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 시사인을 홍보하는 고종석의 칼럼이 즐겨읽은 기사로 올라와 있다. 이 글을 읽은 이들은 시사인을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나 또한 고종석처럼 시사인의 '까칠거칠'면을 즐겨 본다. 아마 시사인을 봤던 이들이라면 대부분 동의할 수 있을 듯하다. 나도 재정 여유가 되면 시사인을 구독하든지 해야겠군.
얼마 전 김현진의 글을 블로그에 담아온 적이 있는데, 여전히 짧은 그의 글에서 재기발랄하면서도 날카로운 뭔가를 찾을 수 있다. 88만원 세대라는 그의 글을 보면 나도 고종석처럼(이건 감정은 고종석의 글을 보면서도 느꼈던 것인데...) “늬들 왜 그렇게 글을 잘 쓰니?” 이런 생각밖에 안든다.
지난해 가을 <시사IN>이 출범했을 때, 나는 그 미래를 크게 낙관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주도해 만든 언론사가 영업을 어떻게 감당해 나갈지도 걱정스러웠고, <시사저널> 시절 파업 중 다져진 구성원들 사이의 연대감이 얼마나 이어질지도 미심쩍었다. 나는 지금도 그 점에 대해선 확신이 없지만, 두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이 잡지가 결호 없이 45호까지 나왔다는 것. 그리고 이 시사주간지가 한국 저널리즘 시장에서 흔치 않은 ‘비판언론’이라는 것.
<시사저널> 시절부터의 독자로서 판단컨대, <시사IN> 기자들은 파업과 창간 과정에서 약간의 ‘존재전이’(내가 싫어하는 좌파 상투어다)를 겪은 것 같다. 기자들의 인적 구성에 변화가 거의 없는데도, <시사IN>은 <시사저널> 시절의 ‘엄숙한 중립’에서 벗어나 한결 발랄해졌고, 사뭇 약자 편이 되었다.
<시사IN>에서 내가 ‘편집국장의 편지’보다 먼저 찾아 읽는 것이 ‘까칠거칠’ 난이다. 비교적 젊은 외부 필자들이 돌아가며 쓰는 ‘까칠거칠’ 난은 (아마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난과 더불어) 생기와 통찰력에서 한국어 칼럼의 맨 꼭대기에 있을 것이다. 사적 일화를 감칠맛 나는 문체에 실어 진지하게 글을 풀어나가는 김현진씨(나는 <시사IN> 덕분에 그녀의 팬이 되었다)조차, 이따금 엷게나마 풍자의 면사포를 걸친다.
-------------------------- 이 후보님, 눈높이를 낮추라니요? (시사인 [5호] 2007년 10월 15일 (월) 11:22:54 김현진 (에세이스트))
눈높이를 낮춰 사는 것은 타이틀이 곧 그 사람을 말해주는 이 시대에 정면으로 반하는 방식이다. 어느 대학을 다녔고 어떤 직장에서 일하는지가 곧 그 사람을 말해주는 2007년의 한국 사회에서 ‘눈높이를 낮추는’ 것은 ‘젊은 사람이 궂은일 마다 않고 경험을 쌓겠다니 장하다’고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 그냥 ‘원래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 영영 고정되는 일이다. 그들이 눈높이를 낮출 수 없어 발버둥치는 이유는, 안 그래도 낮은 처지에서 눈높이까지 낮췄다가는 앞으로는 잘살 수 있을 거라는 최후의 희망조차 멀어질까봐서이다.
일을 똑바로 가르쳐줄, 노하우와 인맥을 전수해줄 유능한 선배가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눈높이를 낮춘’ 회사에 남아 있을 리 없으니 눈높이 높은 사람들이 가는 회사에서 배우는 것과 같은 업무 능력을 쌓을 길이 없다. 실무를 순조롭게 처리하기 힘든 수습 과정에서도 몇 사람 몫의 일이 무리하게 할당되는 일이 허다하다.
눈높이를 낮췄던 그는, 아예 영영 낮은 곳에 임한 사람으로 살게 된다. 이렇게 어영부영 이삼 년 살다 보면 서른이 넘고, 주저앉기는 한층 쉬워진다. 이러한 현실에서 눈높이를 낮추라는 것은 그냥 낮게 살라는 말이다. 눈 깔고 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혹시 잘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기 싫어서 그토록 많은 88만원 세대들이 부모 등골 빼먹는 거 뻔히 알면서도 도서관에서 그토록 숱한 밤에 늦도록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명박 후보가 ‘눈높이를 낮추라’는 충고를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이유는 그저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색이 대통령 후보가 그 정도 인식으로, 그런 충고나 하려거든 부디 어른이 몸소 모범을 보이는 차원에서 먼저 눈높이를 낮추고 서울시장 경력으로 만족할 일이다.
----------------------------- 아비 덕 못 본 자식의 부러운 눈빛 (시사인 [11호] 2007년 11월 26일 (월) 11:01:49 김현진 (에세이스트))
이명박 후보는 이번에 자녀들 유령회사 직원 등록 건으로 또다시 나를 화끈하게 웃기고 말았다. 당신 일처럼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입을 꾹 다문 아버지 앞에 나는 그 집 자식들 부러워 죽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버지, 좋은 학교” 하면 위장 전입을 해서라도 좋은 학교 보내주고, “아버지 히딩크” 하면 히딩크와 사진 찍어주고, “아버지 돈이 없어요” 하면 “아버지 건물 관리나 해” 하는 아버지라니, 대통령 후보 이전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식이 바랄 수 있는 아버지의 최대치가 아닌가.
정의가 실종된 부끄러운 아버지들의 제국을 만든 데 일조한 것은 뻔뻔한 자식들이었고, 그 아버지들의 힘을 더욱 강고히 만든 것은 ‘내게도 기회가 온다면 사양하지 않으리라’ 는 자세로 그것을 바라본 나와 같은 ‘없는 집’ 자식들이었다. 옳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것도 죄였다. 내가 이 후보의 자식 사랑을 비웃을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내 아버지에게 그와 같은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버지가 너무 허약해서 기회가 없었을 뿐, 가능하기만 했다면 아버지가 먹여주는 단물을 얼마든지 빨았을 것이다. 제 가족, 제 집단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부끄러운 아버지와 그것을 얼른 받아 삼키는 뻔뻔한 자식이 이루는 부정한 톱니바퀴를 돌아가게 하는 근본에는 바로 나처럼 아비 덕 못 본 자식의 부러운 눈빛, 행여나 나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진다면 눈감아줄 준비가 언제라도 된 그 눈빛 역시 일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혁이란, 진보란, 좋은 날이란 이토록 호락호락한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올 리 없는 것인데도.
------------------------------ 국민 입 막는 음흉한 주문 (시사인 [14호] 2007년 12월 18일 (화) 10:22:14 김현진 (에세이스트))
“아자 아자 파이팅!” 이 구호는 어깨의 짐이 아무리 버거워도 끽소리 말고 분발하라는 주문이다. 이 구호가 나에게 음흉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것이 공적 장치나 제도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이나 논의 없이 그것을 즉시 마치 판타지에 나오는 순간이동처럼 사적 영역의 개인 노력이나 역량, 자질 등의 문제로 옮아오는 주문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분발도, 그 개인들이 마음껏 분발하도록 보호해줄 사회 장치가 결합되어야만 가능한 것일 텐데도 지금 모두가 파이팅해야 한다면서 달려가고 있는 현재 상황은 국민 개개인의 어깨를 과하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아자 아자 파이팅’이라는 구호는 잠시 쉬게 두고, 잠깐이라도 그만 싸우고 그만 달리고 어깨에 멘 무거운 짐을 차분히 고민해야 할 시기다. 이게 도대체 왜 이렇게 무거운지, 어떻게 운반할 때 최대 효율이 나올지, 과연 이게 어떤 종류의 짐인지, 이것을 개인이 더 잘 지고 가기 위해서 어떤 사회 장치와 합의가 필요한지 지금 고민하지 않으면 그 짐은 갈수록 무거워질 것이다.
--------------------------- 이명박 장로님, 어쨌거나 샬롬! (시사인 [17호] 2008년 01월 07일 (월) 11:25:48 김현진 (에세이스트))
앞으로 5년을 수많은 의혹 속에서 뒷말을 듣느니 ‘미안하다’ 한마디만 하시면 당신의 죄는 깨끗이 용서받을 것 같네요. 경제만 살리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든 국민이 용서할 준비를 하고 뽑았으니까요.
제가 좀 서글프게 느끼는 건 장로님과 우리가 믿는 그분께서는 평강의 왕,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분이실진대 장로님께서는 멀쩡한 등불 보고도 효율상 등불이 웬 말이냐 형광등으로 전면 교체해라, 싱싱한 갈대한테도 글로벌 시대에 갈대 재배는 한물갔으니 유실수로 바꾸라고 하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샬롬.
----------------------- 물신 시대 20대의 자화상 (시사인 [20호] 2008년 01월 28일 (월) 11:49:13 김현진 (에세이스트))
모든 젊음은 나름의 고유한 불행을 딛고 어른이 된다. 그 불행은 겪어내고 난 뒤에는 훈장으로 변모한다. 사람은 밥도 먹고 살지만 생색을 먹고 살기도 한다. 고상한 말로 하면 자부심이 될 것이다.
지금 20대의 가장 큰 불행은, 생색낼 거리가 없는 삶을 살았고 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20대는 비굴을 생활화하고 안갯속에서 헛발질만 하다가 제풀에 넘어지면서 시시때때로 허무와 맞서야 하지만, 시대의 불행을 겪어낸 뒤 마땅히 누려야 할 자부심은 눈곱만치도 없는 불행한 세대이다. 특별히 싸울 대상이 없는 시대, 다만 물신의 시대, 무너뜨리려 해도 형체 없이 다시 일어나서 덤비는 모래와 싸워야 하는 시대, 무언가 소리 내어 외치면 촌스러워 보인다고 ‘쿨(cool)’이 손가락질하며 끊임없이 청춘의 뜨거운 체온을 얼리려 드는 시대, 안개와 싸워야 하므로 헛발질만 하다가 제풀에 넘어지는 세대.
------------------------------- 국민 여러분, 억울하면 영어 하시라 (시사인 [24호] 2008년 02월 26일 (화) 11:44:02 김현진 (에세이스트))
새 정부는 바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지 않으면 경쟁력이 없고 새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며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만 내일부터 당장 상사에게 영어 서류를 갖춰 내지 않으면 결재가 안 나올 것도 아니고 가게에서 물건 살 때 영어로 주문하지 않으면 못 살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다들 주문 외듯 영어, 영어 하는 진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영어 잘하자는 주장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이전에 필요한 논의는 쓱쓱 지나쳐버리고 영어 잘하면 출세한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분위기가 문제이다. 그 필요한 ‘논의’의 일부가 나의 자취집 창문 아래에 종종 출몰한다.
새 정부는 영어가 그리 필요없는 사람조차 가만 있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게 한다. 없는 집에서 태어난 죄로 사교육은커녕 골목에서 온종일 뛰노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내 이웃 아이는 장차 어찌하라고. 그 아이들은 아직 영어 권하는 사회의 불안감을 모르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커질 그 초조함은 얼마나 눈덩이 같은 절망으로 불어날 것인가. 그러기 전에, 같은 선에서 출발할 수는 없더라도 조금이라도 그 근처에서 출발하게끔 해주어야 하는 게 어른과 사회의 의무 아닌가. 아침부터 밤까지 놀기만 하는 그 아이들의 죄는 도대체 뭘까. 그냥 없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죄일까. 이명박 정부의 구호는 진정, ‘국민 여러분, (억울하면) 성공하세요’란 말인가.
---------------------------- 제발 좀 어른답게 삽시다 (시사인 [28호] 2008년 03월 25일 (화) 13:59:25 김현진 (에세이스트))
작은 공동체에서 모두가 본이 되어야 할 어른이라는 자리에서 남의 아이도 내 아이처럼 생각하던 시절의 권위를, 오로지 남보다 내가 잘 먹고 잘살기만을 기원하고 남의 자식보다 내 자식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 부려 먹히지 않고 부려먹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을 모두가 뻔히 아는 오늘날 자기가 필요할 때면 얼른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을 볼 때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저를 자식처럼 아끼지도 않으면서 왜 부모처럼 존경받으려고 하세요? 우리 공평하게 합시다, 공평하게.’
자기 말의 정당성을 입증해 보이거나 자기가 존경받을 만한 증거를 빈약하게도 ‘내가 너만 한 딸, 여동생, 손녀가 있다’는 말로밖에 내세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말도 섞기 싫어져서 ‘아, 예예 그러세요’ 하고 싶으니 실로 슬픈 일이다.
우리가 사는 차갑기 짝이 없는 실용의 시대, 어차피 지금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예의는 가짜 혈연을 들이대며 어거지로 존경과 복종을 획득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서로를 시민 대 시민으로 존중하는 것이 합리적이고도 건전한 길이다. 그러므로 일면식도 없는 아가씨에게 갑자기 다스 베이더처럼 ‘내가 네 애비’라며 앙탈들 좀 하지 말고 부디 좀 어른답게들 구셨으면, 제발.
----------------------- 내겐 너무 먼 공공 도서관 (시사인 [34호] 2008년 05월 06일 (화) 10:56:06 김현진 (에세이스트))
한때 회사 가까이에 있는 도서관을 통해 비루한 현실에서 잠깐씩 고개 돌려 인생의 희망을 곱씹곤 했다. 회사가 이사한 뒤에는 도통 도서관을 찾을 수 없었다.
책이 마음의 양식이고 독서가 경쟁력이라고 사방에서 떠들지만 근로자가 쉽게 책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의외로 많지 않다. 회사가 이전한 뒤, 나는 가장 먼저 도서관을 찾아 헤맸지만 코빼기도 보지 못해 서울시 민원 120에 전화를 걸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서초구에는 대출 가능한 도서관이 없습니다.” 아파트 단지 사이사이마다 휘날리는 현수막에 써 있는 ‘교육 서초, 명품 서초’라는 구호는 ‘좋은 사교육으로 일류대에 진학한 뒤 명품을 마음껏 살 수 있는 서초구민이 되자’는 다짐이었나.
간혹 주말에도 여는 곳이 있고 야간 개관을 시행하는 곳도 있지만 일단 도서관 수가 너무 적다. 한 권에 1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책을 일일이 다 사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책을 읽을 곳은 도통 없으니 OECD 가입 국가 중 독서율이 꼴찌라는 것도 당연한 결과 아닌가.
우리에게는 더 많은 도서관이 필요하다. 독서율 꼴찌라는 식의 초조함이나 ‘독서가 경쟁력’이라는 공병호 스타일의 구호를 넘어, 독서는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순수한 위로이자 쾌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돈을 엄청 들인 것이 아니면 진짜 즐거움이 아닌 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책은, 그 오해를 바꿔줄 힘을 갖고 있다.
------------------------------- 그래도 우리는 MB와 대화해야 한다 (시사인 [37호] 2008년 05월 26일 (월) 10:45:34 김현진 (에세이스트))
이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정권을 이루는 이들이 부자라거나 아파트를 많이 가졌다거나 하는 따위가 아니다. 어느 나라에나 부자 정치인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 나눌 수 있는 정상적인 대화의 틀에 진입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국민을 배제한 채 쇠고기 협상을 진행한 뒤 “싫으면 안 사 먹으면 된다”라거나, 국민을 향해 손자 대하듯 “떼쓴다고 다 되는 것 아니다”라고 말할 리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상적인 패러다임 안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시작은 고학생으로 미약했을지 모르나, 36세에 사장이 된 뒤 그의 인생은 심히 창대했다. 그는 자식을 위장 전입시켜 좋은 학교에 보냈고, 자기도 건축법 위반, 수뢰 의혹, 근로기준법 위반, 범인 도피, 사기 혐의 등으로 여러 사람 바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한 나라의 최고 공직자이자 동시에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 세를 준 건물 주인이며 교회 장로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이런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세계에서 자식을 좋은 학교 보내고 싶은 것이야 애틋한 부정일 터이며, 건축법과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거나 사기 혐의를 받는 것쯤은 사업하다 보면 흔히 겪을 수 있고, 선거법 위반은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만한 일이리라.
훌륭한 거짓말쟁이가 되는 방법은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참말로 믿는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에 사는 저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실로 저들은 자기가 하는 말을 열렬히 믿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이 정권이 국민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자고로 사장과 직원 간 대화는 잘 안 된다. 사장은 직원을 끌어다 놓고 자기 이야기만 실컷 하고는 “아 오늘 정말 좋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라며 흐뭇해한다. 그런 사장 노릇을 몇 십년 한 이 대통령이 한순간에 그 습관을 버리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 습관을 반드시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상태에서 보면 그들을 정상적인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가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향한 대화를 포기할 수 없다. 희망이 안 보이면 끈질기게 버티기라도 해야 한다. 그들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대화하기를 체념하고 “원래 그런 사람들인가 보다” 하며 그들을 포기해주는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우리 안의 이명박’부터 몰아내자 (시사인 [40호] 2008년 06월 17일 (화) 11:42:21 김현진 (에세이스트))
그는 2008년의 대한민국에서 실로 운명적인 대통령이다. 온갖 불가사의한 어두운 그림자를 끌어안은 그에게 너끈히 대통령 자리를 넘겨준 것은 진짜로 경제를 살릴 줄 믿었던 국민도 아니고, 극렬 보수 지역 사람도 아니고, 그날 나 몰라라 투표 용지를 외면하고 놀러 가버린 사람도 아니다. 그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준 범인은 우리 안의 속물성이다. ‘내 아파트 값도 좀 확 뛰었으면’ ‘우리 아이는 자립형 사립고에 가고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으면’ ‘나도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이명박처럼 한가락하고 싶다, 아니면 내 자식이라도’ 하는 속물스러운 욕심, 저마다의 속물성이 이명박 대통령이 갖춘 온갖 속물성에 감응한 것이다. 그는 남녀노소 전 국민의 속물성을 자극할 만한 속물 판타지의 종합 선물세트와도 같았다.
고학생에서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성공한 기업인, 아들을 히딩크와 함께 사진 찍게 해주는 아버지, 딸에게 건물 하나 안겨서 월세 받아먹고 살게 해주는 자상한 친정 아버지, 아내가 몇 천만원짜리 핸드백을 들고 다니다 사진 찍혀서 구설에 오르게 할 수 있는 재력가 남편,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테니스를 즐길 수 있는 럭셔리한 취미생활. 우리는 이런 힘센 그와 한편이라 믿고 싶었고 그가 누리는 것을 누리고 싶었다. 그 소망이 마침내 그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잊고 있었다. 속물은 결코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것을, 속물은 오로지 그 자신만의 편이라는 것을.
거리에 나오는 것만으로는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이명박 퇴진을 외치기 전에 먼저 숨통을 끊어놓아야 할 것은 ‘우리 안의 이명박’이다. 우리 안에 한 명씩 가지고 있는 음습한 이명박, 그를 먼저 끝장내야 한다. 100만명 아니 1000만명이 촛불을 들더라도 우리 안에 있는 이명박을 먼저 퇴진시키지 않는 한, 저 컨테이너 철옹성 안에 있는 진짜 이명박이 퇴진할 확률은 제로다.
--------------------------------- 예수가 컨테이너 앞에 서 있다면… (시사인 [43호] 2008년 07월 09일 (수) 10:24:51 김현진 (에세이스트))
기독교도인 그들은 고통받는 예수 제자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구약의 족장이길 원하는가. 예수는 ‘내 백성을 가게 하라…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마라’ 했다. 예수님 곁엔 갈 수 있어도 대통령 곁엔 못 가는 모양이다.
예수가 2008년 여름의 컨테이너 앞에 서 계셨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다 큰 아들을 잃은 과부를 마주하신 예수가 가장 먼저 꺼내신 말은 ‘울지 마라’였다. 오늘도 거리에서 우리가 정말로 싸워야 할 대상은 MB를 넘어 틈만 나면 우리 마음속에 속속들이 스며드는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별수 있나 어쩔 수 없는 거지’ 하는 패배주의이다. 예수는 물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듯이, 이 상처가 낫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