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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와 계급문제

새벽길 2009. 1. 31. 05:26
자신이 제창했던 88만원 세대론이 조선일보와 같은 극우신문에 이용당하는 것을 우려하면서 공저자인 우석훈의 글을 비판하는 박권일의 글을 레디앙에서 볼 수 있었다. 이 글을 보고난 소감은 박권일이 88만원 세대론에 대한 비판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레디앙의 글에서 불평등연구회를 소개한 한겨레신문 기사를 인용하여 조선일보나 변희재가 아니라 불평등연구회의 세대론 비판연구자들이 소통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얘기한다. 그는 세대론이 계급문제로 가는 '우회로'라고도 하였지만, 세대론 때문에 계급문제가 가려지는 상황에 대한 인식은 불철저했다는 점에서 우석훈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진보블로거인 EM님도 잘 지적한 바 있다. 
 
더욱이 우석훈과 박권일은 세대론의 한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계급문제를 내세울 경우 책이 잘 팔리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세대론으로 포장하였다고 밝힌다. 글쎄다. 『88만원 세대』를 읽고 계급문제에 천작한 이가 얼마나 될까. 이 책을 가장 열심히 읽었다는 20대 명문대생들 중에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로 인식하는 이들이 있었을까. 오히려 88만원 세대와는 다른 식의 길을 갈 이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신기섭의 지적처럼 잘해야 “제 밥그릇만 챙긴 386 때문에 '잘난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책을 덮었을 확률이 높다. 나아가 『88만원 세대』에서 계급문제를 읽어내는 20대라면 굳이 그 책을 읽을 필요도 없으리라. 
  
이러한 점 때문에 『88만원 세대』나 레디앙에 실린 박권일의 글을 선의로만 볼 수 없다. 이미 무슨 289세대론을 제창하면서 이것이 진보적인 양 포장하면서 설파하는 이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88만원 세대론이 미친 해악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레디앙에 딸린 덧글들은 이 부분을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해 진보불로거인 marishin님이 언급한 말이 정곡을 찌른다. "책이 많이 팔리고 많은 사람이 읽도록 노력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목적이 좋더라도 해서는 안되는 짓도 있다. '설탕물'을 뿌리는 것이다. 설탕을 많이 넣으면 먹는 사람의 이가 썩는다. 게다가 먹는 사람이 단물만 빼먹고 내버릴 위험이 아주 크다."(신기섭,
'88만원 세대'의 문제점)
 
이러한 인식은 리오 후버만이 '진보진영에 주는 충고'라는 글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게 했는데, marishin님 또한 그 글귀를 떠올렸나 보다. '우리의 말에 세상이 귀기울이게 되더라도 우리의 주장이 왜곡되거나 귀기울일 가치가 없게 변질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유연성은 항상 강조되어 왔지만, 그에 못지 않게 처음에 지녔던 원칙 또한 잊지 않아야 한다. 물론 다수/주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것, 유연한 사고를 갖는 것, 이러한 것들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무엇을 위한 다수/주류인가, 유연함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러한 것들이 언제 어디서나 질문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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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레디앙, 2009년 01월 30일 (금) 08:46:04 박권일 / 『88만원 세대』공저자)
변희재에 낚인 우석훈…세대론은 계급문제로 가는 '우회로'
 
근본적인 문제는 『88만원 세대』가 글자그대로의 '세대론'에 갇혀버리는 상황이다. 처음 우리가 『88만원 세대』를 기획할 때 나는 20대, 구체적으로 20대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기자생활을 할 때 가장 열심히 썼던 기사들이 비정규직, 저학력, 여성노동자 문제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도 작용했다. "열악하고 위험한 지역일수록 봉사 점수가 높아 취업에 유리하다"며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는 어느 후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그 아득한 느낌, 내 안의 무언가가 송두리째 무너지던 기억이 그것이다.
 
우리는 공히 세대론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계급문제를 전면에 내세울 경우 책이 얼마나 팔리지 않을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떠올린 방책이 불안정노동의 전면화라는 다분히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작업이 말처럼 순조로울 리 없었다. 세대론에 집중하다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쉽다.
 
모든 세대의 능력은 동일하다. 다만 그 세대가 처한 환경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386세대의 성찰을 요구하고 그들이 88만원 세대의 손을 잡아줄 수 있으며 잡아주어야 한다고 했던 『88만원 세대』의 주장과, 386세대는 사회적 해악이며 투쟁의 대상일 뿐이라는 주장의 차이를 이해하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충남 서산에는 100% 비정규직 고용에, 법정최저임금‘만’ 주기로 악명이 자자한 동희오토라는 공장이 있다. 거기서 콘베이어벨트를 타고있는 노동자들 대다수가 20대, 즉 88만원 세대에 속하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들어본 적조차 없는 청년들이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중 한명으로서 내가 늘 부끄럽고 고민스러운 건, 이 책을 가장 열심히 읽는 20대가 이른바 명문대생이란 점이었다. 정작 88만원 세대에 한없이 가까운 20대들일수록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읽지 않는다.