문화제’에 초대를 받았다. 먼길을 달려와 피곤할 만도 한데, 그들은 “무대에만 서면 모든 고민과 피곤함이 싹 가신다”며 사회자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래의 꿈’으로 시작해 최신곡 ‘헤이 미스터리’까지, 꽃다지의 공연과 함께 노동자들의 문화제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태수씨는 “이명박 정부 들어 민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노동자들의 구조조정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힘을 보태자는 뜻에서 이런 공연을 하지만, 최근 이런 현장이 늘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꽃다지가 가는 곳엔 늘 슬픔과 아픔, 분노가 있다. 아니, 그런 곳에 꽃다지가 간다. 노동의 현장이 ‘꽃다지’다. 그들의 삶마저 노래를 거름 삼아, 노동을 햇빛 삼아 달디 단 열매로 익어간다. 
 
◈희망의 노래 ‘꽃다지’는? 
 
89년 ‘삶의 노래 예울림’과 ‘노동자 노래단’이 하나로 뭉쳤다. 두 노래패는 소규모 동아리 중심의 노래운동의 한계에서 벗어나 직업 노래꾼으로서 노래를 창작하고 보급해 민중가요의 진영의 새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꽃다지는 92년 <민들레처럼>,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 등이 담긴 1집을 내고, 그해 9월 연세대에서 첫 공연을 펼쳤다. 이후 유인혁씨를 대표로 뽑고, <전화카드 한 장>, <바위처럼>, <통일이 그리워> 등 90년대를 풍미한 히트곡이 담긴 2집을 내면서 대학가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런 음악적 성과를 바탕으로 꽃다지는 94년 봄 노동가요로는 처음으로 심의를 통과한 합법 음반을 제작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고, 노동가요를 찾는 이들도 점점 줄어들면서 꽃다지도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20년의 세월동안 꽃다지를 거쳐 간 가수와 기획자가 100여 명이 넘는다. 현재는 3명의 기획자와 3명의 가수가 새로운 꽃다지의 부활을 노래한다.
꽃다지는 오는 12월27·28일 이틀간 서울 홍대 근처 클럽 ‘프리버드’에서 연말 콘서트를 연다. 꽃다지 홈페이지. www.hopeso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