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는 재미/만화도 보면서

슬램덩크 다시 보기

새벽길 2023. 1. 29. 10:01

지학 소장의 글에 대해 무슨 정신병이 있느냐는 둥 비난하는 댓글들이 쌓였다. 나도 슬램덩크를 좋아하지만, 그 만화 안에도 논란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이 있는 건 사실이고, 만화와 영화는 그것대로 즐길지언정 문제가 되는 부분을 눈 감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김지학 소장의 지적이 틀린 게 아니지 않은가? 물론 슬램덩크 자체가 당시의 다른 만화 등과 비교해보면 여성혐오적인 요소가 훨씬 적었고, 채소연이나 한나와 같은 캐릭터도 다른 만화의 여성 캐릭터보다 더 수동적이지 않았던 듯한데, 김지학 소장의 글은 이런 점을 간과하고 있어 이를 지적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무작정 페미니즘=정신병이라며 비난하는 댓글들을 보면 조금 우려스럽다. 

2023-01-15 06:06
근우의 글은 지금 한국의 운동진영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관련지어 잘 보여준다. 송태섭의 과거사와 같이 우리의 운동 또한 포기하지 않아 반복됐던 패배의 기록에 더 가깝다. "삶과의 승부에서 때로 언더독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포기하지 않는 것뿐이다. 백퍼센트의 패배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대신, 실낱같은 승리의 가능성과 훨씬 큰 패배의 가능성 사이에 뛰어드는 것."
"그 자체로는 무엇도 증명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 모든 순간이 실은 기적이다. 100분의 1 확률을 뚫고 승리하는 것만 기적이 아니다, 포기해도 좋을 수백 가지 이유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한 기적이다."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의 씨네21 인터뷰 글도 읽어볼 만하다. 이노우에 감독은 영광의 시간이 언제인지를 묻는 질문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선택지가 없다. 항상 ‘지금’이다."라고 한다. 멋진 답변이다. 나도 그렇다.
그리고 만화 슬램덩크에  나온 명대사들을 모았다. 물론 내가 맘에 드는 걸로 뽑은 것인데, 다른 이들이 뽑은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물론 우선순위는 다를 수 있겠지만... 이번에 전국대회 본선 1차전 풍산고와의 경기, 그리고 2차전 산왕공고와의 2차전를 다룬 23권부터 31권까지 다시 봤는데, 예전에 선정해두었던 것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몇 개 추가되었다. 이런 명대사들을 만화의 컷들과 함께 보면 더 좋겠지만, 그런 건 내 감성에 맞지 않아서리...
나중에 시간이 되면 슬램덩크 성지 순례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오프닝 영상에서 등장하는 “가마쿠라 고교 앞의 철길 건널목”(이른바 강백호 철길)에도 함 가보고 싶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125
산왕 정우성이 비로소 심장에 각인된 이유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2023.01.28 10:30)
[박꽃의 영화뜰]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잘 알려진 것처럼 고교 농구팀 북산에 소속된 송태섭의 이야기다. 이때 송태섭만큼의 비중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눈에 띄게 그려진 인물이 바로 산왕 정우성이다. 강백호, 채치수, 정대만, 서태웅 등 북산 주인공의 이야기는 모두 원작에서 알던 감동 그대로지만, 북산의 마지막 경기 상대인 산왕의 정우성은 조연 캐릭터 중 유일하게 보강된 서사로 관객 앞에 나선다.
정우성은 원작 만화에서도 비교적 상세히 설명된 조연 캐릭터이긴 했다. 일본 내 최고의 농구 실력을 자랑하는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치열하게 농구를 연습했다. 그리고 실력이 다소 들쑥날쑥한 북산을 얕보기보다는, 경기 직전까지 VCR을 돌려보며 승리를 준비하는 산왕의 중심축을 이루는 강한 인물로 성장했다. 다만 인간적인 애정을 붙일 여지는 적은 캐릭터였다. 북산에 이입한 채로 만화를 보는 독자 입장, 특히 그와 1대1로 맞붙게 되는 서태웅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정우성은 실력으로 뛰어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장벽이었고 동시에 주인공들의 승리에 제동을 거는 장애물로 기능했다.
다시 돌아온 애니메이션은 정우성의 캐릭터를 보다 세밀하게 갈고 닦아 관객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일단 정우성의 미국 농구 리그행을 예고하던 원작의 중요 대사를 과감하게 생략버렸다. 이는 원작에서 확실히 보증했던 미래를 이번 경기에서만큼은 잠시 유예하겠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 대신 원작에는 없던 에피소드를 새롭게 넣었다. 홀로 훈련 중이던 정우성이 신사에서 진실한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다. 그는 “이곳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으니, 내게 필요한 경험을 하게 해달라”고 비는데, 이 장면은 결국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구성하는 성장 서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가 된다.
정우성의 기도는 더 큰 무대에서 활약하고 싶어 하는 기량 좋은 선수의 당연한 희망 사항이다. 다만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에서는 모든 것을 다 이뤘다는, 다소간의 교만이 묻어나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북산이 산왕을 만나기 전에 맞붙었던 풍전처럼 타 팀이나 타 선수를 얕보는 일차원적인 형태의 교만이 아니다. 세상의 높음과 깊음을 아직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어린 주인공이 품은 스스로에 대한 과신에 가깝다.
그의 기도 장면이라는 ‘떡밥’은 결국 극 말미 완벽하게 회수된다. 치열한 경기의 결과가 결국 북산의 승리를 가리키자, 라커룸으로 돌아가던 정우성은 돌연 벽에 기대어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분통한 눈물을 짓는다. “필요한 경험을 하게 해달라”던 자기 기도의 답이 패배임을 알게 된, 이제 막 쓴맛을 본 ‘인생 초년차’의 뼈아픈 첫 경험이다.
10대 시절 만화 ‘슬램덩크’를 보고 자란 독자는 십수 년 넘는 사회생활을 경험한 뒤 3040의 관객이 되어 다시 극장을 찾고 있다. 이미 자기 한계에 부딪혀본 적 있는 이들이고, 실력으로 주변을 크게 앞서나가던 주변 사람이 돌연 고꾸라지는 일을 한 번쯤은 목격하게 된 시점이다. 그들이 작은 키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점에 농구 인생의 무기를 고민해야 했던 송태섭에 가까웠던 인물이든, 꽤 완벽한 요건을 갖춘 줄 알았지만 뒤늦게 자기 경험의 허점을 발견해 혼란을 겪는 정우성과 비슷했던 경우이든, 결국은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허들과 겪어내야 할 진통은 있는 법이라는 사실만큼은 어느 정도 체감하는 때이기도 하다.

▲&nbsp;산왕공업고등학교&nbsp;2학년&nbsp;정우성.&nbsp;사진=나무위키

송태섭과 정우성이 미국에 진출해 경기로 다시 맞붙는다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태생적 한계와 마음 아픈 가정사를 극복하고 정상급에 오른 송태섭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이유가 충분한 언더독 스타로 자리매김 했다면, 체격을 불리고 포지션을 바꿔가며 자기 살 길을 다시 모색하는 정우성은 ‘노력형 천재’로서 제 역할을 부단히 증명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패배를 겪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 건 타고난 요건이나 주어진 여건과는 상관없는 모두의 숙명이며, 그 숙명을 성실하게 관통해내는 자 만이 크고 작은 성장을 이뤄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감격스럽다.
미국에서의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정우성은 양손으로 두 땅을 내리치는 호전적인 동작으로 송태섭을 적극 방어하기 위한 태세를 갖춘다. 이제 막 삶의 고민을 시작한 정우성의 용감한 분투를 상징하는 대목에서, 다른 주연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이 ‘슬램덩크’라는 만화를 사랑하는 팬들의 심장에 각인된다. 그의 뒷이야기가 못내 궁금해진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186
젠더박스에 갇힌 슬램덩크를 어떻게 소환할까 (미디어오늘,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2023.01.28 14:00)
[김지학의 미리미리]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인기가 뜨겁다. N차 관람도 많다. 내 주변에는 10차 관람을 앞두고 있는 사람도 있다. 30년 전 수집해 놓았던 만화책을 다시 꺼내드는 사람, 만화책 전권을 주문하는 사람, 넷플릭스에서 예전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비디오 테이프 시절에는 속도감이 너무 느려서 보지 못했던 애니메이션 버전을 이제야 보기 시작했다. 1.5배속 재생 기능 덕분이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사회운동가로 살고 있는 지금 다시 보는 슬램덩크는 학교 안 청소년 시절 보던 것과는 또 다른 의미와 감동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 당시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도 주었다.
많은 콘텐츠가 그렇듯 슬램덩크 역시 남성중심적이면서 이성애 중심적이다. 여성 등장인물의 수가 매우 적고, 운동선수는 남성이고, 여성은 매니저라는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이분법적인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슬램덩크 작가의 우익 논란을 차치하고도, 이 콘텐츠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콘텐츠의 소비자가 비판적으로 미디어를 읽어내는 능력을 갖춰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게 되는 지점이다.
심각하게 마초적인 설정에는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캐릭터 자체에서도 과도하게 거대한 남성의 몸과 어마어마한 신체 능력과 운동신경이 강조된다. 외모에서는 힘이 세고,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남자다운 남자의 외모를 갖춘’ 맨박스에 들어가 있는 캐릭터들이다.
성향에서는 또 어떨까? ‘남자답다고 여겨지는 성격·성향’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농구를 다시 시작한 정대만이 어느 날 과거 자신의 패거리였던 이들과 다시 만나게 됐다. 정대만은 농구를 하겠다고 그들을 떠난 상황이었고 그들은 정대만의 배신에 화가 나 있었다. 정대만의 양 손을 발로 밟고 쇠 파이프로 손을 다시는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리려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이후 정대만이 안 감독에게 자신은 감독과의 약속을 지켰다며 ‘싸우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서사로 유추해 볼 때 ‘폭력은 지양하고 스포츠맨십을 지향하자’는 가치관을 담은 의도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는 것을 스스로 자처해 마주하는 것이 ‘멋있는 것’, ‘남자다운 것’으로 보여지게 만들고 있다.
마초적인 전통적 남성성을 강조하며 만들어진 콘텐츠이다보니 깡패처럼 보이는 패거리 문화나 패싸움이 “남자다운 것”처럼 묘사되는 부분이 많다. 일상에서 그리고 연습이나 시합 중에도 다른 사람에게 박치기를 하거나 주먹으로 머리를 쾅쾅 때리는 것은 남자다운 행동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이제는 운동부를 포함해서 모든 곳에서 학교폭력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행동이다.
슬램덩크가 재미있는 이유는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으로 이루어진 북산고의 주전 선수들뿐만 아니라 북산고와 맞붙는 상대팀 선수들의 서사 또한 자세히 다루며 한 명 한 명을 입체적인 인물로 다가오게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성격과 배경을 바탕으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이들의 성장(개인의 성장, 팀워크의 발전)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다. 모두가 다 다른 특별한 존재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집념과 투지다.
반면 여성 등장인물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여성 등장인물은 채소연이다. 채소연은 채치수의 동생이자 서태웅을 좋아하고 강백호에게는 짝사랑의 대상이다. 강백호가 농구를 하도록 만들었고 강백호를 가르쳤고 응원하고 용기를 주고 지지하는 역할이다. 채소연이 어떤 인물인지 남성들과의 관계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채소연은 주변 남성들을 위해/의해 존재하는 캐릭터로만 존재한다.

▲&nbsp;만화책&nbsp;&lsquo;슬램덩크&rsquo;&nbsp;갈무리.

채소연은 한 눈에 반할만큼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고 적당히 수줍으면서도 적당히 발랄하고 적극적이다. 강백호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기도 하지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애교도 있다. 강백호가 어떤 모습을 보이든 긍정적으로 해석해 주고 응원해 준다. 전통적 여성성에 해당하는 성역할을 수행하며 ‘남자의 기’를 세워준다. 강백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고, 순수하며, 농구를 좋아하는 강백호와 자신의 오빠 채치수가 잘되길 응원한다. 채소연은 남성중심적인 가부장 사회가 원하는 “완벽한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채소연은 중학교 때 농구를 했지만 운동신경이 없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남성 등장인물들과 달리 채소연에게는 집녑, 투지가 없었던 것이다. 남성 캐릭터들은 엄청난 운동신경을 가진 천재이거나 운동신경이 조금 부족하면 엄청난 노력을 하는 노력파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왜 채소연은 부단한 노력으로 부족한 재능의 한계를 극복한 캐릭터로 등장하지 못하고, 보호해 주고 싶은 연약한 존재로 그려졌어야 했을까.
‘서태웅! 서태웅! LOVE 서태웅!’을 외치는 서태웅 응원단은 어떤가? 얼굴도 이름도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설정도 없다. 세 명의 서태웅 팬은 나중에 어마어마한 인원수로 증가되는데 독자들은 어느 누구도 이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바가 전혀 없다. 슬램덩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큰 여성으로 이루어진 집단인데 이름도 없고 역할도 없다. 그저 서태웅을 좋아하는 역할이다. 얼마나 납작한 존재냐 하면, 얼굴도 평면이다. 작가의 그 뛰어난 데생 실력으로 얼굴을 입체적으로 그려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nbsp;TV만화&nbsp;&lsquo;슬램덩크&rsquo;&nbsp;갈무리.

그 다음으로 큰 여성의 무리가 나오는 장면은 백호군단이 무원고를 찾아갔을 때 만나게 되는 여학생들이다. 이들은 백호군단이 무원고의 에이스 오경민을 해치러 왔다고 생각하며 ‘오경민 선수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 학교를 지킨다. 그 장면에서도 여성은 남성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 개개인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이런 테스트가 있다. ①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두 명 이상 나올 것 ②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③그 대화 내용이 남성과 관련된 내용이 아닐 것.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스 벡델(Alison Bechdel)이 고안한 테스트인데 남성 중심의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세 가지 기준만 들으면, 너무나 황당할 정도로 별 것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런 기준도 통과를 못하는 영화가 있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지만, 놀랍게도 대부분의 영화가 통과를 못한다(최근의 한국 영화는 20~30% 정도 통과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테스트를 통과한다고 해도 그다지 “성평등 영화”로 불릴만한 영화는 아닌 영화들이 많다. 그래서 2020년에 네 가지 기준이 더 추가된 벡델테스트7이 나왔다. ④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중 1명 이상이 여성 영화인일 것 ⑤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이거나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역할과 비중이 동등할 것 ⑥여성 캐릭터가 성별 고정관념에 의해 재현되지 않을 것 ⑦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시선을 담지 않을 것.

▲&nbsp;&lsquo;슬램덩크&rsquo;&nbsp;일러스트.

슬램덩크는 2020년에 업데이트 된 테스트는 커녕 1985년도 기준에도 통과되지 못한다. 슬램덩크는 가슴벅찬 작품이지만 여성을 독립된 인격체로 여기는 작품은 아니다. 어느 정도 비중을 가진 여성 캐릭터는 앞서 언급한 채소연과 농구부 매니저인 한나밖에 없다. 둘이 대화하는 장면은 거의 없는데 아주 가끔 있다고 하더라도 남자 농구부원들(대부분 강백호, 채치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슬램덩크에서 여성은 남성을 응원해 주는 등 남성을 위한 존재로 그려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강백호는 중학교 시절 3년 동안 여성들에게 50번 고백하고 50번 차였다고 나온다. 송태섭도 그에 조금 못 미치지만 만만치 않다고 나온다. 여성들은 동등한 인격을 가진 주체로서 등장한다기 보다는 데이트나 연애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모습으로 나온다.
‘이 작품은 남자들이 주인공인 남자 농구부를 주제로 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그럴 수 있다. 슬램덩크에 어떤 면을 비판했다고 해서 슬램덩크와 같은 작품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그룹의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묘사된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주변화되거나 대상화돼야 할 필요는 없다.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동등한 존재로 묘사될 수 있다. 또한 작품 하나만을 보고 사회 전체를 논할 수 없다. 여성 캐릭터들이 대부분이고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모두 깊은 서사와 맥락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캐릭터들이 독특한 성격과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인적인 성장과 단체의 성장도 함께 이루어 나가는 작품들도 많다면,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작품은 아직도 많지 않다.
과거의 기준과 현재의 기준은 다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문제제기 당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이제는 문제제기가 될 필요가 있다.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치는 콘텐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남성지배와 여성종속을 유지하며 남성에게도 억압적이고 해로운 ‘젠더박스’의 굴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젠더체계에 균열을 내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하고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목소리 내는 사람들이 세상을 평등하게 만드니까. 그리고 슬램덩크에서 많은 남성들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것처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어린이, 청소년, 노인 등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다양한 개성과 특징 그리고 개개인의 배경, 맥락, 역사를 가진 입체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작품이 많이 발굴되고 사랑받을 기회가 주어지길 바란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훨씬 더 재미있는 작품들을 많이 만나게 될 수 있고, 억압에 둘러싸인 우리의 삶도 좀더 해방에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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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01801
[기획] 26년 만에 극장판으로 돌아온 ‘더 퍼스트 슬램덩크’ 미리 보기 (씨네21, 송경원 기자, 2023-01-03)
“농구 좋아하세요?”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슬램덩크> 덕분에 농구를 시작하고 알게 되고 좋아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끝난 월드컵이 전 세계인을 축구에 흠뻑 빠지도록 만들었지만 적어도 한국과 일본에서 90년대는 농구의 시대였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주간소년점프>에 연재된 만화 <슬램덩크>는 당시 농구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계기 중 하나였다. 한편의 만화를 넘어서 시대의 아이콘이자 문화현상으로 자리매김한 <슬램덩크>는 <드래곤볼>과 함께 90년대 일본 만화를 이끈 쌍두마차지만 여느 만화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당시 인기 만화들은 작가가 원한다 해도 마음대로 끝낼 수 없었고, 그 결과 무리하게 연재를 이어가다 본래의 색과 매력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슬램덩크>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박수칠 때 과감히 떠나는 선택을 감행한다.

<슬램덩크>의 갑작스러운 연재 종료는 당시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산왕전을 마지막으로 한 북산팀의 여정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고 인기도 한창 절정에 오른 시기였기에 얼마든지 연재를 이어나갈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슬램덩크>는 아름다운 이별을 택했고 역설적으로 이러한 완벽주의에 가까운 태도가 <슬램덩크>를 20세기 최고의 일본 만화 중 한편으로 만든 동력이 되었다. 이노우에 작가는 단편집 <피어스>나 기획전 <슬램덩크 그로부터 10일 후> 등 몇 가지 특별한 방식으로 북산팀의 후일담을 전하며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감사를 표했지만 북산고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추억과 결핍은 그리움을 거쳐 끝내 전설이 되었다. <슬램덩크>는 스포츠 만화의 정수이자 90년대의 정서가 담긴 걸작이며 미완성이기에 완벽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사례다. 그런 <슬램덩크>가 무려 26년 만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각본과 감독을 맡았다. 이쯤 되면 반가운 마음만큼이나 궁금증이 커진다. 왜, 지금, 다시 <슬램덩크>인가.

생동감의 전달, 이노우에 스타일의 성취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제목 그대로 <슬램덩크>의 첫 번째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새로운 에피소드나 후일담을 이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택한 방향은 가장 빛난 경기의 애니메이션화, 가장 ‘슬램덩크’다운 순간의 재현이다. 그간 TV애니메이션에서 몇몇 경기들을 보여주긴 했어도 작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산왕공고와의 경기는 영상화된 적이 없었는데, 이노우에 감독은 바로 이 산왕전을 첫 번째 극장판의 무대로 골랐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보는 만큼 중요한 건 경기 결과가 아닐 것이다. 만화에서도 그랬지만 이노우에 작가의 핵심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순간 묘사에 있다. 정지된 컷임에도 숨소리까지 느껴지는 듯한 생동감, 캐릭터들의 표정, 땀방울 하나에도 감정이 묻어나는 듯한 사실적인 묘사, 무엇보다도 여백을 활용한 완급의 조절이야말로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강점이다. 만화 <슬램덩크>가 한 경기에 수많은 에피소드와 컷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화 <슬램덩크>는 어떤 동영상보다 역동적이다. 만화의 한컷 한컷이 이미 준비된 영상의 세밀한 콘티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경기의 생동감을 재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얼핏 보면 영상화에 이만큼 최적화된 원작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정지된 그림이 마치 동영상 같은 생동감을 전달하는 것과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른 감각이다. <슬램덩크>는 모든 장면이 결정적 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장면들로 선택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는 정지되어 있기 때문에 더 생생하고 역동적이다. 문제는 이 컷들이 연결되어 움직일 때 그 과정에는 불순물이라고 해도 좋을 쓸모없는 순간들까지 함께 담긴다는 거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지된 역동성에 실제 시간을 부여했을 때의 간극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다. 비결은 결국 다시 돌아가 이노우에 스타일이다. 이것은 움직이는 ‘그림’이다. 캐릭터가 실제로 움직인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한컷 한컷의 표현들이다. 이노우에 감독은 “내 손으로 캐릭터가 살아날 때까지” 직접 리터치하는 것을 고집했다. 종이의 질감이 느껴지는 그림. CG로 표현된 캐릭터들의 움직임에 이질감이 거의 없는 건 그 뿌리를 원작 만화 작화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기존의 3D CG애니메이션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임의 박진감, 육체의 생동감을 살려낸다. 완급의 조절도 인상적이다. 실제 경기의 흐름과 같은 리얼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만화 속 마음의 소리라든지, 개그적인 표현 등이 많이 축소됐는데 몇몇 에피소드나 캐릭터(예를 들면 김판석)는 과감하게 생략하기도 했다. 리얼함을 위해서는 거꾸로 침묵과 여백이 필요하다. 무엇을 자세하게 묘사할 것인지만큼 중요한 건 무엇에서 힘을 뺄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극한의 속도감과 과장된 묘사를 위주로 한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화와는 정반대의 선택.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작화부터 편집의 흐름까지 실로 ‘이노우에 다케히코’스럽다.
21세기에 <슬램덩크>를 다시 본다는 것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야기의 화자다. 이번 극장판에서는 송태섭이 그 역할을 맡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본편에서 다소 비중이 적고 개별 에피소드가 없었던 만큼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본편에서 다뤄주지 못한 작가의 미안함도 반영된 듯하다. 어린 시절 농구를 가르쳐줬던 송태섭의 형은 몸싸움을 피하려는 송태섭에게 말한다. “넘어진 다음이 중요해. 피하지 마.” <슬램덩크>가 전하는 진심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대단하지도 놀랍지도 않은, 모두가 알고 있는 당연한 말들. 하지만 캐릭터들의 땀방울이 뭉쳐 그 진부한 말들은 진심이 되어 끝내 지워지지 않을 울림을 선사한다.

흔히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들 한다. 이 말은 각본이 없어도 이렇게 드라마틱할 수 있느냐에 대한 감탄이 아니다. 반대로 각본이 없기에 그 어떤 드라마보다 생생하고 예측 불가능한 감동을 안길 수 있다는 의미다. 90년대 <슬램덩크>는 농구 신드롬을 불러왔다. 시대의 분위기가 바뀐 지금 <슬램덩크>를 마주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슬램덩크>와 함께 나이 먹어온 팬들에게, 혹은 이번 극장판을 통해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슬램덩크>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는 말한다. “용기를 가지고 어려움에 도전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스포츠의 본질은 재미이고 그걸 전달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 드라마의 각본을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재미있다면 그건 거꾸로 결과를 알기에 과정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은 덕분일 것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올해의 유행어처럼 시대와 시기에 구애받지 않는 올 타임 레전드의 증명.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단순히 팬들을 위한 선물을 뛰어넘어 스포츠의 본질을 건드린다. 당신의 영광의 시간은 언제인가요? (적어도 스포츠에선) 답은 정해져 있다. 바로 지금입니다.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1061600015
[위근우의 리플레이] 송태섭과 북산고···언더독이 할 수 있는 건 ‘꺾이지 않기’다 (경향, 위근우 칼럼니스트, 2023.01.06 16:00)
1% 확률을 뚫고 승리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송태섭은 단 한 번도 자신보다 작은 상대와 맞붙어본 적이 없다. 168㎝에 59㎏. 일반 고등학생 중에서도 왜소한 편인 그에게, 농구 코트에서 만난 도내 최고 수준 파워를 지닌 해남의 이정환이나 그런 이정환도 묶을 정도의 압박 능력을 지닌 산왕의 이명헌은 은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물리적인 차원에서 벽이나 다름없다. 현란한 볼 핸들링과 빠른 스피드, 슛 페이크를 지니고 있지만, 결국 상대편 림을 향해 돌진하기 위해선 어느 순간 그 벽에 부딪혀 뚫어낼 용기를 내야 한다. 그 용기 없이 벽 앞에 멈춰서 펼치는 모든 기예는 공허한 자기증명의 몸부림일 뿐이다. 1월4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 벽에 도전하고 돌파하는 이야기다. 원작 만화 <슬램덩크> 중 마지막 에피소드인 산왕공고와 주인공 북산고의 대결을 담아낸 이번 작품에서, 전국 최강 산왕공고는 명성 그 자체로 이미 벽 같은 존재다. 심지어 그들이 무시무시하게 단련된 체력으로 전방부터 압박하는 올 코트 프레스 전술을 펼칠 때, 그 넓던 코트는 강고한 벽에 둘러싸인 듯 극도로 좁아진다. 드리블로 돌파할 공간도, 공을 패스할 공간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송태섭이어야 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에도 없던 과거사를 포함해 송태섭을 서사의 중심에 놓고 산왕공고와의 경기를 그려낸다. 도저히 넘거나 돌파할 수 없을 것 같은 벽.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송태섭은 단 한 번도 자신보다 작은 상대와 맞붙어본 적이 없다.
송태섭과 북산고 농구팀이 그려내는 부침과 패배 이야기
삶과의 승부를 마주한 언더독이 할 수 있는 건 ‘꺾이지 않기’
그리고 실낱같은 승리 가능성과 훨씬 큰 패배 가능성 사이에서
근성을 가지고 뛰는 것
26년 지나도 사랑받는 ‘슬램덩크’
편견 깨는 도전이라는 서사의 힘
우리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한 세대가 열광했던 원작이었던 만큼 산왕과의 경기 결과는 거의 모두가 알고 있다. ‘언더독’이었던 북산의 승리, 그리고 모든 체력을 쏟아낸 뒤 다음 경기에서 거짓말처럼 패배. 물론 성공하고 오래된 IP 대부분이 그러하듯, 때론 아는 맛이 더 매혹적이며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역시 마찬가지다. 펜선으로 하나씩 북산 멤버들이 완성되며 걸어오는 오프닝을 보며 원작 팬으로서 가슴 뛰지 않기란 어렵다. 하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향수를 자극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3D를 이용해 질감과 공간감, 속도감을 살린 애니메이션 연출 안에서 산왕은 진정 압도적이다. 도내 최강 센터 채치수조차 자신감을 잃을 정도로 림을 지켜내는 신현철의 육체는 철벽과도 같으며, 서태웅조차 반응할 수 없는 빠른 퍼스트 스텝으로 정우성은 순식간에 공간을 찢어 페인트존을 유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송태섭의 시선으로 올려다보는 이명헌의 수비는 관객마저 숨 막히게 한다. 경기 초반, 작품은 송태섭의 시야를 통해 이명헌과 송태섭의 미스매치를 묘사한다. 키는 결코 숫자일 뿐인 게 아니다. 송태섭보다 12㎝ 더 크고 뛰어난 예측 능력까지 지닌 그가 바짝 밀착해 수비를 펼치며 송태섭의 시야는 극도로 좁아진다. 원작에서도 센터 채치수나 파워포워드 강백호를 중심으로 골 밑에서의 거친 몸싸움을 묘사한 바 있지만, 단신 메인 볼 핸들러에겐 수비수 앞에서 패스할 공간을 찾는 것부터 일종의 몸싸움이다. 마냥 시간을 끌기엔 공격 제한 시간이 있고,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하게 패스를 했다간 공격 기회 자체가 날아가며,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 고민하면 이명헌에게 공을 빼앗긴다. 북산 공격의 시발점인 송태섭이 처한 어려움이 가시화될수록 산왕이란 벽은 더더욱 거대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여기서 등장하는 송태섭의 과거사. 세 살 터울에 지역 농구 유망주였던 형이 바다낚시를 나갔다가 죽고 형을 동경하던 그는 농구부 활동을 한다. 드리블과 패스 센스는 어느 정도 있었지만 형에 비해 많이 작아 강한 압박엔 쉽게 무너지며 형과 비교당한다. 이사를 가서도 농구 연습은 열심히 하지만 이제 그와 일대일로 붙어 강하게 수비하고 동기 부여해주는 형은 없다. 어떤 기술로도 부재하는 형을 돌파할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산왕을 이기는 것보다도. 과연 형이 살아 있었다고 송태섭이 상대해온 김수겸, 이정환 같은 특급 에이스로 성장했을지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함께 나이 먹다 160㎝대 후반 즈음 비슷한 키에서 멈춰 송태섭에게 지는 날이 왔을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알 수 없음이 부재의 끝없는 깊이를 만든다. 어디까지 하면 형을 따라잡고 형을 대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도 해결하거나 종결할 수 없는 질문. 가능한 건 농구를 계속하는 것뿐이다. 영원히 이길 수 없더라도 영원히 승부를 시도할 수는 있다. 정석적인 플레이를 하지 않는다고 채치수에게 혼나도, 왕년의 농구 유망주였던 정대만 패거리에게 린치를 당해도, 송태섭은 농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북산의 안 감독은 포기하면 그걸로 경기는 끝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포기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송태섭의 과거사는 포기하지 않아 반복됐던 패배의 기록에 더 가깝다. 삶과의 승부에서 때로 언더독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포기하지 않는 것뿐이다. 백퍼센트의 패배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대신, 실낱같은 승리의 가능성과 훨씬 큰 패배의 가능성 사이에 뛰어드는 것.
송태섭의 과거사를 중심으로 교차하는 다른 북산 멤버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성장하고 전진해 산왕전 승리라는 기적에 이르기까지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겪었던 그 수많은 부침의 순간마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았던 그 순간순간의 선택이 모두 기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농구 명문이 아닌 북산에서 외로이 원맨팀을 유지하면서도 전국제패라는 꿈을 꾸는 것(채치수), 오랜 방황을 마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농구부에 복귀하는 것(정대만), 하다못해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관심도 없고 무서운 주장이 있는 농구부에 투신하는 것(강백호)까지, 그 자체로는 무엇도 증명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 모든 순간이 실은 기적이다. 100분의 1 확률을 뚫고 승리하는 것만 기적이 아니다, 포기해도 좋을 수백 가지 이유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한 기적이다. 최강 산왕을 상대로 승리하는 기적은 총 40분 경기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 포기하지 않았던 수많은 기적의 순간들이 모여 또 하나의 기적을 더한 것에 가깝다.
경기 막바지, 첫째를 잃은 슬픔과 첫째를 따라 농구를 하는 둘째 송태섭에 대한 착잡함에 힘겨워하던 어머니는 송태섭의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찾아온다. 이명헌과 정우성의 더블팀 수비에 고전하던 그에게 어머니는 돌파하라 외치고, 그는 키 작은 선수에게 유일한 살길은 드리블이라며 그 둘 사이를 돌파한다. 어머니의 등장을 제외하면 원작에도 나오는 장면이지만, 원작에선 일종의 주인공 팀 보정에 가까운 느낌이었다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선 그가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고 부딪혀온 벽을 끝끝내 돌파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돌파와 함께 전개되는 북산의 속공은 새삼 코트가 얼마나 넓은 공간이었는지 확인시켜준다. 그 넓은 공간에서 송태섭의 움직임은 더없이 자유롭다. 그 자유로움 안에서 둥근 공은 비로소 어디로 튈지 모를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준다. 오늘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만약 <슬램덩크>가 근성에 의한 승리에만 의미부여하는 자기계발 서사였다면 그토록 오래 사랑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코트에서 얼마나 많은 청춘의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는지 보여주며 <슬램덩크>, 그리고 완결 26년 만에 나온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여전히 우리의 심장을 두드린다.
원작에 없던 이번 작품의 오리지널 엔딩은 그래서 상당히 의외이되 일관된 메시지를 드러낸다. 시간이 흘러 송태섭은 어쩌면 이정환, 이명헌을 능가하는 최강 최악의 매치업 상대를 만난다. 하지만 괜찮다. 송태섭은 단 한 번도 자신보다 작은 상대와 맞붙어본 적이 없었으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승부는 계속됐다. 그 계속되는 싸움 속에 가끔은 멋진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어쩌면 바로 오늘.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01803 
[인터뷰]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 “다시 처음처럼, 리얼하게” (씨네21, 송경원 기자, 2023-01-03)
- 연재 종료 후 26년 만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왔다. 당시에도 극장판을 만들자는 요구는 적지 않았을 텐데 지금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 내 안에서는 ‘돌아온다’는 감각은 별로 없고, ‘처음’이라는 느낌이다. 지금 영화를 만드는 이유의 밑바닥에는 오랜 세월 <슬램덩크>라는 작품을 봐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기쁨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한다. 나에게는 최선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슬램덩크>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끝났고 거기에 슬퍼하거나 놀란 분들도 계신 걸 잘 알고 있다. 늘 그런 분들께 보답하려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원작의 에피소드 중 하나를 골랐다. 가령 강백호가 건강을 회복했는지, 서태웅이 대학에 발탁되어 어떤 활약을 했는지 같은 후일담을 궁금해하는 팬들이 많은데, 산왕전을 극장판의 소재로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
= 일단 기획안에서 그 경기를 원했다. 표현의 측면에서 가장 큰 도전을 할 수 있는 경기였기 때문에 나 역시 좋았다. 각각의 팬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런 식의 기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렇게 기대해주었기 때문에 이 영화의 기획이 실현되었다. <슬램덩크>를 처음 접하는 분도 이해할 수 있는 영화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지 취사 선택해야 했다. TV애니메이션의 연속이라 생각지 않았고,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원작의 에피소드를 다른 시점으로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만화책의 엔딩은 어떤 팬들에겐 예상치 못한 마무리였을 테지만 작가에게는 필요한 결말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절정의 순간에서 이야기를 끝낸 이유가 있었나.
= ‘독자들을 놀라게 했구나’ 하는 날카로운 가시가 계속 마음속에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끝낸 것 자체는 지금도 만족한다. 내가 생각한 대로 이야기의 핵심 부분에서 필연적인 형태로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극장판은 2014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다. 작품 연재를 끝냈을 때와 다시 극장판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 작가의 시점이나 가치관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
= 영화 속의 시점에도 나타났지만 ‘강함’의 의미와 ‘잘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공감과 상상력이 중요하다. 아픔과 상실, 잘되지 않는 것, 살아가면서 누구나 통과하는 길을 표현하고자 했다. 돌아보면 나도 나름대로 지나왔던 길이라 더 공감되도록 그릴 수 있었다.
- 송태섭의 어린 시절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이번 작품의 화자로 선택한 셈인데.
= 팀의 사령탑인 포인트 가드의 시선으로 이 경기와 이 한편의 영화를 그리고 싶었다. 덧붙여 연재 당시부터 송태섭에 관해서는 어딘가 스토리가 부족했다고 생각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원작에선 강백호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해서 같은 1학년인 서태웅, 팀의 중심인 3학년 채치수, 복귀할 때까지 드라마가 있었던 정대만 등이 스토리를 이끌었는데 2학년인 송태섭은 플레이나 내적 묘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더 표현하고 싶었다.
- 형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함께한다는 송태섭 가족의 에피소드는 공감과 감동을 준다.
= 코트 위 강자들의 태연한 얼굴 뒤에도 각각의 삶이 있고 그곳까지 가는 길이 있다. 그건 객석에 앉아 있는 분들도 똑같아서 각자 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조금은 힘이 나지 않을까 한다.
- CG, 3D가 사용되긴 했지만 마치 로토스코핑 기법처럼 기본적으로는 펜선의 질감이 두드러진다.
= 단순한 실사도, CG 같은 그림도 아닌 만화의 그림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손으로 그린 느낌과 펜 선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리터치를 많이 하는 편이다. 인물들에게 피를 돌게 한다고 해야 할까. 만화는 그림이나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지만 결국은 캐릭터다. 캐릭터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게 나에겐 일종의 생명선 같은 거다.
- 애니메이션에 맞춰 다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원작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살아 움직인다. 3D CG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받은 부분이 보완된 셈인데 움직임의 박진감, 육체의 생동감을 살려낸 비결이 있을까.
= 만화를 그릴 때도 플레이의 연속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재현하기 위해 모션 캡처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대로 하면 아무래도 박진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으로서 움직임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과장이나 생략을 넣어서 완급을 조절하거나 만화 속 정지화면의 멋진 이미지도 움직임 속에서 느낄 수 있도록 자세와 위치를 리터치해서 조정했다. 움직임의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물리적 무게를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내가 전하는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스탭이 인내심을 가지고 시행착오를 거듭한 결과다. 오랜 여정 끝에 실현할 수 있게 돼 스탭들에게 감사하다.
- 색감은 선명하기보다는 다소 흐릿한, 파스텔화 같은 느낌이다.
=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으며 구름 낀 회색 하늘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눈을 빼앗길 것 같은 반짝반짝 빛나는 색도 좋지만 이 영화에서는 일상과 맞닿아 있는, 색 바랜 곳도 있는 듯한 분위기로 가고자 했다. 거기에 살아 있는 인물을 느꼈으면 해서 채도를 억제했다.
- 반면 만화 속 마음의 소리라든지 개그적인 표현은 많이 축소됐다. 실제 경기의 흐름과 같은 리얼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나.
= 나 역시 웃음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더 넣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경기의 리듬을 깨면서까지 넣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꼭 살리고 싶었던 건 리얼함이었다. 진짜와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그것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진짜 리얼함이다.
- <배가본드> <버저비터> 등 늘 새로운 장르, 새로운 것에 도전해왔다.
= 이번에 애니메이션에 도전해 굉장히 많은 걸 배웠다. 내게 있어 영원한 테마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진 완성된 만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뭔가를 계속 전해왔다. 이번엔 팀 스탭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1부터 10까지 보여주고 전해야 했다. 전달 방식이 서툴면 몇번이나 다시 의견이 오가야 했는데, 원래 작품에 대해 꼬치꼬치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겐 큰 도전이었다. 만화와 영화의 표현 방법, 문법의 차이도 많이 배웠다. 영화는 작은 것이 쌓이면 마지막에 만화보다 더 큰 차이가 생긴다는 걸 알았다. 만화는 한컷 한컷이 완성된 세계다. 애니메이션은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자세한 부분들이 축적되어 최종적으로 작품 전체의 느낌을 좌우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 강백호의 대사를 빌리자면, “작가님의 영광의 시간은 언제인가?”.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선택지가 없다. 항상 ‘지금’이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7937
‘더 퍼스트 슬램덩크’, 원작자가 선사하는 모두를 위한 선물 (미디어오늘, 성상민 문화평론가, 2023.01.14 10:58)
[성상민의 문화 뒤집기]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측면으로 회자될 작품
상징적 인물 아닌 '송태섭' 내세운 서사, 또 한번 증명한 인기
‘모두에게’ 포커스 맞춘 접근, 오랜 팬들과 더해져 시너지
지난 4일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이 심상치가 않다. 개봉 이전 10년 넘는 공백 끝에 개봉한 제임스 카메란의 신작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아바타 : 물의 길’과 동명의 유명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윤제균의 JK필름과 CJ ENM이 합작한 ‘영웅’이 다투던 극장가에 또 다른 거센 물결이 일어났다. 계속 1위를 ‘아바타 : 물의 길’이 차지하는 가운데 ‘영웅’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거센 대결을 벌이고 있는 국면이 벌어지고 있다. 1월 11일 현재로서는 ‘영웅’이 2위를 차지할 때가 더 많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의 관객수 차이는 크게 나지 않는 상황이다.
분명 일본 애니메이션은 한국에서 일정한 관객층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에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중 371만 관객을 모으며 가장 크게 흥행한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을 비롯해 코로나-19로 신음하던 전세계 극장가에 촉촉한 단비가 된 ‘극장판 귀멸의 칼날 : 무한열차편’의 215만명 흥행은 이미 형성된 팬층이 없었더라면 결코 거두기 어려웠을 흥행이다. 한국에서 꾸준히 ‘짱구는 못말려’나 ‘도라에몽’, ‘명탐정 코난’, ‘원피스’ 등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개봉하는 이유기도 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포스터.

게다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한국의 1990년대를 정면으로 관통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농구 만화이자 애니메이션인 ‘슬램덩크’가 작품이 공식적으로 완결된지 25년을 훌쩍 넘겨 발표한 신작이다.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지기 직전이지만 1990년대 초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만화잡지의 인기가 형성될 무렵 한편에는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을 내세운 서울문화사(현, 서울미디어코믹스)의 ‘아이큐 점프’가 있었다면, 반대편에는 ‘슬램덩크’를 내세운 도서출판 대원(현, 대원씨아이)의 ‘소년 챔프’(현, 코믹 챔프)가 있었다. 사실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는 본래 일본에서는 같은 ‘슈에이샤’의 출판사의 같은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된 ‘동료’였지만 한국에서는 운명의 장난으로 만화 잡지의 붐과 함께 한 세기의 라이벌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서는 대학교 농구부와 실업 농구팀이 함께 승부를 겨루던 ‘농구대잔치’가 허재, 서장훈, 우지원, 현주엽 등의 인기 스타의 출몰로 연일 화제가 되어 있었다. ‘슬램덩크’는 1994년 MBC를 통해 방송된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함께 농구를 실감 나게 다룬 작품으로 함께 화제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애니메이션판이 처음에는 1994년 도서출판 대원의 형제회사 ‘챔프영상’에서 비디오판을 통해 출시되고, 이후 1998년에는 SBS를 통해 재더빙을 통해 방영되며 다시금 인기를 모았다. 농구대잔치를 통해 증명된 농구에 대한 뜨거운 팬심을 바탕으로 1997년 정식으로 농구 프로리그인 KBL이 출범한 상황이었다. 당시 KBL에 프로팀을 스스로 창단할 정도로 농구에 큰 관심을 기울이던 SBS가 한 층 더 농구에 대한 열기를 끌어 올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대로 적중해 ‘슬램덩크’는 만화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도 흥행하고, KBL 역시 함께 시너지를 받아 한때나마 프로야구나 축구 K-리그의 인기를 위협할 정도로 인기를 모을 수 있었다. SBS판 오프닝으로 쓰인 박상민의 ‘너에게로 가는 길’이 아직도 뜨거운 사랑은 받는 것은 덤이다.
그러나 그 인기가 현재까지도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슬램덩크’가 마무리된 이후 25년 이상의 긴 시간이 흘렀다. 분명 한국, 일본 양국에서 큰 사랑을 받은 작품답게 ‘슬램덩크’는 아직도 콜렉터들을 위한 새로운 판본을 출시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새로운 작품도 인기를 받을 수 있을까.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슬램덩크’ 이후에도 일본의 전설적인 무사 미야모토 다케시의 이야기를 그린 액션 시대극 ‘배가본드’, ‘슬램덩크’보다 더욱 어둡지만 현실적인 분위기로 비장애인과 장애인 농구를 그리는 ‘리얼’로 꾸준히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러나 6년간 ‘슬램덩크’를 꾸준히 주간으로 연재하며 힘이 들었던 탓인지 두 작품의 연재는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느긋하게 연재를 이어나가고 있다. 여전히 이노우에 다케히코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결코 적지 않지만, 폭발적인 힘으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불안요소들도 적지 않았다. 작품이 처음 발표된 지난 2021년 말, 일본 기준 2022년 12월에 신작을 ‘3D 애니메이션’으로 발표하겠다는 소식은 많은 팬들을 반신반의하게 만들었다. 분명 2D 애니메이션의 대명사였던 일본도 서서히 3D 애니메이션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2D의 형태가 익숙한 기존의 ‘슬램덩크’ 팬들에게 3D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과연 높은 퀄리티는 물론 오랜 시간 신작을 기다려온 이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개봉을 약 한 달 앞두고 해프닝이 있었다. 이전 TV 애니메이션에서 기용했던 성우들을 모두 교체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전의 목소리가 익숙하던 올드 팬 일부에서는 이 작품을 보지 않겠다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한국 역시 ‘강백호’(사쿠라기 하나미치) 역할을 맡은 강수진을 제외하면 모든 성우들이 교체되었다. 게다가 한국은 비록 단역에 불과하지만, 배우 고창석이 더빙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들리며 ‘비전문 성우’의 연기가 과연 괜찮을지 일말의 의심을 품게 했다.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측면으로 회자될 작품
이렇게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가운데 일본에서는 작년 12월, 한국에선 최근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높은 흥행 성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였다. 한국보다 약 한 달 정도 빨리 개봉한 일본에서는 개봉 6주 연속 1위를 달리며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슬램덩크’의 인기는 건재함을 보였다. 현재 일본에서는 1월 9일까지 관객은 총 527만명, 흥행 수입은 약 76억 8500만엔(약 723억원)을 기록하는 상황이다. 한국 역시 개봉 일주일째를 맞이하는 1월 10일까지 관객은 50만명, 누적 매출액은 51억원을 기록하며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하는 중이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한일 양국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연말연초의 화제작이 되도록 만들 것일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예고편이 공개된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걱정했던 작품의 기술력이다. 작품은 분명 3D 애니메이션이지만, 실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2D의 평면과 유사해보인다. 이는 ‘셀 셰이딩’(Cel Shading)이라 부르는 기술로, 3D의 폴리곤 위에 2D로 그려진 그림과 유사하도록 채색과 명암을 더해내는 기법이다. 이러한 기술은 이전부터 꾸준히 쓰여왔던 연출법이다. 특히 태생적으로 2D 애니메이션과 다른 질감이 될 수 밖에 없는 3D 애니메이션을 어떻게든 2D와 비슷하게 느끼도록 만들기 위해서 계속 고안했던 기술이기도 하다.
그러나 셀 셰이딩은 글로 보기에는 쉬운 기술처럼 느껴져도 실제 구현하기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기술이다. 3차원으로 된 화면을 시점의 이동에 따라 고정된 2차원의 그림처럼 보이게 하고, 동시에 이를 프레임마다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상당히 고난이도의 연출과 컴퓨터 기술이 필요하다. 셀 셰이딩의 개념 자체는 발표된지 수십년이 넘게 지났지만, 실제 이를 그럴듯하게 구현하며 관객을 만족시킨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쉽지 않은 연출을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해냈다. 그것도 무척이나 강한 역동적인 캐릭터의 움직임과 시선 이동, 화면 전환이 이뤄지는 스포츠 장르에서 말이다. 스틸샷으로 보면 작품은 도저히 3D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며, 실제 움직이는 장면으로 보아도 상당히 매끈한 2D 그래픽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셀 셰이딩을 매우 극한까지 구현하는 것에 성공했다. 게다가 작품은 카메라의 원근에 맞춰, 장면의 집중도에 따라서 프레임의 속도를 가변적으로 조절하며 분명 3D인 작품을 2D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앞으로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측면으로도 오랫동안 회자될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상징적 인물 아닌 '송태섭' 내세운 서사, 또 한번 증명한 인기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서사’와 ‘캐릭터’이다. 이번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연출을 맡은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의도적으로 작품의 주인공을 ‘슬램덩크’의 상징격인 두 인물, ‘강백호’와 ‘서태웅’(루카와 카에데)도 아닌 이를 내세웠다. 심지어는 고릴라 같은 우락부락한 몸매의 농구부 주장 ‘채치수’(아카기 타케노리)도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나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같은 명대사로 잘 알려져 있으며 작중 별명 ‘불꽃남자’로도 유명한 ‘정대만’(미츠이 히사시)도 아니다. 바로 ‘송태섭’(미야기 료타)이다. 분명 강백호, 서태웅과 함께 작중에서 북산고 농구부를 이끄는 주축이지만, 상대적으로 극 내에서의 비중이나 현실에서의 인기도 마냥 높다고는 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왜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슬램덩크’가 긴 공백을 끊고 돌아온 복귀작의 주인공격 인물로 송태섭을 내세운 것일까. 하지만 그러한 의문은 첫 장면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곧바로 풀리기 시작한다. 작품은 그간 작가가 미처 풀지 못했던 등장인물들의 과거사를 풀면서 막을 올리기 때문이다. 이전에 알려졌던 정보대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개봉과 함께 팬북에 수록되는, 송태섭과 그가 좋아하는 농구부 매니저 ‘이한나’(아야코)의 과거 인연을 그린 ‘슬램덩크’의 스핀오프 단편 ‘피어스’에 기초한 정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상당수는 이전까지 작가가 스스로 밝힌 바 없었던, 어쩌면 이 작품을 위해서 새롭게 만들어 내었을지도 모르는 송태섭이 북산고 농구부에서 활약하기 전의 이야기를 작품의 주된 서사로서 활용하고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송태섭에게 사실 형 ‘송준섭’(미야기 소타)와 여동생 ‘송아라’(미야기 안나)가 있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새로운 서사를 덧붙여 나간다. 삼남매 중에서 농구를 처음으로 좋아하고, 훨씬 농구로 두각을 드러냈던 것은 준섭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준섭은 친구들과 함께 바다 낚시를 나갔다 실종되고 말았다. 끝내 시체가 나오지는 않지만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에서 몇 년 넘게 사라진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준섭의 영향을 받고 농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태섭은 형이 사실상 죽은 뒤에도 꾸준히 농구를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계속 남들의 비교에 시달린다. 태섭이 준섭의 동생이라는 것을 아닌 이들에게는 준섭보다는 못한 태섭의 농구 실력을 놓고 수군거리고, 어머니 역시도 태섭이 농구를 좋아하는 모습에도 준섭의 그림자를 느끼며 꺼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사는 정통적인 성격의 스포츠 만화였던 ‘슬램덩크’에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던 설정이다. 본래 건들거리는 불량배였지만 우연히 채치수의 여동생 ‘채소연’(아카기 하루코)를 좋아하게 되며 생각지도 못하게 농구부에 들어가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강백호, 중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천부적인 농구 감각을 드러낸 서태웅, 사립학교에 비해 스포츠 인재를 수급하기 어려운 공립학교에서 전국대회 제패를 노리는 채치수의 모습은 전형적인 스포츠 만화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신인-천부적 천재-우직한 주장’의 캐릭터 유형에 해당한다. 채치수에 대한 열등감으로 농구부를 무단으로 불참하고 잠시 일탈하던 정대만의 캐릭터가 가장 엇나간 모습이지만, 이 역시 당대 유행하던 ‘비바! 블루스’와 같은 학원 액션물(학교폭력물)의 장르에서 영향을 받은 모습이다. 오히려 남들은 모르는 과거의 상흔에 영향을 받는 캐릭터라는 측면에서는 북산고 농구부의 감독 ‘안한수’(안자이 미츠요시)가 더 가깝다.
본작에서는 등장하지 않았고, 오히려 신파적일수도 있는 캐릭터의 숨겨진 이야기를 넣은 것은 쉽게 감동을 자극하기 위한 얄팍한 수작일까. 하지만 차츰 작품이 진행될수록 조금씩 연출자의 의도는 그렇지 않음이 드러난다. 송태섭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도 모든 작품의 포커스를 송태섭에게만 맞추지는 않기 때문이다. 송태섭보다도 더욱 비중이 낮았던- 원조 ‘안경 선배’라 부를 수 있을 ‘권준호’(코구레 키미노부)를 비롯해 채치수, 심지어는 작중에서 북산고 농구부와 필사적으로 대결하는 라이벌 산왕공고의 캐릭터들에게도 결코 적지 않는 초점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작의 두 주인공이었던 강백호와 서태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작품은 원작의 하이라이트이자, 이번 작품을 통해서 비로소 영상화되는 ‘산왕공고’전과 각 인물들의 산왕공고전 이전의 모습들을 플래시백으로 교차하는 투트랙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의 주된 구성인물도, 전개도 분산되는 연출은 작품에 대한 집중력도 분산시킬 수 있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게다가 산왕공고전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회자된 ‘슬램덩크’의 백미를 장식하는 대목이다. 이 장면을 정석적으로 푸는 대신 꽤나 많은 변주를 가한 전개는 자칫하면 독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품은 2시간을 훌쩍 넘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작품에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완급을 조절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형을 잃은 아픔에 쉽게 벗어나지 못하며 실력도 남들처럼 출중하지는 못한 송태섭을 비롯해 채치수나 권준호, 그 외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았던 북산고의 대다수 구성원들, 심지어는 호적수가 없어보이는 작중 최강의 고교 농구팀 산왕공고 농구부도 모두 저마다의 불안감을 초점에 맞춘다. 자신의 실력과 농구에 대한 애정이 과연 충분한 수준인지, 그렇게도 바라던 전국대회를 제패하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을지 모두가 자기 자신을 반신반의한다. 그러한 불안감에 잠시 방황하다가도, 결국 각자 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맞부딛친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노력’이 모인 결과가 작중 최고의 무대였던 ‘북산고 대 산왕공고’ 시퀀스였음을 원작자는 자신이 스스로 감행한 재해석을 통해 넌지시 드러낸다.
그렇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최대한 원작에 해당 시퀀스에 관여된 이들을 어떻게든 스크린으로 불러들이며 이 산왕공고전이, 그리고 ‘슬램덩크’가 단지 강백호와 서태웅만이 낳은 결과물이 결코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주전 선수들부터 교체 선수들까지, 직접적인 선수가 아닌 감독과 매니저는 물론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우승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방문한 두 고등학교의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모든 이들이 있었기에 이 최고의 순간이 가능했음을 최대한 너르게 할애한 포커스를 통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포커스는 무척이나 넓어졌지만 초점의 선명함은 무뎌지지 않았다. 오히려 감각적으로 재구성한 서사와 애니메이션의 출중한 기술력이 만나면서 원작과는 또 다른 흥미를 만들며 기운이 솟아오른다. 게다가 1990년대 방영된 TV 애니메이션의 전형적인 J-POP 사운드와 또 다른 매력을 지닌 10-FEET 등이 참여한 일본 락의 파워풀한 사운드, 원년 멤버였던 성우 강수진을 비롯해 모든 성우들의 열연이 더욱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 집중하도록 도운다. 심지어는 배우 고창석의 목소리 연기도 단역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생각 이상으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드러내었다.
‘모두에게’ 포커스 맞춘 접근, 오랜 팬들과 더해져 시너지
이렇게 ‘모두에게’ 최대한 포커스를 맞추는 접근이 이전 ‘슬램덩크’의 오랜 팬들과 더해져 더큰 시너지를 낳은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슬램덩크’를 사랑한 팬에게는 이제야 살아움직이는 ‘산왕공고전’의 뜨거운 열기에 감동을 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슬램덩크’를 당시 보지 않았거나, 연재가 끝나고 한참 후에 태어난 팬들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작품은 가능한 은유적인 묘사 등을 동원하여 왜 이 캐릭터들이 이렇게 행동하고, 이러한 심리를 가지는지를 원작에 대한 베이스가 없는 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연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작을 이미 너무 많이 봐 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원작을 여러 번 변주한 전개를 통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모두’에게 초점을 맞추는 작품은, 최대한 ‘모든 관객’에게 만족스러울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질적인 성취에 힘입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한일 양국에서 흥행 순항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작품 외적으로 할 말도 적지는 않다. ‘사쿠라기 하나미치’, ‘루카와 카에데’ 같은 원작의 일본식 이름보다 ‘강백호’, ‘서태웅’이 익숙할 정도로 로컬라이징의 역사에 큰 획을 그는 작품답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에 비해 제법 많은 한국어 더빙 상영 비율을 유지 중이지만, 여전히 자막 상영이 더빙 상영보다 훨씬 많은 상황이다. 게다가 더빙 상영회차도 쉽게 성인 관객이 볼 수 없는 시간대인 경우가 잦아, 적절한 더빙 상영 시간대 배치를 요구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식지 않고 있다.
작품이 ‘영웅’을 비롯해 같은 주에 개봉한 경쟁작인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장화신은 고양이 : 끝내주는 모험’. 권상우 주연의 한국 영화 ‘스위치’에 밀리지 않고 흥행하는 또 하나의 요인인 ‘적지 않은 상영관/회차 배치’도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다. 독립예술영화처럼 고정 관객층이 얇지는 않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오래전부터 지닌 고정적인 팬층과 별개로 완전히 대중적인 작품은 아니기에 보통은 한국에 개봉할 때는 상영관의 확보가 용이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러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첫날부터 800여개의 스크린, 2000여회의 상영횟수를 기록했다. ‘슬램덩크’가 기존 지녔던 인기를 고려해도 다른 한국 상업 영화, 대형 할리우드 영화 못지 않은 상영관/회차는 배급사인 NEW(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가 여러모로 노력한 동시에 도박을 한 결과일 것이다. 만약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일반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200-300여개관, 아니면 독립예술영화처럼 50여개관에서 상영했더라도 이렇게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
분명 작품은 뛰어난 질적 성취, 원작이 이전부터 지녔던 꾸준한 인기와 합쳐져 쾌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작품을 이전부터 좋아했던 팬과 그렇지 않은 관객을 모두를 최대한 배려하고자 하는 연출도 눈여겨 볼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의 요인까지 함께 신경 써야 모두를 위하고자 노력한 작품은 진정으로 ‘모두를 생각하는 작품’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동시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물론 오랜 공을 들여 영화관에 걸리는 작품들을 향한 존중이자, 지속적으로 다양한 작품이 꾸준히 생존하며 순환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만들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리라.

슬램덩크 명대사

○ 안선생님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여러분들은 강해질 거예요.”
“반드시 승리한다-!!!” “우리들은 강하다.” ‘자네들은 강하다.’
“나 뿐인가…? 아직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포기?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다….”
 
○ 강백호

“난 농구를 할 거야. 난 바스켓맨이니까…!!”
“강백호 날 쓰러뜨릴 생각이라면 죽도록 연습하고 와라.” (윤대협)
‘지금이 가장 성장할 수 있는 시기다…. 슛 연습은 정말 즐거웠어.’
“당신들의 나부랭이 같은 바스켓 상식은…. 내겐 통하지 않아!! 당신들은… 풋내기니까!!”
“농구… 좋아하세요?”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인가요? 난…. 난 지금입니다!!”
“왼손은 거들 뿐….”
“물론! 난 천재니까.”

○ 정대만

“안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이런 힘든 상황에서야말로 난 더욱 불타오르는 녀석이었다.’
‘어서 시합을 계속 하자구. 내 리듬이 깨지기 전에…’
“그리고 난…. 난 누구냐…? 난 누구냐! 네가 말해봐!! 내 이름을 말해봐…!! 난 누구냐?!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나한테 3점슛을 빼앗아 가면 이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이젠 내겐 링밖에 보이지 않아-!!’
‘그 슛은 지금까지 어떤 것보다도 높고, 아름다운 호를 그렸다. 고요하다. 이 소리가…. 날 되살아나게 한다. 몇 번이라도….’

○ 서태웅

“아까웠다. 너로선….”
“나도 미국에 간다. 오늘…. 여기서 너를 쓰러뜨리고 간다!”
“우리나라 최고의 선수란 어떤 선수라고 생각하느냐… 아마 팀을 국내 제일로 이끄는 선수…. 난 그렇게 할 수 있다. 한발자국도 물러설 생각은 없다.”

○ 채치수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시합을 제압한다.”
“뼈가 부러져도 좋다. 걸을 수 없어도 좋다. 간신히 잡은 기회다.”
‘내가 신현철에게 이길 수 없다면 북산은 질 거라 생각했다…. 우리에겐 주역이 될만한 선수가 많이 있다…. 내가 아니라도 북산에는 저녀석들이 있다. 내가 저녀석들의 재능을 발휘시켜 주면 된다. 진흙 투성이나 되라-. 그 역할을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분명 현 시점에서의 나는 신현철에게 지고 있다! 하지만… 북산은 지지 않는다-.’

○ 송태섭

‘저 녀석을 쓰러뜨리고 내가 톱이 된다.’
“정신차리지 못해!! 흐름은 우리 자신들이 가져오는 거야!!”

○ 권준호

“치수야, 나 이대로 그만두고 싶지 않아…. 농구가 좋아졌어.”
“들어갔다…!” “안경 선배, 은퇴는 연기된거죠? 이 천재 덕분에~!” (강백호) “날 울리지 마라. 문제아 주제에….”
‘저 녀석도 3년간 열심히 해온 녀석이다. 깔보아선 안됐었는데….’ (능남 유명호 감독)
“결국 패인은 바로 나!! 능남의 선수들은 최고의 플레이를 해주었습니다!!” (능남 유명호 감독)
 
○ 변덕규

‘우리 팀에는 점수를 따낼 수 있는 녀석들이 있다. 나는 팀의 주역이 아니라도 좋다.’
“네게 화려하다는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채치수!! 넌 가자미다…. …진흙투성이의 가자미….”
“네 엄청난 몸집은 그것을 위해 있는 거야!! 비록 실패해도 너의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